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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가족묘소
이광(1879 - 1966)은 충북 청주 사람으로 1970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만주 지방에 민주 정부와 군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만주로 가서 독립기지 설치 및 군관 양성의 사업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12년에는 북경에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19년 2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 대표 39명 중 1인으로 참가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상해 임시정부 설립에 공헌하였다. 북경과 남경에서 대한독립당주비회(大韓獨立黨籌備會)와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성암 이광의 묘는 전주이씨 가족묘지 내에 안장되어 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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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순 기념비
양곡 이가순(1867 - 1943)선생은 본래 황해도 출신으로 1867년 11월 출생했다. 이가순 선생은 본관이 완산인데 당시 고양군 지도면 토당리 삼성당 마을에 정착하여 현 농어촌기반공사 설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 등을 오고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원산 감리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원산지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옥고를 치른 후 고양군으로 이주하였다. 고양군으로 이주한 뒤 고양군 지도면 등의 토지가 한강에 제방이 없고 갈대밭과 갯벌, 가뭄에 취약하여 마치 황무지와 같았다. 이에 이가순 선생은 자신의 사재로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고 수리시설과 관개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리사업을 주관 하던 중 1943년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이원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양군수리조합을 건립하였다. 1919년 3·1 만세운동과 1922년 제2의 3·1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서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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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독립운동기념탑
고양독립운동기념탑은 고양시 일산문화광장에 있으며, ‘대한독립, 그날의 함성, 현재·미래의 평화 번영’을 부제를 지닌 높이 31m, 길이 8m×8m의 규모이다. 주탑의 형상은 고양의 5천 년 역사 가와지볍씨와 꽃봉오리, 비상하는 날개, 기도하는 손의 형상이 좌우 대칭 모양으로 표현돼 있다. 기념탑의 좌측 은색 파동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고양의 현재와 미래의 찬란한 모습을, 우측의 금색 파동은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고귀하고 뜨거운 애국심을 표현했다. 기념탑 하부에는 고양 출신 독립운동가 74인의 공적과 공훈을 표기한 ‘공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고양시, 광복회 고양시지회에서 2018년 8월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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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 공적비
김찬(1884 - 미상)의 이명은 김용흘(金庸屹)·김남(金男)이 있다. 도만(渡滿) 경위는 자료의 한계 상 알기 어려우나 1919년 중반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 17도구(道溝)에서 윤덕보(尹德甫)·이희삼(李熙三) 등과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설립하였다. 창바이현은 함경도와 마주한 국경 지방이다.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많은 함경도지역 민족운동가들이 이곳으로 건너갔다. 나아가 1919년 만세운동을 거치면서 민족 의식이 고조되자 이들이 중심이 되어 군비단을 설립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참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11월 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해 조직이 재정비되자 총무장이 되었다. 단장은 이한평(李漢平)이었고, 그 아래 재무·경무·외교 등의 부서가 편제되었다. 이때 창바이현 8·13·15·18도구 등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배치하고 16도구 신창동(新昌洞)에는 통신사무국을 설치했다. 이 같이 짜임새 있는 조직을 갖춘 군비단은 험난한 창바이현의 지리를 십분 이용해 활발한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4월 경에는 경호대장이 되어 본부가 있는 창바이현 17도구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부터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경신참변이 1921년 4월까지 이어졌다. 이들 일본군의 공격을 경계하기 위해 본부 경호 임무의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경신참변 이후 군비단은 일부 병력을 연해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 병력의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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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조, 최선화 묘
양우조(1897 - 1964)는 평안남도 강서 사람으로 평양에서 성장하였으며 미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상해의 흥사단(興士團)에서 활약 및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창립,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 소속되어 활약하였고 임시정부에서 재무부 부원으로서 선전위원 겸임 및 예산결산위원장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한국광복군 정령(正領)으로 정훈처 훈련과장의 직을 수행하다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최선화(1911 - 2003)는 인천 출신으로 애국지사 양우조의 부인이며, 1931년 이화여전(梨花女專)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6년 상해(上海)로 건너가 간호대학을 다니다 퇴학 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임시정부 재무 차장이던 애국지사 양우조(楊宇朝)를 만나 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것이 후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가입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뒷바라지하였으며,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등에 참여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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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탑(고양시현충공원)
