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93건
-
3.1독립운동 기념비
1919년 3.1운동 시 화성시 제암리에서도 격렬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특히 3월 15일. 4월 5일의 발안장날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한국인 순사보인 조희창, 발안에 사는 일본인 사사카를 앞세워 제암리로 가서 주민 가운데 15세 이상 남자를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고 출입문을 잠근 후 집중사격을 했다. 일제는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사격을 마치고 예배당에 짚 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그로인해 2명의 부인을 포함하여 23명이 그곳에서 순국했다. 제암리 학살사건을 기리고 일제의 총칼에 죽은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1946년 4월 15일에 제암리 입구에 세운 기념비이다.
-
3.1운동순국기념탑
기념탑이 세워진 이곳은 제암리 주민들이 항상 나라 찾을 것을 기도드렸던 예배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이곳을 노려왔던 일경은 4월 15일 갑자기 마을을 습격하여 23명의 주민을 강제로 예배당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지르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예배당은 한줌의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1959년 이곳 예배당 자리에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순국한 29명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 이 사실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했었다. 그러나 비가 작고 모양이 초라하여 문화공보부는 이곳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 정화하면서 원래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3·1운동 순국 기념탑을 세웠다.
-
스코필드 동상
스코필드(1889 - 1970) 박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리며 1970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된 유일한 외국인이다. 1916년 세브란스의전 세균학 교수로 한국에 와 1919년 3월 1일 역사적인 독립만세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으며, 3·1운동 이후에 일본의 조선인 학살과 고문을 국제 사회에 고발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제암리 학살 사건과 3.1운동 등 일제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던 스코필드 박사와 제암리 사건을 재조명하기 위해 화성시에서 동상을 건립했다. 1959년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해 보육원 후원과 흥국 직업학교를 돕는 등 사회봉사 활동에 헌신해 대한민국 문화훈장·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
발안만세거리(발안주재소터)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펼쳐진 만세운동은 1천여 명의 군중들이 참여했는데 당시 만세운동이 격화되어 일본인들의 가옥에 돌을 던지고, 소학교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이후 만세운동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4월 3일 우정·장안지역에서 군중에 의해 일본 순사가 처단되고, 화수리주재소가 불에 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정근은 제자들과 의논해 4월 5일 발안장을 이용해 3.1만세운동의 주요 지점인 「발안주재소」 습격을 계획하였다. 인근의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등의 주민 800여 명이 모여 발안주재소를 향해 투석전을 전개했으며, 일경의 무력 진압과정에서 이정근은 무장한 수비대의 칼에 찔려 순국하였다. 이날의 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만세운동 참여자에 대해 검거활동에 나서면서 4월 15일 제암리·고주리 학살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제암리에서 23명, 고주리에서 6명 등 총 29명의 무고한 생명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발안 만세운동의 주요 지점이었던 발안주재소가 있던 자리에는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정근 의사의 얼굴을 새긴 동판과 만세운동의 선두에 선 벽화가 그려져 있다.
-
향남면사무소
이곳은 일제강점기 향남면사무소가 자리했던 터이다. 향남 지역은 1914년 4월 1일부로 수원군 향남면으로 개편되었고 향남면사무소는 1993년 6월에 사무소를 행정리로 옮기기까지 현 위치에서 기능하였다. 당시 면사무소는 단층 기와집 건물로 창고, 숙직실 등이 딸려 있었으며 면장과 직원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현재는 발안만세시장 평리공영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