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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원 묘
박내원(1902~1982)은 1917년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종로기독교청년회에서 공부한 뒤 대동(大東)인쇄주식회사 인쇄직공 견습생이 된 이래 사상운동에 심취하여 노동단체와 청년단체 활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1924년 10월 청년운동단체인 용진당(勇進黨)을 조직한 바 있으며,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이나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깊이 관여하면서 조선공산당과 천도교(天道敎)의 양세력을 연결하는 매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5년 3월 권오설(權五卨)의 지시에 의해 경성노동연맹(京城勞動聯盟)을 조직하였으며, 인쇄직공조합연맹(印刷職工組合聯盟)·경성인쇄직공청년동맹(京城印刷職工靑年同盟) 등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그 밖에도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돈화청년회(敦化靑年會)·한양청년연맹(漢陽靑年聯盟)·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신흥청년사(新興靑年社) 동인·화요회(火曜會)·정우회(正友會)·불꽃사(火焰社) 동인·연우사(鉛友社) 동인·혁청 단원·조선기근구제회(朝鮮饑饉救濟會)·무산자동맹(無産者同盟)·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등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제2차 조선공산당에서는 경성야체이카의 언론기관 프랙션에서 활동했다. 그는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재종질(再從姪)로서, 천도교 계통의 민족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천도교가 신·구파로 분화될 때 1926년 4월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靑年同盟)의 창립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이 6·10만세운동을 계획하기에 앞서 추진한 메이데이 기념시위에도 깊이 관계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에서는 조선노농총동맹을 앞세워 기념시위를 전개하려고 했다. 이때 그는 조선노농총동맹의 핵심 간부로서 기념시위의 제반 준비를 담당했다. 그런 가운데 융희황제가 승하하면서 기념시위 계획이 6·10만세운동으로 전환되자, 그는 권오설로부터 격문 인쇄 및 지방 조직과의 연락 임무를 부여받고, 이같은 사실을 권동진(權東鎭)과 천도교 교주 박인호와 이종린(李鍾麟)·박내홍(朴來弘) 등에게 알려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승낙을 받아내었다. 그는 격문 인쇄를 위해 손재기(孫在基)·백명천(白明天)·양재식(梁在植) 등 천도교 인물과 민창식(閔昌植)·이용재(李用宰) 등 인쇄직공조합원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격고문(檄告文)’, ‘대한독립만세’,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산업은 조선인 본위로’, ‘대한독립운동자여 단결하라’ 등의 격문 인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사일이 임박하는데 자금이 없어 격문을 배포가 어려워지자 권동진에게 1만원의 자금을 요청하여 쾌락을 받아내었다. 그러나 6·10만세운동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일경에 체포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천도교 구파청년단 상무위원, 천도교 중앙교회감사위원 겸 청년동맹대표로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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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호 묘
박인호(미상~1924)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충남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1904년 진보회의 갑진개화운동 주도하면서 동학교도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08년 1월 18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천도교 조직을 활용하여 개화문명의 보급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1일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의 명으로 3·1독립운동 경비 지원 및 2월 28일에 천도교 이종일·이종린·윤익선 등과 함께 협의하여 〈조선독립신문〉을 천도교 경영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몇만 매를 인쇄하여 3·1독립운동 때에 전국으로 배포케 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으며, 3월 1일 천도교 대도주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다음날 1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융희황제의 국장을 기회로 6·10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이들과 연계하여 격문 10만여 매를 인쇄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독립단」이란 도장을 조각 날인하여 58개 지방도시에 배부하는 등 거사를 도왔다. 1936년 멸왜기도(滅倭祈禱)를 지시한 것이 발각되어 병석에서 심문을 받는 등 다년간 조국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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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우리 헌병분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송우리 헌병 분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4과 30일에 소흘면 송우리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4일 소흘면 송우리에서 600여 명의 주민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날 시위 주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송우헌병주재소 헌병경찰들은 총검으로 야만적인 탄압을 자행하여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다. 시위 도중에 부상자가 발생하고 주동자들이 붙잡혔음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시위는 계속되었다. 3월 30일에는 2,000여 명의 시위 군중이 송우헌병주재소에 몰려와 만세시위를 재차 전개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소흘면 주민들과 가산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벌인 것으로 특히 시위대는 송우헌병주재소를 공격하여 파괴하려 하였다. 3월 24일 시위 때 체포된 만세시위 주동자들과 3월 29일 체포된 무봉리 만세시위 주동자들을 구출하려는 시도로 보여진다. 이때 일본헌병대는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러한 일본헌병대의 무차별 발포로 인해 최석휴 등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최석휴(1888~1919)는 경기도 포천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포천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 행진에 참여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30일 포천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행진 당시 가산면의 3·1독립만세운동 거사의 총책임자로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거사 준비를 하면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이들은 곧이어 이웃에 있는 소흘면 주재소로 가서 그곳을 습격하다가, 그는 출동한 일본 경찰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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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집
최익현 집 터는 조선 후기 애국지사이며 최고령 의병장이었던 최익현이 태어난 곳이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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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식 공적비