고양시 현충공원 현충탑은 6·25전쟁 당시 고양시 출신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1년 고양시청이 건립하였다. 2010년 12월에 고양시는 현충탑 인근의 공원화 사업(고양현충공원)을 완료하고 기존의 현충탑을 헐고 재건립하였으며 위패실 설치와 태극단 묘역 정비도 마쳤다. 현충탑 재건립을 통해 현충시설로서의 목적뿐 아니라 고양시 출신으로 순국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패실을 새로 설치, 400여 위를 안치하여 애향심 고취와 애국 애족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충공원의 위패실은 2010년 12월 준공하여 417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위패실 앞, 즉 현충탑의 뒷면에 ‘고양을 빛낸 독립운동가’ 74인의 명단이 명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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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중면사무소 3·1운동만세시위지는 당시 고양군 중면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에 고양 각지에서 만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자, 중면 면장은 주민들에게 시위에 나서지 말 것을 종용하는 한편 일산리 헌병주재소에 주민들의 동향을 보고하였다. 이에 주민들 사이에서 면장과 면서기를 응징하자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고, 3월 25일 밤 주민 50여 명이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일산 장날인 26일에는 500여 명이 밤에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한편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28일에도 150여 명의 주민이 횃불을 밝히고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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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독립운동 유적지(일산역)
고양 독립운동유적지 일산역(一山驛)은 경의선의 중심역으로 고양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활동 지역으로서 일본 헌병이 검문검색을 강화하는 수색역 이전에 있어 국내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일산역 부근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3월 25일 고양군 중면 일산리에서 16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해산하였다. 이튿날 3월 26일 일산리 일산 장날을 맞아 500여 명이 인근의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부 주민들은 일본 경찰의 과잉 진압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고 근처의 일본 가옥에 돌을 던지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날 일본 헌병은 만세운동 지도자 15명을 체포했다. 이외에도 3월 27일 당시 일산 지역 주민 150명 정도가 늦은 시각까지 횃불을 들고 만세운동을 실행했는데 시위 주도자 19명 가운데 면서기도 1명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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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리 헌병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일산리 헌병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고양군 중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에 당시 고양군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확산되자, 중면 면장은 주민들을 상대로 시위에 참여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동시에 헌병대에게 주민들의 동향을 전달하였다. 이를 알게 된 주민들이 면장을 응징하고자 주장하는 등 항일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3월 25일에 50여 명의 주민들이 일산리 헌병 주재소에서 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인 26일에는 500여 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모여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28일 밤에는 150여 명의 주민들이 횃불을 밝히고 시위를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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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령 3.1운동 만세 시위지
남태령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과천면 주민이었던 이복래 등이 주도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이복래는 본래 시흥 출신으로 시위 당시에는 과천면 하리에 살았다. 그는 서울에서 3.1운동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고, 인근 주민들에게 3월 30일 오후 8시까지 남태령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주민들이 모이자 그들에게 손수 제작한 태극기 15개를 나누어 주었다. 이복래와 주민들은 태극기를 들고 함께 과천 읍내로 행진하여 경찰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공립보통학교 앞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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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석 묘
성기석(1920 - 1990)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조선방송국(朝鮮放送局)과 개성방송소(開城放送所)에서 근무하면서 단파수신기(短波受信機)를 제작하여 해외방송을 청취하면서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연합군(聯合軍)의 승전과 광복군(光復軍)의 활동 등 국제정세를 수시로 청취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였다. 1942년 12월 27일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으며 194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무신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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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석 공적비
성기석(1920 - 1990)은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1940년 조선방송국(朝鮮放送局)에 기술직으로 근무할 때 단파수신기(短波受信機)를 제작하여 해외방송을 청취하면서 임시정부(臨時政府) 소식과 구미외교부(歐美外交部) 활동을 알게되어 독립운동 상황을 가친(家親)을 통하여 이인(李仁)·조병옥(趙炳玉) 등에게 전달하였다. 1942년 8월 개성방송소(開城放送所)로 전근되어 소장인 이인덕(李仁德)과 단파수신기를 제작하여 미국과 임시정부의 한국어 방송을 통하여 연합군(聯合軍)의 승전과 광복군(光復軍)의 활동 등 국제정세를 수시로 청취하여 민족지도자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1942년 12월 27일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194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무신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