지역별 검색
TOTAL. 4004건
-
성상규 공적비
성상규(1923~1951)는 1942년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사의 추방과 조선어 사용 등을 요구하는 투쟁을 계획하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됐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성상규는 일본인 교사들에게“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한국어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성상규는 수업 거부 투쟁으로 체포돼 1942년 12월 21일 송치됐다. 이후 1943년 1월 13일‘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손대형 공적비
손대형(1911~1975)은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공립수산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이었다.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부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이후 구속 학생 석방과 식민지교육 철폐, 민족해방 등을 요구하는 동조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손대형은 격문을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준비하다가 발각됐다. 손대형은 동맹휴학을 준비하다 체포돼 같은 해 12월 20일 불기소 및 퇴학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오영섭 공적비
오영섭(1922~1987) 1929년 전라남도 여수군의 여수공립수산학교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독서회’에 참여하여 민족정신을 함양했다.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시체제기에 돌입했지만,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작은 규모의 조직 및 개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오영섭은 일본인 교사들에게“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모국어(한국어-인용자)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오영섭은 수업 거부 투쟁으로 인해 1942년 12월 21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광주검사국에 송치됐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황병익 공적비
황병익(1922~1984) 1942년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5학년 재학 중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사를 추방하기 위해 집회를 계획하고 수업 거부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됐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황병익은 일본인 교사들에게 “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모국어(한국어-인용자)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황병익은 수업 거부 투쟁으로 인해 검거돼 1943년 12월 21일 ‘폭력행위(暴力行爲) 등 처벌(處罰)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송치됐다. 이후 1943년 1월 13일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김권문 공적비
김권문(1912~1983)은 1929년 8월 전남 여수에서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여도현 등이 주도하는 비밀결사 수산학교 독서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9년 8월 상순 전라남도 여수읍 서정 여운종의 집에서 6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들은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사회 실현과 항일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했다.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이던 김권문 또한 독서회 조직에 참여하고, 며칠 후인 1929년 8월 상순 여운종의 집에서 열린 회합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강령을 결정하고 ‘수산학교독서회’결성에 참여했다. 독서회 회원은 회비를 각출하여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교재를 읽고 연구, 토론했다. 김권문은 1930년 1월 12일까지의 십 수회에 걸친 모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사상이 좋지 않음”이란 평가를 받고 퇴학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김우곤 공적비
김우곤(1910~1951)은 광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8년 4월 전라남도 여수수산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부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면서 구속 학생 석방과 식민지교육 철폐, 민족해방 등을 요구하는 동조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1930년 1월 여수수산학교 학생들도 격문을 제작하고 시위운동을 일으키려고 준비하다가 체포됐다. 이에 김우곤은 광주학생운동지지 시위로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동맹휴교를 계획하다가 퇴학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쌍산 항일의병 유적지 중동마을입구
쌍산 항일의병 유적지는 중동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이유는 쌍산의소가 양회일 의병부대의 훈련장소이자 근거지였기 때문인데, 마을 유지인 임노복에게 의병의 집결지와 훈련장소를 협조 받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이후 중동마을은 의병기지로 변모하였다. 양회일은 1905년 을사늑약이후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친동생 양회룡과 양열묵·이동화·박기년·양상길·정순학·서필환·양동진 등과 함께 항일 투쟁을 결의하였다. 1908년 1월에는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어 1909년까지 항일투쟁이 펼쳐졌으며, 기삼연 의진, 고광순 의진과 연계하여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창의하게 된다. 1907년 7월 양회일은 15년형을 선고받고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특사로 풀려났지만, 1908년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단식투쟁한 지 7일 만에 순국하였다. 쌍산의소는 한말 의병의 대표적인 창의소이며, 전라남도 화순군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남 의병활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쌍산의소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쌍산의병사
쌍산의소는 한말 의병의 대표적인 창의소이며, 전라남도 화순군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남 의병활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계당산 일대는 쌍산, 쌍봉 또는 쌍치라 불리었는데, 이것에서 유래하여 ‘쌍산의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쌍산의소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쌍산의소 본부는 이 마을의 개인 소유 가옥인데 의병지도자들이 모여 창의를 계획하고, 의병처의 본부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쌍산의소는 양회일 의병부대의 훈련장소이자 근거지였는데, 1905년 을사늑약이후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친동생 양회룡과 양열묵·이동화·박기년·양상길·정순학·서필환·양동진 등과 함께 항일 투쟁을 결의하였다. 양회일은 쌍봉사 윗마을 증동을 찾아 마을 유지인 임노복에게 의병의 집결지와 훈련장소를 협조 받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으며, 이후 중동마을은 의병기지로 변모하였다. 1908년 1월에는 호남창의소가 설치되어 1909년까지 항일투쟁이 펼쳐졌으며, 기삼연 의진, 고광순 의진과 연계하여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창의하게 된다. 1907년 7월 양회일은 15년 형을 선고받고 지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특사로 풀려났지만, 1908년 다시 의병을 일으키다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단식투쟁한 지 7일 만에 순국하였다.