최면식(1891~1941)은 경기 포천(抱川) 사람이다. 1941년 9월 만주(滿洲)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필요한 자금을 수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주도한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그는 이병호(李秉昊)와 함께 전라도 지역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고, 또 친일부호 처단에 필요한 무기를 채기중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광복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 다시 붙잡혔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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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면식 묘
최면식(1891 - 1941)은 경기 포천(抱川) 사람으로, 1941년 9월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자금을 수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그 이후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며 군자금 수합 및 무기 조달에 협력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광복회의 재건에 힘쓰다가 1921년 9월 다시 붙잡혔으나 병보석으로 출옥한 뒤 순국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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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북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신북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는 포천의 4개 면민 1,000여 명이 연합하여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신북면 만세 시위는 포천 지역 연합 만세 시위였다. 1919년 3월 29일에 중면 신사리에 사는 유중식은 “내일 신북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고자 하니 여러 사람과 같이 나오라”는 통문을 받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는 한편 함병현·김수종에게 마을마다 통문 내용을 알리게 하여 만세 시위 계획을 널리 선전하였다. 3월 30일에 신북면사무소에는 신북면·일동면·이동면·영중면 등지에서 주민 1,000여 명이 몰려 들었다. 어느 청년이 연설에 이어 누군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도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시위는 점차 폭력적인 양상으로 바뀌었으며, 일제 경찰의 발포로 3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현재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890에 이 만세시위를 기념하는 안내판 및 표지석이 건립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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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윤 묘
이재윤(1849~1911)은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으로 대과급제(大科及第)하여 벼슬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침략적 야욕에 대처하기 위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전개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條約) 이후 스승 면암의 뒤를 따라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중국에 원세개(袁世凱)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비밀리에 중국 관헌들과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낼 일을 협의하였으나, 한반도가 일제식민지가 되자, 1911년 7월 13일 목을 매고 자결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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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식 묘
유중식(1895~1971)은 포천 출신으로 경기도 포천군(抱川郡) 신북면(新北面)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시위 하루 전인 1919년 3월 29일 독립만세운동 통문을 같은 마을 사람들에게 회람하여 동참을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30일 신북면사무소에서 1,000여 명의 군중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시위 후 주동자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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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
포천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는 일본인 교장의 비교육적인 처사에 맞서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벌인 곳이다. 1927년 11월 26일에 포천공립보통학교의 마쓰하라 교장이 수업료를 못 낸 학생들을 구타하자 이에 분개한 4학년생 50여 명이 진정서를 제출하고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이들은 교장이 학생을 구타한 일 외에도 수업료를 거두지 못했다며 한국인 교사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않은 일, 학생을 학교장 가사에 동원한 일 등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자 교장은 오히려 포천경찰서에 학생들의 동맹 휴학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하고, 주동학생들에게 무기정학 또는 5일간의 유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신읍동 133에 위와 같은 항거 운동 및 독립정신을 기리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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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영평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영평면 주민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4일에 영평면 주민들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창문을 깨고 면장을 구타하였다. 이들은 한때 물러갔다가 다시 영평헌병분견소를 습격한 뒤 해산하였다. 한편, 이보다 이른 시기인 3월 13일에는 면사무소와 이웃한 영평공립보통학교에서 만세 시위를 벌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3학년생 정수환은 학생들에게 “철원과 포천에 있는 보통학교는 이미 학업을 중단하고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만 만세 시위를 하지 않는 것은 면목이 없으니 속히 휴교하고 만세를 고창하자”며 시위를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파악한 학교 교원의 저지로 시위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현재 포천시 영중면 영평리 240에 위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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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기, 안응건 유적비
김용기(1901~1983)는 평북 선천(宣川) 사람이다. 1917년 만주 흥경현(興京縣)으로 이주하였으며 1920년에는 독립군에 입대하여 전덕원(全德元)의 부하로서 일본영사관 습격 등의 활약을 하였다. 그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 휘하로 전속되어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1923년 8월 6일에는 의군부(義軍府) 특파원으로 제1소대 이경일(李京日) 인솔하에 34명이 의주군(義州郡) 청성진(淸成鎭)에 들어와 3개대로 나누어 8월 7일 밤에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비롯하여 우편소·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방화(放火)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25년 3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살인·방화·강도죄로 징역 6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안응건(1886~1921)은 1919년 자택에서 태극기 14본을 제작하고 독립선언문을 전 주민에게 배부하여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는 등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