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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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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열 집
이곳은 백낙열(1865 - 1937)이 살았던 곳으로, 장안면 수촌리의 구장으로 활동하면서 우정·장안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구장으로서 마을 주민들의 만세시위 동참을 이끌어 냈을 뿐만 아니라 삼괴지역의 천도교 지도자로서 천도교도 다수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1919년 3월 1일에 김성렬, 안종후 등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에 장안면 석포리에서 차희식 등이 주도한 시위가 본격화되었다. 당시 수촌리 이장을 지내던 백낙열은 마을 주민들에게 시위를 알리면서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이때 우정면사무소와 화수주재소를 습격하여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고 일본인 순사 1명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시위 후 체포를 피해 계룡산 등지를 전전하며 3년간 숨어 지내다 1937년 1월에 사망하였다. 2002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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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장안면)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수촌리와 화수리에서 대대적인 독립시위가 일어났다. 차희식 등 수촌리 지사들은 다른 지역 주민들과 함께 장안면 사무소와 우정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쌍봉산에 올라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무차별 진압한 일본 순사부장 가와바타(川瑞農太郞)에게 시위 군민들이 피살되자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고 그를 잡아 처단하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4월 15일 이른 새벽에 이 마을을 급습하여 불을 질러 온 마을이 잿더미가 되었고 왜병들의 총칼을 맞아 많이 죽거나 다쳤다. 이 소식을 듣고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가 방문하여 부상자를 위문하고 치료해주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장안면 수촌마을 지사들과 이를 도운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의 고귀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74년 삼일절 때 건립한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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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촌교회
수촌리 마을은 우정·장안지역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운동을 펼친 장소로, 그중 1905년 창건된 수촌교회는 수촌리 지역에서의 3·1운동을 주도한 교회로, 10여 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교인들은 3·1운동 당시, 적극적으로 마을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의 참여를 독려하며 최전선에 뛰어들었다. 그 결과 수촌교회는 물론, 마을의 가옥 42채 중 38채, 즉 마을 전체가 완전히 파괴되며 화성지역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기도 하다. 수촌교회에는 당시 초가 형태의 예배당을 복원한 건물이 남아있으며, 바로 옆에는 현재까지도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이 예배를 보는 신식 예배당이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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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모 집
이순모(1893 - 1975)는 1919년 4월 3일 화성군 장안·우정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는데, 장안면사무소로 달려가 200여 명의 군중의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를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한 후, 군중이 점차 1천여 명으로 증가하자 쌍봉산으로 인솔하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2천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를 습격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서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는데,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권총을 발사하며 도망하자, 동지들과 함께 추격하여 붙잡아 격살시켜 버리는 등 격렬하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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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묘
김종학(1885 - 1925)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장안면·우정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장안면사무소를 거쳐 쌍봉산으로 가던 중 우정면사무소로 가기 위하여 내려오던 시위군중과 합류하여 면사무소에 도착 후 선두에 나서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포를 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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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면사무소
이곳은 장안면사무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4월 3일 장안과 우정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하던 시위군중은 주곡리를 출발하여 석포리, 수촌리를 지나 어은리에 있는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장안면사무소에 모인 사람들은 장안면장에게 만세운동에 함께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는 면사무소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웠다. 시위군중들이 면사무소를 모두 불태운 것은 일제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장안면사무소에서 쌍봉산으로 이동하였다. 장안면사무소 터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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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서 묘
양순서(미상 - 1919)는 1919년 4월 3일 장안면·우정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2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석포리 조암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안면사무소로 행진 후 선두에 서서 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시위군중과 함께 인근의 쌍봉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한 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경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공포를 발사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4월 10일 체포되었다. 경찰 주재소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이튿날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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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리 애국지사 6인 순국지
고주리는 3.1운동 당시 향남면, 팔탄면 지역의 주요한 근거지였으며, 독립운동가 김흥열을 비롯한 애국선열 6인은 화성지역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화성지역 만세운동에 두려움을 느낀 일제는 제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와 군인들을 보내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 형제와 김성열의 아들 김흥복, 김세열의 아들 김주남, 김주업을 이곳에서 무참히 학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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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리 애국선열 6인의 묘
이곳은 화성지역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한 김흥열, 김성열, 김세열 형제와 김성열의 아들 김흥복, 김세열의 아들 김주남, 김주업의 묘역이다. 독립운동가 김흥열을 비롯한 애국선열 6인은 화성지역 곳곳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이 시위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돌아왔다. 들불과 같은 화성지역 만세운동에 두려움을 느낀 일제는 제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와 군인들을 보내 김흥열 일가를 몰살하였다. 고주리 애국선열 6인의 독립정신과 그 공훈을 기리고자 화성시에서 세운 묘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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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발안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발안 및 인근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발안장터에서는 1919년 3월 31일과 4월 5일 두 차례에 걸쳐 만세 시위대 1,00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가행진을 하며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마구 휘두르는 총칼에 시위를 주도하던 이정근이 순국하였다. 4월 5일에는 김흥렬·안상용·안진순·안정옥·안봉순·김덕용·강태성 등의 주도로 팔탄면·장안면·향남면 주민들이 발안장에 모여 격렬하게 만세 시위를 벌였는데, 시위대와 일본 경찰의 충돌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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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안3.1독립운동기념탑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에는 1,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고, 면사무소와 발안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일제 식민기관에 직접 타격을 가하였다. 일본 수비대는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며, 수비대가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도착한 증원군 1개 소대는 곧바로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로 사격하였다. 시위 군중을 이끌던 이정근은 현장에서 즉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부상 후유증으로 불구되거나 사망하였다. 이후 제암리교회 집단학살 만행과 고주리 천도교인 참살사건으로 확산되었다. 발안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국제라이온스협회에서 1988년에 세운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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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창의탑
이정근(1856 - 1919)은 1919년 4월 5일 발안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는데,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격노한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었으며, 그는 무력 충돌 때 일본 경찰이 휘두르는 칼에 맞아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