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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홍 동상
안재홍(1891~1965)은 경기 평택 사람이다. 1912년 일본 동경에 거주하던 한국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선유학생 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3년 1월 일본 조도전 대학에 재학중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서울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청년외교단을 조직하고 총무를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9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1월 조선일보의 주필로 재직하고 있을 때 신간회의 총무간사에 피임되어 강령을 작성하고 발표하여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각 지방의 창립총회를 지원하기 위하여 강연 등을 실시하면서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8년 12월 전남 광주에서 학생운동이 봉기되자 당시의 정치단체인 신간회와 협동하여 조선일보 부사장직에 있으면서 조선민중대회를 열고 일제의 민족차별적인 처우를 규탄하다가 체포되어 1930년 1월 1일 기소유예되었다. 1937년 5월 남경군관학교 학생모집 운동으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 회부되고 1938년 5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9년 3월에는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42년 12월 조선어학회에서 착수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에 연관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미군정청 군정장관, 민의원 의원 등으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다가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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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전시관
테일러의 본업은 광산업이었다. 1919년 2월 28일 우연히 조선호텔을 들렀다가 고종황제의 국장 취재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듣고 통신원(기자)의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그날 테일러의 아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고 그는 간호사들이 외국인 전용 병실 침대 밑에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숨기는 것을 목격한 뒤, 이를 입수해 보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렸다. 독립 운동뿐만이 아니라 3·1운동 관련 기사로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던 테일러는 3월 3일 치러진 고종의 국장도 취재했다. 테일러는 고종의 국장 취재 이후 3·1운동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그는 4월 16일 일본군이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찾아 취재했다. 그의 기사는 뉴욕타임즈 4월 24일자에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Say Japanese Troops Massacred Koreans)’ 제하 기사로 게재됐고 일본에서 발간되던 영자지 ‘재팬 애드버타이져(The Japan Advertiser)’ 4월 27일과 29일자에도 보도됐다. ‘제암리 학살사건’ 외에도 테일러는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투사에 대한 재판도 취재했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3일자에 실린 손병희 선생(1861~1922) 등 독립투사 재판 관련 기사에는 “신문기자석에 처음으로 서양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재판의 광경을 제일 먼저 세계에 소개할 미국 연합통신사의 통신원 테일러 씨더라”고 게재돼 있다. 테일러는 1923년 종로구 행촌동 내, 권율 장군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붉은 벽돌집을 짓고 조선에서의 삶을 영위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정점에 치닫던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한다. 테일러는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 정부와 미군정에 편지를 보내며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하지만 1948년 6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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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유적비
이관술(1902~1950)은 경상남도 울산 출생으로, 이명(異名)은 이수해(李樹海), 김종석(金鍾石), 김대성(金大成)이다.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지도했으며, 11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33년 1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4년 3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 했는데, 그해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박선숙(朴璇淑)과 결혼했다. 가출옥 상태였던 1934년 9월부터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던 이재유(李載裕)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여, 12월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했다. 1936년 10월 이재유 등과 함게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재건그룹의 통일체인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고 출판부 책임자로서 기관지 『적기(赤旗)』를 발간했다. 이후 대전 · 대구 등지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다니면서 계속 활동을 모색했다. 1939년 1월경 경성으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여동생 이순금(李順今), 김삼룡(金三龍) 등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여 4월경 ‘경성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구성했다. 「노동자 리플렛」,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등을 제작 · 배포했으며, 기관지 출판 책임자로서 9월부터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월간으로 발간했다. 1940년 2월 인천에 편집아지트를 마련하고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을 피신시켰다. 