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93건
-
장준하 추모비
장준하(1915~1975)는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공작을 벌이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경현수 사당(운담영당)
경현수(1861~1928)는 화서학파 김평묵의 문하생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성균관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 13도 유약소에 가담하여 전국의 유생들과 함께 궁궐 앞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13도 유생 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를 올렸으며,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순종에게 양위를 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1908년 13도 의병 연합부대의 총대장인 허위의 부대에 종군하였다. 그 해 2월 허위의 지시에 따라 청국(淸國) 혁명당(革命黨)에 군사 원조를 청하는 밀사로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의 국상을 당하여 장남 경우현과 함께 유림역사대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장남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1920년 3‧1운동 1주년에는 의거를 꾀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이비호 묘
이비호(1895 - 1961)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한 독립 운동가이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일경이 출동하여 25명의 시위군중을 체포하자 이에 격분한 이비호는 오후 7시경,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로 달려가 그곳을 포위하고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며 제지하자, 투석으로 맞서 주재소 건물을 파괴하고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시위대열의 앞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곧 안동 주둔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공포를 쏘아대며 시위군중을 해산시키고, 대대적인 검거를 시작하면서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조영원 공적비
조영원(1891 - 1974)은 유신학교 졸업 후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 임정 국무원 비서장 서리 등을 지냈고, 1926년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파견되어 김좌진 장군이 영도하던 신민부의 군사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해림 신창학교를 창설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31년 한국 독립군 총사령부 총참모 등으로 활약 중 1933년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수로 복역하다가 5년 간 집행유예로 본국에 압송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3.1독립운동 기념비
하남시(당시 광주군) 3·1독립운동은 3월 21일부터 31일 사이 11회에 걸쳐 천현·교산·망월리 등지에서 7,600여 명이 참가했으며, 4월 1일부터 15일 사이 한 차례 400여 명이 참가한 만세운동 시위를 벌였다. 하남시 지역 독립유공자 4인(이대헌, 김교영, 김홍렬, 구희서)은 1,000여 명에 달하는 시민과 함께 면사무소, 일본군 헌병주재소에 집결,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쳤다. 이와 같은 1919년 3·1독립운동을 기념하고 일제강점기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 순국한 하남시 애국지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3.1독립운동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
이필주 기념비
이필주(1869 - 1932)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고양(高陽)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선천적인 무인 기질로서 20세에 한말(韓末) 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하여 장교로서 8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융희 1)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군대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尙洞) 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완전 상실되자, 통분하여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 후 종로 청년회관(y.m.c.a.)의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 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 체육교사로 취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또 모범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미신타파와 신분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신학교(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최성모(崔聖模)·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박동완(朴東完)·오정도(吳貞道)·현 순(玄楯) 등과 자주 만나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거의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기의 집에서 이인환(李寅煥)·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泰永)·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오화영·최성모·박동완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이 최 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南陽敎會)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조문기 동상
조문기(1927 - 2008)는 1943년 5월 일본 천기시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에 취업 중인 한국인 노무자들의 민족차별 반대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후 국내로 들어와 1945년 5월 대한애국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1945년 7월 24일 경성 부민관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조선인들의 전쟁 협력을 고양시킬 목적으로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폭탄 두 개를 투척하여 일제 고위간부와 친일 민족반역자들의 제거를 기도한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역이었다.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황창오 기념비
황창오(1896 - 1982)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고향인 황해도 해주 동운면 삼정리에서 대중을 규합, 조직하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계속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투쟁조직을 만들다가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자, 1920년 5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같은 해 7월 상해에서 대동단(大同團) 가입 후 일제와의 무력독립투쟁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군자금을 모집할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와 활약하다 1921년 이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불복, 항소하여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27년에 가석방되었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이인 묘
이인(1896 - 1979)은 경북 대구(大邱) 출신이며, 일제강점기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사건, 안창호 사건 등을 맡은 법조인이자 변호사이며 정치인이다. 일본 명치대학 법학부 졸업 후 1923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제강점기 당시 김병로, 허헌과 함께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 사회저명인사들을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1927년 2월 신간회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위원이 되어 사전편찬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붙잡혀 이듬해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3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대법관, 검찰총장, 법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제헌의회와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건국에 기여하였다. 만년에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하여 재정지원을 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3.1독립운동기념비(서신면 상안리)
기미년 3월 26일부터 당시 상안리에 거주하던 이원행이 주도하고, 서신면민이 합세하여 사강장날에 모인 수많은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는데, 전곡리의 홍성휴·이재항·홍대우와 송교리의 홍대규는 더욱 울분에 싸여 일제 만행에 소리쳐 항거했다. 그 후 일제 왜경과 헌병은 마을을 습격히여 불을 내어 전곡리의 홍대우를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
정군필 집 터
정군필(1883 - 1973)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으로, 1919년 3월 26일부터 3월 28일까지 홍 면(洪면) 등이 계획하여 전개한 화성군 송산면(松山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강리 장날인 28일에 홍 면 등과 함께 1천여 명의 군중이 사강리 뒷산에 모여 전개한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일본인 순사부장 야구광삼(野口廣三)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경은 주동자 홍 면 외 2명을 체포하여 꿇어 앉혀 놓았다. 그런데 홍 면이 갑자기 일어서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야구광삼이 권총을 발사하여 총알이 홍면의 어깨를 관통하였다. 홍 면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지면서 자기에게 발포한 일경을 죽이라고 외치는 광경을 본 독립만세 시위군중이 일시에 분노하여 야구광삼에게 달려들자, 그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했다. 이 때 격분한 그는 홍 면의 동생 홍준옥·장인 김명제(金命濟) 및 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김교창(金敎昌) 등과 추격하여 미처 주재소에 도착하지 못한 일경을 도로에서 포위하여 투석으로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홍효선, 홍승한 집 터
홍효선(1879 - 1919)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松山面 沙江里) 일대에서, 홍 면·왕광연(王光演)·문상익(文相翊)·홍명선(洪明善)·김교창(金敎昌) 등이 주동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는 3월 26일 오후 5시경 송산면 사무소에 모인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내걸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3월 28일 오후에 송산면 뒷산에 모인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가 출동하였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기세를 올리며 홍면옥 등 수십명이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과 면서기에게 독립만세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오후 3시경 뒤따라 온 노구치가 홍면옥 등을 강제로 주재소로 연행하려 하여 시위군중과 충돌하게 되었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순사부장이 권총으로 홍면옥을 쏘아 홍면옥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시위군중은 일시에 격노하여 일경에게 달려들었다. 순사부장은 사태가 불리해지자 자전거를 타고 주재소 방향으로 도주하였다. 이 때 그는 왕광연·홍명선·김교창·문상익·홍남후(洪南厚)·김명제(金命濟)·민용운(閔龍雲)·정군필(鄭君弼) 등 20여 명과 순사부장을 추격하여, 미처 주재소에 도착하지 못한 일경을 노상에서 포위하고 돌과 몽둥이로 때려 격살하였다. 그 후 결국 일경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잔인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승한(1894 - 1928)은 사강리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마을 주민들은 3월 26일 오후 5시 경 송산면 사강리(沙江里, 현 華城市)의 면사무소 부근에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3월 27일에는 사강리 서쪽 육일리 방면에서 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사강리의 장날인 3월 28일 송산면의 주민들은 오전 10시 경부터 사강장터에서 부친 홍효선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오후 2시 경에는 면사무소와 사강리 주재소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홍승한은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 면사무소 앞에서 1,000여명의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된 홍승한은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은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0년 4월 28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1년에 홍효선에게 건국훈장 애국장, 2006년에 홍승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