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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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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리 중리 만세시위지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화성지역은 여느 지역보다 격렬한 3.1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우정·장안지역의 만세운동은 종교와 계층을 초월한 대규모 무력항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면사무소(장안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와 주재소(화수경찰관주재소)가 파괴 · 방화되고 일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가 처단되었다. 그 중에서 각리, 중리는 만세운동을 펼치던 시위대가 우정면사무소에서 시위를 마친 뒤 화수경찰관주재소로 향하여 이동할 때 지나간 마을이다. 죽리에는 당시 우정면장인 최중환의 집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우정면장을 만세시위에 동참시키기 위해 그의 집을 포위하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피하고자 최중환은 군중이 이동할때까지 계속 숨어있었고, 그의 늙은 아버지만 남아있자 군중은 발걸음을 옮겨 한각리 광장으로 이동한다. 현재 다른 유관 사적지들과 함께 화성 3.1운동 만세길로 묶어져 관리되고 있고, 이 내용을 담은 안내판도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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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각리 광장터(화성3.1운동만세길)
2019년 개통된 화성3.1운동만세길의 13번째 코스인 한각리 광장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안내판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화성 지역 3.1운동은 1919년 4월 3일 오후 3시경, 쌍봉산에서 우정면사무소로 내려왔다. 시위 군중들은 각리와 죽리를 거쳐 한각리 광장으로 이동하였으며 한각리 주민들은 한각리 광장으로 들어오는 시위 군중과 함께 대열을 정비하여 화수리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시위 군중의 한 무리는 오른쪽의 솔밭길을 넘어서 이동하고 다른 무리는 왼쪽의 한각리에서 화수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화수리 주재소를 향해 출발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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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방 묘
김연방은 대한제국의 시종원시어(侍從院侍御)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에 화성시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키자 이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3일 아침 일찍부터 화성군 장안면 석포리와 우정면 주곡리 주민들이 합류하여 장안면사무소로 향하였고, 장안면 수촌리 주민 100여 명도 합세하여 장안면사무소에 모인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시위를 촉구하였다. 이어 시위 군중은 우정면사무소로 갔으나 면장과 서기들이 이미 도망치고 없자, 화수주재소로 이동하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의 총격에 대응하여 주재소를 불태우고,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하였다. 일제는 1919년 4월 4일부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구타와 방화, 고문 등을 자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김연방은 4월 13일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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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순국지사 추모비
김연방은 대한제국의 시종원시어(侍從院侍御) 출신으로, 1919년 4월 3일에 화성시 장안면과 우정면 일대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키자, 이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3일 아침 일찍부터 화성군 장안면 석포리와 우정면 주곡리 주민들이 합류하여 장안면사무소로 향하였고, 장안면 수촌리 주민 100여 명도 합세하여 장안면사무소에 모인 시위 군중은 면사무소 안으로 들어가 장안면장 김현묵에게 시위를 촉구하였다. 이어 시위 군중은 우정면사무소로 갔으나 면장과 서기들이 이미 도망치고 없자, 화수주재소로 이동하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의 총격에 대응하여 주재소를 불태우고,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하였다. 일제는 1919년 4월 4일부터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구타와 방화, 고문 등을 자행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김연방은 4월 13일 일본 헌병의 총탄에 순국하였고, 가옥은 모두 불탔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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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우정읍)
1919년 3.1운동은 화성시 전역에서도 전개되었는데, 4월 1일 저녁 9시 우정면 장안면의 보금산, 개죽산, 무봉산 등 산마다 횃불을 올려 독립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4월 3일 새벽 5시 우정면 주곡리를 출발한 만세 시위대는 장안면 석포리와 수촌리의 주민들과 힘을 합쳐 어은리의 장안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이어 우정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한데 이어 화수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주재소에 투석, 방화하고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참살하였다.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4월 6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보복했으며, 이로 인해 화산리 김연방과 하수리 송성호가 순국했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의 마을마다 불을 질러 가옥 100여 채를 불태웠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가 13명에 이르렀다. 이 기념비는 1919년 당시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 장안면 수촌리 등지에서 전개되었던 3.1독립만세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9년 8월 15일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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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리 주재소터