그해 8월 함북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지도자 장순명(張順明) 등과 함북노조준비위원회를 청진좌익노조조직준비위원회로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1월 검거되었다가, 1943년경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이어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족통일전선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해 7월 6일 ‘조선정판사위폐사건’으로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11월 28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이던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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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 기념판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이 순종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5월 29일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박두종 외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시대일보』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독립만세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이에 군중들도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1927년 10여 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아 10명은 결국 수감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는데,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 등지 뿐만 아니라 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까지 파급되어갔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온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결집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운동이었다. 그래서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다. 2020년 12월 8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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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탑(이령분교)
본 3.1독립운동기념탑은 1919년 3월 9일 연개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국 독립을 외친 애국지사들의 공적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본 탑이 세워진 곳은 이령분교로, 이곳은 칠북 3.9연개장터 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이다. 탑의 뒤쪽으로 만세운동에 관한 설명이 적힌 병풍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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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현판
1890년대 후반 처음 등장한 야학은 을사늑약을 전후로 국권회복과 민족계몽을 위한 야학운동이 거대한 바람으로 전개됐다. 야학에 대한 참여는 전국에 설립된 장소가 1,000 곳을 넘어설만큼 매우 컸다. 울산은 1910년 동구 남목 개운학교에서 설립한 대창야학교가 첫 야학이다. 1917년 9월에는 중남면 신화리에서 3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친 노동야학이 문을 열었다. 울산에서 야학 바람이 휘몰아친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다. 당시 울산 곳곳 35개 지역에 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청년조직과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돼 100여 곳에 이르는 야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야학은 홀로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연계하는 노동야학연합회로 진전됐다. 하지만 일제 경찰은 야학연합의 창립과 활동을 막아섰다. 울산군노동야학연합회 창립대회를 금지시키고 결성을 원천봉쇄하는 데 혈안이 됐다. 이는 민족교육, 민중교육을 목표로 하는 야학이 눈에 가시가 됐고 야학연합이 울산 내의 항일운동과 연계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29년 울산 동구 사립 보성학교 폐쇄명령을 내렸고 이어서 8월에는 병영노동야학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10년 넘게 병영청년회가 이끌어 온 노동야학을 무력화 시키면서 내놓은 명분은 불온한 강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31년 언양농민야학을 폐쇄한 것도 같은 명분이었다. 모두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선 청년들이 교육을 통해 민족과 민중을 일깨우는 것을 두려워해 직접 탄압한 것이다. 결국 1929년 100여개에 달했던 야학은 1937년에 이르면 20여개소 1,000여 명의 학생으로 줄어든다. 일제강점기 울산야학은 무산아동과 여성을 포함해 민족혼과 의식을 일깨우는 참교육기관이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이 가난했던 조선 아이들 한 명이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썼던 민중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지역유지와 농민단체, 소년단체, 종교단체들을 규합해 적극적으로 민족계몽에 나섰기에 항일운동 속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여자야학과 부인야학 등 여성야학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한다. 민족독립에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으며, 배움에 있어 가난은 장애가 되서는 안된다는 민중교육. 100년 전 깨어있는 교육의 징표 중 하나가 울산 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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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 동상
이병호(이명 이병찬, 1886~1955)는 전남 보성 사람이다. 1915년 7월 15일 경북 대구 소재 달성공에서 광복단을 조직하고 일제고관 및 친일배의 주살(誅殺)과 일제기관을 파괴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도모할 때 전라도 지부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16년 전남 보성군 겸백면장(兼白面長)으로 재직하고 있는 박문용(朴文鎔)이 겸백면내에서 거둔 세금 8천원을 받아서 독립운동자금으로 전달하며 활동하다 1918년 4월경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공갈·총포류단속취체령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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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섭 공적비
