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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토동과 항일운동 안내판
남상목(1876~1908)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1907년 7월에 경기도 용인군 용천곡을 중심으로 의병 50여 명을 그 휘하에 두고 구식총 40여 자루와 서양총 10여 자루를 무기로 하여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 후 새로이 의병진에 참여한 송주상(宋柱祥)·김태동(金泰東) 등으로 하여금 의진에 종사시키고 강춘선(姜春善)은 후군장, 김경화(金景化), 이시영(李時永)은 포군으로 진용을 재정비하고난 뒤 음성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불행히도 분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패전군 30여 명을 이끌고 죽산의 칠정사에 도달한 뒤 전봉규(全奉奎) 휘하에 있는 100여 명의 의진과 진을 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나서 안성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과 다시 접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니 항일투쟁에 있어서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년 11월 판교에서 살고 있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일제 앞잡이의 밀고로 인하여 "느릿골"이란 지역에 잠복해 있던 일본헌병에게 체포당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나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腸破裂)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치장(1876~1972)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정미 군대해산을 당하여 통분함을 금치 못하여 국권을 바로 잡고자 1907년 음력 10월경 동지 70여 명을 규합하여 거병하였으며, 대체로 광주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음력 12월경 광주군 묵동에서 일본 기병대와 전투하여 그의 부하 8명이 전사하였다. 1908년 음력 2월 중군장 오사과(吳司果) 외 2명으로 하여금 광주군 언주면에 사는 박승호(朴勝浩)에게서 군자금 1백원을 거두고 그를 의병에 입대케 하였다. 또한 박승홍에게 돈 40원을 주어 경성에 가서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명하였는데 1908년 10월 11일 양주에서 적에게 체포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일경에 노출되어 1909년 3월 23일 경성 공소원으로부터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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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루리 출신 독립운동가 안내판
박선태(1901~1938)는 경기 수원 사람이다. 그는 휘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9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가려다가 삼일학교 교사 이종상(李鍾祥)을 만나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펴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920년 7월까지 수원 일대에서 ≪애국창가집≫과 〈대한민보〉 수십매를 배포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들은 이후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펴기 위해 1920년 6월 20일 임순남(林順男)·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의 여학생을 규합하여 비밀결사 구국민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단장에 선임되어 동단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동단은 독립국가를 실현할 것과 독립지사들의 가족을 후원할 것을 활동목표로 삼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문서를 국내에 배포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활동도 폈다. 특히 동단의 여학생들은 임시정부 적십자회에 참가하여 미·일전쟁이 일어나면 간호부로서 참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단은 이후 혈복으로 명칭을 바꾸고 매주 금요일 삼일학교에서 회합하여 독립운동 방침을 협의하였으며 김석호(金錫浩)·김노적(金露積)·김귀섭(金龜燮)·김병갑(金秉甲)·이희경(李熙景)·신용준(愼用俊) 등을 동지로 포섭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선경(1902~1921)은 1920년 6월 경기도 수원군에서 구국민단을 결성하여 구제 부장에 선임되어 회원을 모집하였고, 대한민보 등의 배포에 관해 수차례 협의하였으며, 동년 8월 상해로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순국하 였다. 1919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15일간 구류를 당하였다. 1920년 6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경기도 수원 서호 부근에서, 수원 삼일여학교 교사 차인재의 소 개로 임순남(林順男,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생)·최문순(崔文順, 이화여자고등 보통학교 2년생) 등과 함께, "제1. 일한합병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제국 통치 하에 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 제2. 독립운동을 하다가 입감되어 있는 사람 의 유족을 구조할 것"의 2대 목표를 표방하는 비밀결사 구국민단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년 7월경까지 수원 읍내 삼일학교에서 구국민단 부단장 이득수(李得壽) 등과 수차례 회합하여 <대한민보>·<독립신문> 등의 반포를 담당하기로 서약하고, 또 기회를 보아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간 호부가 됨으로써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맹서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동년 8월 9일 수원을 출발하여 상해로 향하다가 경성에서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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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헌 묘