-
쌍산의소 유황굴 터
쌍산의소는 한말 의병의 대표적인 창의소이며, 전라남도 화순군 계당산 일대를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전남 의병활동의 거점 가운데 하나이다. 예로부터 계당산 일대는 쌍산, 쌍봉 또는 쌍치라 불리었는데, 이것에서 유래하여 ‘쌍산의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쌍산의소에는 무기 및 탄약을 공급하는 무기 제작소와 유황의 저장고인 유황굴, 의병 방어시설인 의병성(義兵城)의 흔적이 남아 있어, 대규모의 의병들이 주둔하여 스스로 무기를 만들어가며 일본군에 대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유황굴은 1907년~1908년까지 의병활동을 전개하며 필요한 탄약을 만들기 위해 유황을 채취한 곳이다.
-
동학정(동학군 숙영지)
전북 고창에 있는 동학정은 동학군이 숙영(군대가 병영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는 일, 훈련의 일종)했던 곳을 기리기 위해 2014년 세워진 정자이다. 이곳은 고창군, 부안군, 정읍시, 장성군, 영광군, 무안군, 함평군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불리었으며, 휴식처(윷판두재), 식수터, 마을 주변에 존재하는 20여 개의 벙커와 땅굴 등이 보존되어 있어 문화적, 역사적으로 큰 가치가 있다. 고창에서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사회적·경제적 불평등과 수탈에 맞서 일어난 각 지역 민란이 전국적인 항쟁으로 옮아 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무장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
괘불탱화의 태극기
탱화는 천이나 종이에 부처, 보살, 성현들을 그려 벽에 거는 불화를 말하는데, 남원 선원사 명부전에 지장시왕도 괘불탱화가 있다. 지장은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며, 시왕은 사후세계에서 인간들의 죄의 경중을 가리는 열 명의 심판관을 의미한다. 명부전은 사람이 죽은 뒤 살아있을 때의 일을 심판받는 명부를 상징하는 곳으로, 사찰에서 저승의 유명계(신령과 부처가 있는 세계)를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따라서 사후에 10번의 재판을 주관하는 10명의 왕들을 모신 전각이며,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곳인데, 제 6대 왕인 변성대왕 관모에 태극기가 그려져있다. 태극의 양은 홍색, 음은 뇌록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크기는 8.5cmX3cm이다. 화기에 따르면 1917년 11월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910년대 이후 독립운동 시대의 태극기 문양과 같아서 독립을 바라는 불교계의 서원이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10년대 탱화 제작 등 모든 예술 행위가 일제에 의해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검열을 피하고자 지장시왕도가 제작된 이후에 작게 태극기를 그려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
익산 서두교회(3.1운동참여교회)
서두교회는 1898년 설립되었으며, 익산 지역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참여한 교회이다. 서두교회는 1898년 11월 서두리에 살던 주민 정정보가 미국남장로교 전주선교부 소속 최의덕(미국명: 테이트)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기도처를 마련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1903년 10월 10일 정식교회가 설립되고, 루터 멕커첸 선교사가 초대 당회장이 되었다. 이후 1922년 삼신학교를 설립하여 우리말로 신앙 교육과 일반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익산 3.1운동과 신사참배반대운동에 참여하였다. 익산 3.1운동은 천도교 조직을 활용하고, 기독교 조직과 연계하여 두 종교가 함께 주도한 점이 특징인 3.1운동이며, 특히 1919년 4월 4일 시위에 1,000여 명의 군중이 참가할 만큼 큰 규모의 시위를 벌였으며, 6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9명의 군중이 체포되었다. 이날 서두교회의 박병렬 장로도 시위에 참여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후 박병렬 장로는 맥커친 선교사의 항의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