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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추모비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에 있는 현등사 삼충단에 설치된 비석으로, 1986년 6월 19일 가평군의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가평 삼충단은 1910년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세 분 충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제단이다. 민영환(1861 - 1905)은 대한제국기 내부대신, 군법교정총재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성균관 대사성 재직 시 임오군란으로 부친 민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했다가 복직했다. 러시아 황제 대관식 특명 전권공사, 유럽 6개국 특명 전권공사를 지내며 서양의 문물과 근대화된 모습을 직접 체험했다. 독립협회를 적극 지지했고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거하면서 한직을 전전했다.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파기를 요구하며 항의했다. 이어 죽음으로 항거하여 국민을 각성시킬 것을 결심하고 본가에서 자결했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원임대신 조병세를 비롯한 전참판 홍만식(洪萬植),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 많은 인사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민영환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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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추모비
조병세는 본관 양주(楊州). 자 치현(穉顯). 호 산재(山齋). 시호 충정(忠正). 노론파의 명문에서 태어나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이 되고, 185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1864년 실록청도청낭청(實錄廳都廳郞廳)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거쳐 1887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고, 1889년 한성부판윤·우의정을 거쳐 1893년 좌의정이 되었다. 1894년 중추원 좌의장(中樞院左議長)이 되었다가 사직하고 은거하였다. 1896년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재상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과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청하기 위하여 고종을 만나려 하였으나 일본군의 방해로 거절당하였다. 이어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백관을 인솔하고 입궐하여 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형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하여 강제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院)에 연금되었다. 곧 풀려났으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가 또다시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그 후 가평 향제로 추방되었으나 다시 상경하여 표훈원에서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와 동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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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추모비
추모비는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에 있는 가평 삼충단에 설치된 비석으로, 1986년 6월 19일 가평군의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된 가평 삼충단은 1910년 일제의 무단 침략에 항거하다 자결한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세 분 충신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성되었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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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곡산 3.1운동 만세 시위지
가장곡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고양군 벽제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1919년 3월 27일 밤 9시 무렵 벽제면 관산리 주민인 김자근봉, 정재점, 정의양, 정태용, 최숙석 등은 주민 30여 명과 함께 가장골 마을 뒷산 정상에서 횃불을 올리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김종환, 한기원 등도 산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횃불이 오르자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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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철 묘
이해철(1878 - 1956)은 경기도 고양(高陽) 출신으로, 1919년 3월 26∼27일 고양군 벽제면(碧蹄面) 대자리(大慈里) 응봉산(鷹峰山)에 올라가서 같은 마을에 사는 권선용(權先用)·이상돌(李上乭) 등의 주도로 30여 명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어 독립을 요구하는 함성이 인근 마을까지 파급하게 되자 일경에 의해 시위는 해산되고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해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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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 3.1운동 암각문
이 암각문은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새긴 기록문이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네 글자와 함께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은 기미년(己未年) 2월 10일 최남선(崔南善, 1890 - 1957)이 작성하였으며 3월 1일 탑동공원(塔洞公園)에서 자신이 독립선언(獨立宣言) 만세를 도창(導唱) 했다.'라는 내용을 새겼다. 이 글을 새긴 시기는 3·1운동 이후로 추정되며, 그 목적은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암각문을 새긴 정재용(1886 - 1976)은 1886년 해주(海州)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로, 1919년 2월 19일 해주에서 상경해 3·1운동의 불을 당겼던 장본인이다. 3.1운동 암각문은 고양시 향토유적 제 3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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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현 묘