이곳은 화성지역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항쟁지인 화수리 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4월 3일 시위군중들은 장안면사무소와 우정면사무소를 모두 불태우고 화수리에 도착하여 주재소를 에워싼 다음 만세를 불렀다. 이에 놀란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 순사는 시위군중들에게 총을 쏘면서 달아났고 시위대는 주재소를 모두 불태운 후 가와바타를 처단하였다. 화수리 마을은 주재소가 파괴되었다는 이유로 가옥이 불타는 등 보복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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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참살터
이곳은 시위군중들이 일본인 순사 가와바타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처단한 곳이다. 1919년 4월 3일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우정면과 장안면 주민들은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러자 화수리 주재소에서 근무하던 순사 가와바타는 시위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면서 도망쳤다. 그 과정에서 이경백을 비롯한 시위군중들이 부상을 입고 희생당하였으며, 시위군중은 달아나던 가와바타를 붙잡아 처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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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시위지 우정면사무소
우정면사무소는 1919년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의 3.1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대표적인 항쟁지이나 현재는 없어져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시위군중들은 쌍봉산에서 독립하려는 결의를 다진 후 조암리를 거쳐 우정면사무소에 도착하여 46㎡(14평) 정도 규모의 초가집인 면사무소를 부수고, 집기와 서류를 불태움으로써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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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한 집 터
차병한(1885 - 1933)은 장안면 석포리 출신의 구장으로서, 1919년 4월 3일 장안면, 우정면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를 차희식, 차병혁, 장제덕, 장소진, 이영쇠 등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여러 사람들과 연락하며 고향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날 차병혁 등과 조암 장터에 모인 2천 여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안면 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이 때 그는 차병혁과 함께 면장 김현묵을 만나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고, 김현묵을 선두에 세워 인근의 쌍봉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화수리 경찰 주재소를 습격했다. 공포를 발사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하고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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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혁 집
차병혁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차희식(車喜植)·차병한(車炳漢)·차인범(車仁範) 등의 동지와 함께 화성군 장안(長安)·우정(雨汀)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전해듣고 4월 3일 아침 일찍 석포리(石浦里) 이장인 차병한·차희식과 함께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장안면 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되어 있으니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한편 자신은 오전 10시 30분 경 차병한과 함께 어은리(漁隱里)에 있는 장안면 사무소로 가서 면장 김현묵에게 면장 김현묵(金賢默)에게 동참할 것을 강권하였다. 200여 명의 만세시위 군중이 면사무소에 모이자 김현묵이 독립만세 운동에 대한 취지를 연설하였고 그는 곧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차병한·이영쇠 등과 함께 이들을 인근의 쌍봉산(雙峯山)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어서 차인범 등과 함께 2천여 명으로 늘어난 만세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그 곳의 건물·집기류·공문서를 파기하고 계속적으로 화수리(花.樹里)에 있는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다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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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정
화성시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을 맞아 격렬했던 화성지역의 독립운동사를 널리 알리고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100여 년 전의 그 길을 60% 이상 복원하여 화성 3·1운동 만세길을 조성했다. 우정·장안지역의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장안면 석포리 출신의 차병혁 생가는 화성지역 독립운동가의 생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인데, 화성 3·1운동 만세길을 조성하며 차병혁의 집 바로 앞으로 「만세뜰」이라는 조형물이 설치됐으며, 집 근처에는 「3·1만세정」이 세워졌다. 총 31km로 이어진 만세길에는 독립운동가의 집터, 생가, 관공서, 횃불 시위운동 장소 등이 남아있어, 그날의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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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죽산 횃불 시위터
이곳은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화성 지역민들이 밤마다 산에 올라가 횃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던 곳이다. 1919년 4월 1일 개죽산을 시작으로 쌍봉산, 남산, 천덕산, 무봉산 등 화성 지역의 각 산봉우리에서는 일제히 횃불이 치솟았다. 총 10개의 산봉우리에서 횃불시위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야간 산상횃불시위(구릉이나 산 위에서 횃불을 들고 벌이는 만세시위의 한 형태)라는 새로운 형태의 시위로 발전했다. 비교적 적은 수의 인원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의 주민들은 평지에서 만세시위를 벌일 경우 일제 경찰에게 쉽게 제압당할 수 있기에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일제 경찰의 활동이 어려운 야간에, 산 위에서 만세시위를 진행했으며, 개죽산에서의 횃불시위는 수촌리 인근 마을주민들의 독립 의지를 드높이고, 우정·장안지역의 사람들이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