조병섭(1908~1950)은 7월 여수읍(麗水邑) 덕충리(德忠里) 장도(獐島)에서 문석·하순철·이창희(李昌熙) 등과 함께 ‘여수적색노동조합 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직접 공장이나 직장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산업별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준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병섭은 항만노동부를 맡아 활동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8월 하순경에는 조직의 부서를 개편하여, 조병섭이 조면공장노동부를 맡았다. 조병섭은 12월 여수읍 동정에 있는 정호영(鄭鎬榮)의 집에서 정충조·김석훈(金石訓) 등과 회합하여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을 위한 준비로서 먼저 공장과 직장에서 독서회를 결성하여 노동자들을 교양하기로 하였다. 이에 정충조로부터 받은 「잉여가치란 무엇인가」 등을 교재로 혼다정미소(本田精米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7월 10일경, ‘조선공산당재건 전남동맹’의 기관지 『적기(赤旗)』를 각지에 배포할 당시, 조병섭은 경상남도 부산(釜山)에 체재하면서 이 지역의 배포를 담당하였다. 8월경 일본 경찰이 위 조직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착수하여 전국에서 8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이때 조병섭은 체포를 면하고 이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에서 신문배달부로 일하면서 과거 노동구제회 오사카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홍기환(洪基奐) 등과 함께 그 조직의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던 중 9월 일본공산주의자단에 대한 일제당국의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면서, 같은 달 13일 동지 홍기환·정암우(丁岩又)·송정효(宋正孝)·김영동(金榮東) 등 9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2월 19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찰로 송치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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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익표 공적비
지익표(비공개~생존)는 1942년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1월 기소유예 되었다. 당시 여수수산학교의 일본인 교사들은 한국 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아 한국 학생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942년 11월 그는 선배 학생들과 함께 교사들을 상대로 “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하고 모국어를 쓸 수 있게 할 것”, “민족차별적 발언을 일삼는 일본인 교사를 추방할 것” 등을 요구했다. 학교측에서 이를 거부하면 징병거부 투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하였다. 지익표는 학교측의 기만책으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른바 ‘치안유지법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1942년 12월 21일 광주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43년 1월 13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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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곤 공적비
김재곤(1914~1961)은 1930년 3월 여수공립수산학교 졸업생인 윤경현(尹炅鉉)과 조병호(趙炳浩) 등 재학생 9명은 공산주의 연구와 항일투쟁를 위해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했다. 3월 하순 이들은 여수 읍내 종고산 정상에서 윤경현을 회장으로 추대했다. 4월 중순 김재곤은 박창래(朴昌來) 등과 조병호의 권유를 받아 종고산 정상에서 연 독서회 총회에 참석하고 독서회에 가입했다. 7월 19일 오후 10시경 여수만 앞바다의 장군도 연안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이 총회에서 같은 학교 학생 10여 명을 가입시키고 반 조직을 재편성했다. 각 반은 매주 1회 모여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각 반의 대표자회를 매주 1회씩 열고 연락을 취하기로 협의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비밀리에 조직돼 활동하던 독서회가 발각돼 체포됐다. 김재곤은 1930년 12월 24일 중도 퇴학했다. 또한 1931년 9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인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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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운 공적비
박노운(1922~1950)은 1942년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졸업생으로 조선인 학생을 차별하는 일본인 교사를 추방하기 위해 집회를 계획하고 수업 거부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기소유예 되었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박용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한국어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박노운은 1941년 3월 5일 학교를 졸업했으나 이 시위로 인해 검거됐다. 이후 1943년 1월 13일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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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수 공적비
박용수(1922~1994)는 1942년 12월 전남 여수공립수산학교 재학 중 폭력행위 등 처벌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이듬 해 1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42년 여수수산공립학교의 한 일본인 교사가 전체 학생 앞에서 한민족을 모욕하는 발언을 해서 학생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같은 해 11월 박용수는 일본인 교사들에게 “민족차별적 언행을 시정해 줄 것과 한국어를 쓸 수 있도록 할 것, 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인 선생 한 사람을 내보낼 것” 등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 투쟁을 일으켰다. 박용수는 5학년 재학 중 일으킨 시위로 인해 검거돼 1943년 1월 13일 ‘폭력행위 등 처벌법 위반’으로 기소유예를 선고받았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