홍종헌(1867~1919)은 천도교인으로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5년 이후 동학에 들어가 양주 접주로 활동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의병이 되어 항일 의병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낙향한 후에는 의병 지원 사업을 전개하여 화승총과 화약을 포함하여 각종 군수 물자를 의병에게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20일 동두천장에서 홍병준(洪秉俊)·윤진현(尹眞鉉)·홍종각(洪鍾珏) 등과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때 출동한 일본 헌병 사토[佐藤] 기마대장을 타살하였다. 홍종헌에 대해서는 시위 중에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는 설과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순국하였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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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삼 활동지(김량장터)
김량장터 이익삼 의병 활동지는 1908년 전후 이익삼의병을 비롯한 용인지역 의병이 주로 활동했던 곳이자, 1919년 3월 24일 김량장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이익삼(李益三)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출신의 의병장이다. 그는 1907년 8월부터 1909년 6월 8일 체포될 때까지 용인과 광주, 죽산, 양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익삼은 같은 모현면 출신 정기인(鄭基仁) 등과 인근 지역 출신 인물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을 벌였다. 이익삼 의병의 주요 활동지는 김량장이었다. 1908년 4월 10일 이익삼의병은 김량장에서 동장 정한기(鄭漢基)를 위협하며, 광목 4필과 짚신 20족을 빼앗아 갔다. 이것은 친일세력 처단과 군자금 모집의 일환으로 펼친 활동이었다. 김량장에서는 이익삼 의병 외에도 여러 의병이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9월 2일 오후 8시경 의병 30여 명이 김량장에 있던 한 학교에 나타나 의병 활동에 필요한 기물과 금품을 요구하였다. 또 같은 해 9월 21일에는 의병들이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 헌병과 한인 보조원을 응징하였다. 한편, 1919년 3월 24일 김량장에서 김량장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기도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면서 8월에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주로 유격전으로 일제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 밖에 일진회 등 친일파를 처단하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제도 두려워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그러던 1909년 6월 2일 밤 10시경 일제의 수원수비대 제3중대 여섯 명의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이익삼 의병부대는 분투하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이 강하여 그들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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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평의병 3.1항일운동기념비
가평의병 3.1항일운동기념비는 1895년 을미의병 운동과 3·1운동에 참여한 가평지역의 선현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비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단발령이 내려지며 전국에서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가평지역에서도 380여 명의 의병이 봉기하였다. 또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할 때도 가평지역에서도 3,200여 명의 군민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1991년 가평군에서 설립한 이 기념비는 왼쪽 면에는 의병운동에 참여한 선현들의 성함이, 오른쪽 면에는 3·1운동에 참여한 선현들의 성함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역사는 증언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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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납산 의병 전투지
보납산 의병 전투는 전국 곳곳에서 봉기한 정미의병을 조정이 진압하면서 벌어졌던 전투 중 하나이다. 정미의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및 단발령에 반발한 세력들로 조정에서는 토벌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춘천에서 봉기한 이소응 등의 의병 세력은 가평 출신의 신재가(신재희), 신재욱, 이충응 등 의병과 합류한다. 의병의 동향을 파악하고자 조정으로부터 파견된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 조인승은 춘천으로 향하는 도중 의병들에게 잡혀 청사 앞 처형장 ‘개못개’에서 총살되었다. 이에 1월 31일 조정이 1개 중대를 급파하고, 뒤이어 2개 중대의 지원군까지 증파하였다. 2월 1일 의병 선봉대는 경춘가도의 안보역에 도착하여 관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고 가평 의병도 보납산(寶納山)에 진을 쳤다. 이충응이 이끄는 가평 의병과 이소응이 주도하는 춘천 의병은 연합하여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무기 부족과 훈련 부족 등으로 패하고 말았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가평 의병은 북면 화악리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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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충절의 터(가평북중학교)
가평 북면에서 주도한 3.1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한 조형물이다. 이 고장 출신의 애국지사 이규봉, 최종화, 이윤석 등의 성함을 새겨 넣었고 학교 후배들이 이를 이어받기를 기원한다고 쓰여있으며 2004년 2월 12일 목동초등학교와 가평북중학교 각 동문회가 설립하였다고 되어있다. 목동초등학교와 가평북중학교는 통합하여 운영하고 있는 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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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화 묘
