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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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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엽 묘
김백선, 안승우, 이춘영은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이때 안종엽은 물자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7년 13도 창의군이 창설될 때 역시 물심양면으로 협조했다. 1908년 귀가 도중 친일패당으로 추정되는 자객으로 인해 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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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덕 묘
김백선은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는데, 이때 김백선과 가까웠던 김진덕은 그와 함께 창의 출병하기로 한다. 김진덕은 친제 4명을 비롯하여 종제 10여명을 모아 출병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양평 을미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도 양평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는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당시 양동은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이춘영과 김백선은 현재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 안승우 생가에서 안종응과 함께 양평의병을 창의하기로 하고, 안창에서 최초 의병이 집결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원주, 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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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문 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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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열 묘
유세열 여주 이천 지역에서 항일의병 투쟁을 이끈 의병대장이었다. 일본군의 허점을 찌르며 의병활동을 이어가던 그에게 화난 일본군은 그의 집에 방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로 거처를 옮겼다.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지라도 그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같은 의병활동을 하던 최익현, 이강년 등과 항일 의거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일본 관헌에게 붙잡힌 그는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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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희 묘
최동희(1890~1927)는 서울 종로 사람이다. 천도교 제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아들이다. 1919년 이채우(李采雨)·김영순(金永淳)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천도교 의정회 혁신파에 소속되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7월에는 천도교 중심의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으로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송 헌(宋憲)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김광희(金光熙)·강도희(姜道熙) 등과 함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갔다. 1926년 4월 5일에는 길림에서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오동진(吳東振)·곽종대(郭鍾大)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에서 온 그를 비롯하여 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鎭秀) 등과 혁명원로들이 독립투쟁을 결의하고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7년 1월 26일 지병이 악화되어 중국 상해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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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우 묘
심상우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에서 출생했다. 당시 일본이 운영하는 보통학교(마전공립학교)는 다닐 수 없다며 입학을 거부하고 마전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왕산 허위선생의 격문을 보고 선생의 휘하로 들어가 의병부대 제3분견대(파견대)장의 임무를 맡아서 관공서 습격 등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1908년 10월 15일 백석리 가루재(하우고개 주변 현 중앙추모공원 자리)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바위틈에서 일본군의 흉탄에 맞아 전사했다. 심상우 의병장의 시신은 당시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묘를 정했으며 전사 당시 26세로 미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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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현 묘
최삼현(1890~1953)는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충북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잔갈, 일명 ‘흐느실’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의병 활동에 가담하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최 지사의 친척과 절친했던 박순종 씨에 의하면 5년여 간 의병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순종 씨가 도장까지 찍어가며 1983년 작성한 진술서를 보면 “자네들은(최씨의 형제자매 지칭)는 우리가 아니면 태어나지도 못했다. 최 지사가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놈들에게 쫓겨 우리 집에 왔을 때 광안에 빈독을 엎어 그 곳에 다섯 달이나 피신시켜 줬다. ‘의병을 숨겨주다 들키면 징역가니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최 지사가)스스로 떠났다”고 전했다. 몇 해에 걸친 도피생활 끝에 최 지사는 의병 동료 2명과 함께 1912년 용인으로 숨어들어와 인근 동네 부잣집으로 흩어져 정착을 했다. 최 지사는 가창리 학자골 안씨댁에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농사일을 하게 됐고 20대 중반 이웃 김씨 집 데릴사위로 결혼을 했다. 의병들의 삶이 대개 그러했듯이 최 지사도 결혼 후 5남 2녀를 두고 해방될 때까지 ‘최돌산’이라는 가명으로 과거 의병 활동 행적을 철저히 숨기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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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내홍 묘
박내홍(1894~1928)은 서울 사람이다. 1920년대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 등을 결성하면서 천도교의 청년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신간회 발기인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에서는 3·1운동 이후 천도교의 조직을 쇄신하면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 등을 조직해 갔는데 이 때 그는 천도교내 젊은 지도자로써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천도교측의 실무담당자 박내원(朴來源)을 후원하면서 만세운동의 조직과 자금에 대한 지원활동을 벌였다.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천도교측의 6·10만세운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조선공산당과 협동전선을 형성하여 추진해 갔던 6·10만세운동에서 그는 배후 지원의 역할을 맡았다. 당시 천도교는 6·10만세운동에 필요한 전국의 조직망과 격문 인쇄 등을 맡는 등 만세운동의 대중 확산에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발각 후 천도교측에서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천도교 지도층의 6·10만세운동 관여사실을 숨겼으나, 실은 박내홍을 비롯하여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인 권동진(權東鎭)·이종린(李鍾麟)·박인호 등이 배후에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측의 인사들이 이러한 비밀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일제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927년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가 창립될 때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신간회 결성에 크게 힘을 쏟았다. 신간회 창립 간사의 일을 맡았던 그는 1928년 10월 5일 경운동 천도교회 사무실에서 단도를 든 괴한 서을봉에 피습당하여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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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동상
조소앙(1887 - 1958)은 파주 교하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본 유학 시절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는 대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박은식, 홍명희 등과 함께 박달학원에서 청년 혁명가를 양성하였다. 1917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2월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명 명의의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에 사회당을 창당하고, 1950년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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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로 표지석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역임한 분이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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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집 표지석
변영로(1898~1961)는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가이다.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문」을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同人)으로 활약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발자크의 작품 등 해외 문학을 국내에 번역·소개하였다. 1924년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하였고, 1927년에는 백두산을 여행한 후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 「천지(天池) 가에 누워」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 주간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결국 일본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나야만 했다.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이사,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별세하였다. 변영로는 친일 문학 연구가 임종국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중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민족의 저항 정신을 노래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다. 1922년 발표한 「논개」는 변영로의 대표적인 시로,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죽은 논개(論介)의 애국충절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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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로 표지석
변영로(1898~1961)는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가이다.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문」을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同人)으로 활약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발자크의 작품 등 해외 문학을 국내에 번역·소개하였다. 1924년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하였고, 1927년에는 백두산을 여행한 후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 「천지(天池) 가에 누워」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 주간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결국 일본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나야만 했다.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이사,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별세하였다. 변영로는 친일 문학 연구가 임종국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중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민족의 저항 정신을 노래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다. 1922년 발표한 「논개」는 변영로의 대표적인 시로,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죽은 논개(論介)의 애국충절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