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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독립운동 선열추모비
평택에서는 1919년 3월 9일 현덕면 계두봉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평택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수원 이남지역 최초의 평택 3·1만세운동은 안성, 화성, 천안 등 남한의 3대 만세운동 항쟁지보다 앞서 일어났는데, 일제가 「광포(狂暴)」하다는 표현으로 기록했을 만큼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각계각층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기념비는 2019년 3월 9일에 평택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민들의 모금으로 평택 3·1독립운동선양회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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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3.1독립운동기념비
평택에서는 1919년 3월 9일 현덕면 계두봉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평택 전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수원 이남지역 최초의 평택 3·1만세운동은 안성, 화성, 천안 등 남한의 3대 만세운동 항쟁지보다 앞서 일어났는데, 일제가 「광포(狂暴)」하다는 표현으로 기록했을 만큼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각계각층에서 대규모로 전개되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기념비는 2019년 3월 9일에 평택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민들의 모금으로 평택 3·1독립운동선양회에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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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두봉 3.1운동 만세 시위지
계두봉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평택 지역에서 1919년 3월 9일부터 4월까지 진행되었으며, 최초로 만세 시위가 벌어진 곳이다. 1919년 3월 9일에 진위군 현덕면 권관리, 기산리, 황산리, 도대리, 방축리 주민들이 계두봉과 옥녀봉에 모여 횃불 시위를 벌였다. 이후 3월 22일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던 이민도 등이 다시 시위를 준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12명을 진위경찰서(현 평택경찰서)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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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영 묘
이범영(1890~1955)은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의 독립지사·교육자로, 보성전문 법과 졸업 후 향리에 청성학교를 설립, 충의를 교훈으로 민족혼을 고취했고 3.1운동 후 중국에 망명하여, 3.1학당 설립 운동과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결성에 참여하여 항일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포천소비조합 창립 및 강화학교, 김천 광명학교, 밀양 정진학교, 영등포 영창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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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영 송덕비
이범영(1890~1955)은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의 독립지사·교육자로, 보성전문 법과 졸업 후 향리에 청성학교를 설립, 충의를 교훈으로 민족혼을 고취했고 3.1운동 후 중국에 망명하여, 3.1학당 설립 운동과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 결성에 참여하여 항일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1928년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포천소비조합 창립 및 강화학교, 김천 광명학교, 밀양 정진학교, 영등포 영창중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민족교육에 전념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이범영 송덕비는 그의 항일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 사업에 바친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포천 출신 독립 유공자 공적비 건립위원회가 주최가 되어 포천 유지들의 정성을 모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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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채 행적비
이규채(1884~1947)는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으로, 청성학교 교원으로 재직하고, 3·1운동 후 중국에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정치부위원, 신한독립당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에 그는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總務委員長)에 피선되었으며, 본부를 만주(滿洲)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기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고, 본부를 옮김에 따라 한국독립당군은 해체하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국 길림(吉林) 육군 제3군 상교참모(上校參謀)가 되어 활약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남경(南京)에 본부를 두고 있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과 한국독립당이 제휴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9월 25일에 중국 상해(上海)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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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기념비
관인면의 3·1만세운동은 면민 대다수가 참여한 대규모의 만세운동으로, 1919년 4월 10일 당시 19세였던 기독교 감리교회 청년신도 조아당과 조국독립에 뜻을 두었던 박용길의 주도로 일어났다. 상노리 신포동에서 시작한 만세운동 행렬이 총 14Km를 행진하며 남창동으로 600여 명이 진입하자 일본군 중리 헌병 분견대 등에 의해 평화적 시위가 무력 진압되었으며, 조아당과 박용길 등 31명이 검거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일제의 폭압과 무력에 맞서 관인면민 모두가 평화적으로 항거하였던 고귀한 자주독립 정신을 널리 알리고 영원히 계승하기 위해 관인면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순수 관인면민의 자발적 모금에 의해 2019년 4월 10일 3·1만세운동기념비를 세웠으며, 관인문화체육센터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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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기념비, 3.1만세운동 시비