송용현(1894 - 1967)은 경기도 개성(開城) 사람이다. 1919년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中西面 鵠嶺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같은 동리에 사는 허내삼의 주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 4월 1일 허내삼은 자기 동리 주민을 모아 놓고 몽둥이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처음부터 경찰과의 충돌을 각오한 준비였고 몽둥이를 손에 든 수십 명의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개성 시내로 행진하였다. 이때 그는 몽둥이로 무장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경을 구타하는 등 시위대열을 막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개성경찰서 경찰들과 맞섰다. 이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한 청년행동대로 일경도 망설였으나 끝내 정면 대결로 충돌하여 주동자들이 붙잡히는 바람에 결국 해산되었다. 그 후 그는 이날의 만세시위 주동혐의로 일경에 붙잡혀 이해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죄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했으나 10월 4일 경성복심법원과 11월 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됨으로써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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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근거지 흥국사, 만일회비기 비석
흥국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661년에 창건한 사찰로 천년이 넘는 사적으로서 의병장 연기우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다. 의병장 연기우(1865 - 1910)는 경기도 삭령(朔寧) 출신으로 본래 강화 진위대에서 복무하던 군인이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군이 강제 해산되면서 거의를 결심하고, 고양 지역에서 의병 조직을 체계화하여 경기도와 황해도 방면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그의 순국에 대하여는 두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는 1910년에 체포 피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에는 매일신보 기사를 인용하면서 그의 부친 연성한(延成漢)과 함께 인제 일본헌병분대에 의하여 체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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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효근 집
장효근(1867 - 1946)은 서울 출신으로 이종일(李鍾一)·오세창(吳世昌) 등과 같이 「제국신문(帝國新聞)」·「대한민보(大韓民報)」를 창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만세보(萬歲報)」를 발간하여 배일사상의 고취와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비판하였다. 그는 1898년(광무 2)에 이종일·심상익(沈相翊)·염중모(廉仲模) 등과 함께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중류이하의 민중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간될 때까지 언론계에서 활약하였다. 1906년(광무 10)부터 1907년(융희 1)까지는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제창으로 만세보를 창간하고, 당시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맹렬히 비판하는 등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19년 2월 27일에는 천도교 산하 보성사(普成社) 총무로 있으면서, 3·1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하여 배포한 혐의로 3월 1일 체포되어,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2년 2월 6일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여 주도하였으나, 일본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5년 이후 경기도 고양(高陽)으로 내려와 독립의 일념으로 일기와 시로 마음을 달래면서 여생을 보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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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순 송덕비
양곡 이가순(1867 - 1943)선생은 본래 황해도 출신으로 1867년 11월 출생했다. 이가순 선생은 본관이 완산인데 당시 고양군 지도면 토당리 삼성당 마을에 정착하여 현 농어촌기반공사 설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만주와 연해주 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9년 원산 감리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원산에 대성학교와 신간회 원산지회를 세우기도 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의 주도자가 되어 옥고를 치른 후 고양군으로 이주하였다. 고양군으로 이주한 뒤 고양군 지도면 등의 토지가 한강에 제방이 없고 갈대밭과 갯벌, 가뭄에 취약하여 마치 황무지와 같았다. 이에 이가순 선생은 자신의 사재로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고 수리시설과 관개사업을 펼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리사업을 주관하던 중 1943년에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이원재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양군수리조합을 건립하였다.1919년 3·1 만세운동과 1922년 제2의 3·1운동에도 참여하였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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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행주리 3.1운동만세시위지는 지도면 행주외리와 행주내리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1일 고양군 신도면, 벽제면, 지도면 일대에서 수백 명의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지도면 행주내리, 행주외리 시위대는 등불을 신호로 야간 시위를 벌였는데 일본 경찰이 출동하자 한강으로 배를 띄우고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독립만세 시위는 계속 전개되어 3월 24일에는 800여 명, 28일에는 500여 명의 주민들이 참여하였다. 28일의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일본 헌병들에게 주도자 38명이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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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묘
이희승(1897 - 1989)는 경기도 개풍(開豊) 사람이다. 서기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1913년까지 주시경(周時經)의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에서 한글과 국문법을 학습하고 독립사상을 섭취하였다. 1929년에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중심이 된 조선어사전편찬회(朝鮮語辭典編纂會)의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1935년의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朝鮮語標準語査定委員會)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1월부터 1940년 6월까지 조선어학회(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에 확대 개편)의 〈외래어 표기 및 보수문제 협의회〉의 책임위원으로 이극노(李克魯)·정인섭(鄭寅燮)과 함께 선임되어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하였다. 1934년 5월 국사와 국어국문을 중심으로 한국학연구단체 진단학회(震檀學會)창립의 발기인이 되어 국학운동에 진력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와 한글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의 선고를 받고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와 한글학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국어국문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