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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교하 3.1독립운동기념비
「파주 교하 3·1 독립운동 기념비」는 1919년 3월 10일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여성독립가 임명애와 학생들의 함세 함성을 시작으로, 와석면 일대에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던 수많은 독립유공자들의 공훈과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기념비의 기단부의 원형 3조각은 3.1운동의 『3』, 세로 기둥은 『1』을 상징하여, 좌대 부분 아래로부터 위로 퍼지는 삼각형 조각 형태는 힘찬 『만세함성』을 상징한다. 2019년 3월 10일,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날의 힘찬 함성과 고귀한 희생을 기억하여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파주의 첫 만세시위 근원지인 교하초등학교에 본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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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하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교하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교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0일에 구세군 교인이었던 임명애는 교하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학생 100여 명을 독려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김수덕, 김선명과 앞으로 시위를 어떻게 전개할 것인지를 논의한 뒤, 참가할 사람을 모으기 위해 격문을 만들어 와석면 당하리 일대에 배포하였다. 임명애는 체포되어 1919년 6월 3일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김수덕과 김선명은 각각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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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석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와석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파주군 와석면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던 곳이다. 1919년 3월 25일에 임명애, 김수덕, 김창실, 염규호 등은 염규호의 집으로 모여 시위를 계획하고 주민 참여를 독려하는 통문을 제작, 배포하였다. 다음날인 3월 26일에 임명애 등 주민 700여 명은 와석면사무소로 행진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파주 분견소에서 급파된 헌병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최홍주가 순국하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주도자들은 체포되어 임명애는 징역 1년 6개월, 염규호와 김수덕은 각각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김창실은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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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하경 순국터
반하경(미상~1910)은 경기도 파주(坡州) 출신으로, 고종 때의 내시(內侍)로서 승전색(承傳色)을 지내다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고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에 은거하던 중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누르지 못하고 파주 삽다리 장터에 나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유서를 꺼내고 할복 자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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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진 기념관
정태진(1904~1952)은 한글학자이며 독립운동가로서,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 〈조선말큰사전〉 편찬원이 되었고, 1942년 9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 후, 1945년 8월 조선어학회를 다시 조직하여 〈큰사전〉 편찬을 계속하였으며 대학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1952년 〈우리말 큰사전〉 속간을 위해 서울에서 편찬사업에 진력하다가 귀향 도중 교통사고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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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주 묘
송기주(1890~1950)는 충남 서천(舒川) 사람으로, 당시 개정면 구암리(龜岩里) 기독교병원의 사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19년 3월 5일 전라북도 군산(群山)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독립선언문 선언서를 비밀리에 수천 매 영명학교에서 복사하여 군산 부내에 배포하였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출판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상고하였으나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과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2000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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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수 묘
한명수(1893~1966)는 1919년 3월 8일과 9일에 경북 김천군 김천면 황금정교회에서 김수길·김충한·최용수 등과 만세시위 계획 및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결정하였다. 이들은 조선독립에 관한 경고문을 기초하고, 인쇄와 배포 등을 분담하였다. 한명수는 3월 10일 김천군 금릉면 교동 예수교회당에서 다음 날 의거에 참가하라고 교인들을 독려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소위 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2006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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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현수 공적비
경현수(1861~1928)는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의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성균관 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13도유약소에 가담하여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13도유생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를 올렸으며, 1908년 13도 의병 연합부대의 총대장인 허위의 부대에 종군하였다. 그 해 2월 허위의 지시에 따라 청국(淸國) 혁명당(革命黨)에 군사 원조를 청하는 밀사로서 파견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의 국상 당시 장남 경우현과 함께 유림역사대를 조직하고 청량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장남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고, 1920년 3.1운동 1주년에는 의거를 꾀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충절과 숭고한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보훈처와 후손 및 후학들이 1985년에 공적비를 건립하였으며,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청주경씨 감역공 종중 묘원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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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철 묘
조광철(1891~1951)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광철은 1919년 3월 17일 의주군(義州郡) 고성면(古城面) 대산동(臺山洞)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서당 교사 이영수(李永秀)가 경찰에 잡혀가자 조광철은 이에 항의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까지 행진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조광철은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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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국 묘
문윤국(1877~1954)은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의 기독교(基督敎)인으로, 1919년 3월 7일 선천군 아이포 일대와 정주 오산중학교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3월 7일 선천군 아이포 면사무소 뒷산에 모인 4천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다가 체포되어, 6월 12일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해임시정부에 토지를 처분한 돈 7만원을 군자금으로 조달하는 등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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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숙 위령비
문창숙(1898~1928)은 황해도 신계(新溪) 사람으로, 1919년 신계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 동년 9월경 신흥무관학교 수료 후, 1923년 참의부(參議府) 중대부사(中隊副士)가 되어 소대장으로서 부하 17명을 이끌고 집안현(輯安縣)에서 밀정 홍종흡 사살 및 항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참의부 중대장으로서 국내에 진입하여 적과 수차 교전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음력 11월에는 평북 강계 지방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동년 4월 23일 평양형무소에서 3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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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3.1운동기념비
1919년 파주시 3·1운동 발상지인 광탄면에서 심상각, 김웅권의 주도로 1919년 3월 27일 봉일천 장날 19인의 동지회원이 앞장서 광탄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행진을 하였으며, 조리, 아동, 월롱, 광탄, 교하 등지에서 모여든 5천여 군중과 함께 조리읍사무소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습격하였다. 이에 당황한 왜경의 무차별적인 발포로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선열의 위훈을 받들고 3.1운동 정신을 이어받고자 파주군민들의 성금을 모아 1978년 3월 1일 기념비를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