관인면은 100년 전 1919년 4월 10일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기독교 감리교회 청년신도였던 조아당과 조국독립에 뜻을 두었던 박용길의 주도로 신포동을 시작으로 하여 삼율리-다랑고개-사정리-초과2리 남창동으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과 함께 당찬 행렬을 이어가며 600여 명이 운집하여 항쟁했던 곳이다. 일본제국주의의 폭압과 잔혹한 식민지 정책에 항거하며 우리 역사에 가장 큰 긍지와 건국의 바탕을 심어 주었던 3·1만세항쟁 100주년을 맞이하여, 관인면의 독립운동과 만세항쟁의 중심지였던 초과2리의 긍지를 널리 알리고자 초과2리 서예마을 주민들이 2019년 4월에 3·1운동 100주년기념비를, 2020년 11월 26일에는 최정자 시인의 「고남산 정기 받아」 3.1만세운동 시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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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비
기미독립선언서비는 일제강점기에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3·1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큰 공훈을 남긴 독립유공자를 추앙하고, 독립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포천 출신의 독립유공자는 3·1독립운동 당시 선언서에 서명한 조선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박동완이 대표적이다. 또한 애국장을 추서받은 신영희·이영여·최석휴, 애족장을 추서받은 유중식·조계식·조훈식,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함병현, 대통령 표창장을 추서받은 최학돌이 있다. 2016년 3·1절 97주년 기념일을 맞아 세운 기미독립선언서비는 청성역사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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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방산 김연성 의병 전투지
왕방산 김연성 의병 전투지는 1907년에 김연성이 이끄는 의병이 기습작전을 벌인 곳이다. 포천 지역에서는 1907년 9월 20일부터 의병 활동이 산발적으로 진행되다가 10월 이후부터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해 12월에 김연성이 이끄는 의병 40여 명이 포천군 서면 왕방산에 출동하여 기습작전을 벌였다. 김연성(1870~1909)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1907년 9월 창의하여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부터 이강년의진(李康秊義陣)의 의병소모관(義兵召募官)을 역임하였고, 1909년 1월부터는 관동창의원수부(關東倡義元帥府)의 중군장 이은찬의진(李殷贊義陣)에 속하여 경기·황해도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강년은 1896년 1월 11일 문경에서 창의하여 유인석의진(柳麟錫義陣)에 참가하여 유격장(遊擊將)으로 활동하였으며, 1907년 3월에는 재봉기하여 강원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북 북부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강년은 1908년 8월 한국 군대의 해산 이후 40여 의병진의 추대로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어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경상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이은찬은 1908년 3월에서 4월 사이에 결성된 관동창의원수부(關東倡義元帥府)의 중군장(中軍將)이었다. 관동창의원수부는 임진강 유역과 양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동북부지역에 결성된 연합의병부대였다. 이 연합의병부대는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했던 군사장 허위(許蔿)를 비롯한 일부의 의병부대로 결성되어 임진강 유역과 양주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8년 6월 총대장 허위가 체포된 뒤, 이은찬은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동년 10월부터 포천·영평·마전·적성 일대에서 각처 의병 부대와 연합하여 활동하였다. 이은찬이 1909년 3월 말 체포된 뒤 그 휘하 부대장들은 경기도 일원에서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편성하고 항쟁하였다. 김연성은 1907년 9월 창의하여 동년 12월까지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부하 30~40명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될 때, 김연성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권중희(權重熙)의 휘하에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 1908년 1월 이강년의진에 합류하여 의병 소모관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1월부터 김연성은 관동창의원수부의 중군장 이은찬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김연성은 1909년 1월부터 동년 4월 이은찬이 체포될 때까지 경기·강원도·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분견소 습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9년 11월 29일 평양공소원에서 교형(絞刑)을 받아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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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형 묘
강지형(1881~1931)은 경기도 포천 가산(加山)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및 국민대회에 관한 구체적 방안 토의 및 「국민대회(國民大會) 취지서(趣旨書)」 작성 시 13도 대표 25인 가운데 1인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1920년 국내로 들어와 대한독립단 지단(支團) 조직 및 유인물 제작, 자금확보 등을 위한 활동, 독립군의 국내 진입 시 일제히 호응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하던 중 일경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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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무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무봉리 주민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소식은 곧바로 포천에도 알려졌다. 그리하여 3월 13일 포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를 시작으로 영중면 영평리와 소흘면 송우리에서 만세 시위가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소흘면 무봉리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 시위를 벌이며 무봉리 일대를 행진하였다. 이때 시위를 주도한 5명이 송우리헌병주재소에 체포되었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무봉리 만세 시위는 신북면사무소 만세 시위, 송우리 만세 시위와 함께 포천지역에서 일어난 시위 중 대규모 시위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