경기도 가평(加平) 사람으로 1919년 3월 15일 이윤석(李胤錫)·정흥교(鄭興敎)·장기영(張基榮)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가평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이곳 독립만세 시위지는 3월 14일 서울로부터 우송으로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은 정흥교가 이윤석 등과 만나 만세시위 계획을 상의하면 시작되었으며, 3월 15일 오전 9시 북면(北面) 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5일 그는 이장인 홍세구(洪世拘)의 집에서 동리사람들과 일차 모임을 한 후, 이들을 인솔하고 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10여 개의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청으로 행진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학교·면사무소 등지로 시위 행진하였다. 이 때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이 주동자 이윤석과 정흥교 등 10여 명을 헌병대 분견소로 강제 연행하였다. 이튿날, 체포된 동지들을 석방하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2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다시 서낭당 고개에 모였다.이날 그도 다시 참여하여, 선두에 서서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분견소로 행진하던 중, 긴급 출동한 헌병 2명과 보조원 4명의 제지를 받았다. 이때 선두에 서서 지휘하던 장기영이 헌병과 승강이를 벌였는데, 헌병은 공포를 쏘아대며 응원병을 요청하여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벌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이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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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화 묘
경기도 가평(加平) 사람으로, 1919년 3월 15일 정흥교(鄭興敎)·이윤석(李胤錫)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가평군 북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가평읍내까지 행진시위를 하던 중 정흥교·이윤석이 일군헌병대에 끌려가자,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혔다.같은 해 4월 26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로 감형되자 다시 상고하였으나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6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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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근 사적비
1919년 3·1운동 때 덕천(德川) 서문시장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1924년 경기도 가평(加平)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1934년 11월 12일 임일봉(林一奉)과 오일보(吳一寶)의 권유로 태극교(太極敎)에 입교했다. 태극교는 겉으로 종교를 표방했으나, 명칭에서 보듯이 민족적 성격이 짙은 단체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태극교에 입교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는 한편 조선 독립을 이루기 위해 동지 규합을 위한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34년 11월 15일, 그는 정태용(鄭泰鏞)에게 “조선은 언제까지나 일본에 예속하는 것이 아니라, 4·5년 후에는 악질이 유행하고 병란·재앙이 일어나 현재 인민의 대부분은 사망하고 그때 정왕(鄭王)이 나타나 조선을 독립시키고 충청도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에 즉위하고 태극교도는 정왕을 섬기어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고로 태극교에 입교하여 독신해야한다”고 권유하여 입교시켰다.이후 차원익(車元翼) 등을 대상으로 “태극교는 천의에 기초하는 것으로 태극의 세(조선 독립)도 가깝고 성천을 통하여 모국을 얻어 교도는 고위로 나아가 영원히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포교를 통해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현학근은 1939년 1월 10일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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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목리 공동생활유적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창씨개명, 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광복이 될 때까지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숯 생산과 벌목 등을 하며 생활한 공동생활유적이다. 본래 1986년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되었으나 동일한 번지내에 유적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2015년에 제 13-1호, 13-2호로 지정되었다.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2(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호)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1(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11호)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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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복 묘
이홍복(1881 - 1945)은 경기도 가평 출신으로, 북면 이곡리(北面 梨谷里)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최종화(崔宗和)·장순현(張順賢)·장기영(張基榮)·정성교(鄭聖敎) 등 16명과 함께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1919년 3월 15일 북면사무소 앞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더욱 공고하게 단결하기 위하여 무리를 지어 가평읍내 군청으로 행진하였다. 군중은 군청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면서 기세를 올렸는데, 이때 읍내에 있던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군청·학교·면사무소 등지로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가평독립운동의 특징은 지극히 평화적이어서 군수나 면장, 혹은 경찰이나 헌병에게 위해(威害)를 가하지 않았고 관공서에 대하여도 밖에서 시위하였을 뿐 내부로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는 등의 일은 없었고 질서정연하였다. 그는 이해 4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