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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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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 광명지역 발상지 기념비
1919년 독립만세운동이 거국적으로 확산되어 가던 3월 27일 당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이정석(李貞石)이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일본 경찰에 강제 연행되어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지역주민 200여 명이 모여 주재소를 중심으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이정석의 구출을 꾀했으나, 모두 체포되어 주동자들은 최고 4년에서 1년 6개월의 징역형과 함께 벌금형을 언도받았다. 광복 후 정부에서는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및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광명시에서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애국심을 기리고자 1995년에 3.1독립만세운동 광명 지역 발상지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2002년 11월 30일에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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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온사리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시흥군 서면 주민 200여 명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7일 밤에 시흥군 서면 소하리에 살던 이정석이 노온사리 경찰주재소 부근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다음 날 강제 연행되었다. 당시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호천과 윤의병은 이종원, 최정성, 유지호, 김인한, 최주환 등과 함께 이정석을 구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3월 28일 오후 11시 무렵에 서면 주민 200여 명과 함께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를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 일본 경찰이 파견되어 최호천 등을 체포하였고 시위대도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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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찬영 구 묘
황찬영(1892 - 1972)은 평남 대동(大同) 출신으로, 평양숭덕학교(平壤崇德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1919년 3·1독립운동 시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광무황제(고종)동도식(光武皇帝奉悼式) 명목으로 예배당에 군중을 모이게 하여 찬송과 기도를 드린 후 미리 준비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시내 각 처에 배포하면서 이날 모인 기독교인·학생·주민 등의 선봉 대열에서 활약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해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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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3.1독립 운동 기념탑
본 기념탑은 경기도 광주에서 전개된 3.1운동 정신을 기리고, 의병들의 치열했던 항쟁사 속에 구국정신과 그분들의 혼을 새기고 후세에 선열들의 얼을 계승하고자 2012년 3월에 건립되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광주시 3.1독립 운동 기념탑은 경안근린공원 내에 위치한 횃불 모양의 기념탑으로, 작품 공모를 통해 선정된 디자인으로서 2012년 3월에 준공되었다. 기념탑의 높이는 11m이고, 탑신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얼굴과 3.1운동의 역사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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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 운동지
광주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 운동지는 학교 당국의 민족 차별에 맞서 광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일으킨 곳이다. 1921년 8월 4일에 일본인 목수가 한국인 학생인 황추호를 구타하여 실신시켰으나 경찰에서 훈방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이에 반발하여 8월 29일에 무더기로 휴학원을 제출하며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이에 8월 30일과 31일에 학부모들이 회의하여 일본인 목수를 고소하였고 결국 목수는 재수감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 교육 당국의 민족 편견과 차별에 맞서 항일 민족정신을 표출한 사례로써 역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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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군청 3.1운동 만세 시위지
광주군청 3.1운동 만세시위지는 3.1운동 당시 대규모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1919년 3월 28일 오후 1시 30분경, 오포면의 고산리(高山里)와 문형리(文衡里)로부터 시작된 1,500여 명의 오포면 시위 군중은 행진을 시작했고 경안면 주막리 군청 앞에 도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오포면의 시위군중이 행진해 오는 동안 경안면 주변 지역의 주민 다수가 시위대열에 차츰 가담하였다. 거기에 주막리의 주민까지 합세하니 시위 군중은 2,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무렵에 2,000여 명의 시위대가 군청 건물 앞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군청사와 광주우편소 건물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렸다. 시위대가 총기 탈취를 시도하자 헌병들이 이들을 향해 발포하였고, 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부상 당하였다. 다음 날인 29일에도 경안리 부근에서 200~300여 명의 주민들이 모여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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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승 독립기념비
이병승 선생은 광주군 실촌면에서 태어나 애국자로서 일본 압정에서 대한독립을 외치신 선구자로, 고종 승하 소식에 상경하여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받아 귀향한 후 의거하였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선두에서 행진하였다. 왜병의 총격에 강원도를 거쳐 만주로 피신하셨다가 고국에 돌아와 해방 이후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시고 애국정신과 구국정신을 널리 후손에게 알리셨으며, 83세까지 만선리에서 사시다가 1973년 1월 21일 돌아가셨다. 3.1운동 이병승 독립기념비는 만선리 노인회에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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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촌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실촌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실촌면 이선리의 구장이었던 오수식이 주도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4월 6일 오전 7시 무렵에 오수식은 오흥운, 오세인 등 이선리 주민 5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선리로 행진하였다. 이후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합세하면서 시위대는 오후 2시 무렵 200여 명, 4시 무렵 400여 명으로 그 수가 늘어났다. 시위대는 독립 만세를 외치며 오향리에 있는 면사무소를 거쳐 곤지암으로 행진하였다. 그러나 오수식, 오흥운 등 7명이 곤지암리 헌병주재소의 진압 병력에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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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식 묘
오수식(1858 - 1938)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년 4월 6일 실촌면 이선리(實村面 二仙里) 구장(區長)으로서 이선리 주민 50명과 만선리 주민 200명을 규합하여 곤지암까지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주동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치안을 방해한 죄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주모자로 곤지암 헌병주재소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1920년 퇴소 후 만주에서 4년여 간의 망명 생활 후 귀향, 1938년 별세하였다.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은 오수식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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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추모비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추모비는 해공 신익희 선생 추모비 건립위원회에서 1985년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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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은 남한산성을 기점으로 진행되었던 광주지역 항일운동의 특성을 반영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일제에 저항하던 의지를 묘사하였으며 광주, 이천, 양근 등 세 진영이 주축으로 연합하여 남한산성 성벽을 넘어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모습 자체를 상징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을 의미하는 부조벽 좌측에는 3.1운동 모습을 연출하고, 우측에는 남한산성에서의 의병항쟁 장면을 연출하였다.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광주 출신으로 구한말 의병 춘경 구연영 의병장,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정암 이종훈 선생, 임시정부를 대표한 해공 신익희 선생 3인을 재조명하며, 항일운동사에 중요한 격전지이자 역사적인 장소인 남한산성에 항일운동을 재조명하는 뜻을 담아 2020년에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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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중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광주군 중부면 주민 200여 명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서의 시위는 1919년 3월 27일 새벽 남한산에 횃불이 오르는 것을 신호로 시작되었다. 이날 오전에 중부면 단대리, 탄리, 수진리 주민 300여 명이 남한산성 남문 아래에 있는 계곡에 모였다. 이 시위대는 만세를 부르며 산성 안에 있는 옛 중부면사무소(현재 남한산성 행궁) 앞까지 들어갔다. 시위대 중 일부는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해 온 중부면장을 사무소에서 끌어내어 면장의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쳐 실신시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