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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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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민 묘
남동민(1896~1974)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 광탄면(廣灘面) 발랑리(發郞里)에서 조무쇠, 이인옥, 이기하, 정갑석 등과 함께 같은 마을에 사는 주민 수백명을 규합하여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어 이튿날인 3월 28일에도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조리면(條理面) 봉일천리(奉日川里) 장터까지 시위행진하고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규모의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혔다. 같은 해 6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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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항일독립운동기념비
1919년 3월 광탄면 발랑리에 본부를 두고 마을주민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정시화 등 9명이 사전에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마침내 1919년 3월 27일, 인근 동네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으며, 다음날 28일에도 광탄면 주민 1천여 명과 봉일천 공릉장으로 행진하여 그곳의 군중과 함께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파주시 항일독립운동기념비는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6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으로, 파주 출신 독립운동가 107명의 이름이 명각되어 있으며, 파주독립광탄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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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마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는 파주 3·1운동 만세시위의 근거지로, 마을주민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정시화 등 9명은 사전에 고양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는데, 1919년 3월 27일 인근 동네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으며, 다음날 28일에도 광탄면 주민 1천여 명과 봉일천 공릉장으로 행진하여 그곳의 군중과 함께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2012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마을의 소중한 역사를 계승, 발전시키고자 「발랑리 태극기 마을」을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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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랑리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
파주시 광탄면 발랑리는 파주 3·1운동 만세시위의 근거지로, 이곳 출신 애국지사 9명은 사전에 고양 일부까지 포함한 대규모 시위를 계획 후, 1919년 3월 27일 인근 동네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했으며, 다음날 28일에도 광탄면 주민 1천여 명과 봉일천 공릉장으로 행진하여 그곳의 군중과 함께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파주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한 발랑리 출신의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정시화 등 9명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발랑리 노인회에서 2021년 3월 27일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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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식 묘
김화식(1866~1943)은 충남 보령(保寧) 출신이며,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으로 국내와 만주에서 활약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까지 강행되자 1896년 제천의 호좌의진인 유인석 의진에 가담하여 주로 유인석 의병장을 수행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후 국내에서의 항전이 불가능하게 되자 사환·통사 5, 6명과 함께 유인석의 요동행을 수행하였다. 만주에서 그는 국내와의 연계를 통해 다시 의병을 재기할 것을 유인석에게 건의하였고, 그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국내에 돌아왔다. 국내에 돌아온 그는 유인석의 제자들과 협의하여 의병봉기를 모색하는 한편, 호좌의진 의병 대장 유인석의 의병 활동 관련 자료(서간문, 포고문, 논설 등)를 모은 책인 『소의신편(昭義新編)』을 간행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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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3.1운동발상비
1919년 파주시 3·1운동 발상지인 이곳 광탄면에서는 심상각, 김웅권의 주동으로 1919년 3월 27일 봉일천 장날 19인 동지회원이 앞장서 광탄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행진을 하여 조리, 아동, 월롱, 광탄, 교하 등지에서 모여든 5천여 군중과 함께 조리읍사무소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 습격하였으며, 당황한 왜경의 무차별적인 발포로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파주 3·1운동 발상비』는 일제강점기 당시 파주 3.1운동의 발상지인 광탄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광탄면 선열의 유지를 받들어 3.1운동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1978년 3월 1일 광탄중학교에 설립한 것으로, 1995년 11월 30일 광탄면사무소로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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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탄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광탄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는 파주군 광탄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했던 곳이다. 1919년 3월 27일에 광탄면 발랑리 출신의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정갑석,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 등은 인근 주민 수백 명과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다음날인 28일에는 주민 1,000여 명과 함께 조리면 봉일천리(奉日川里) 시장으로 행진하였으며, 이때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다. 주도자였던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정천화, 이기하, 정봉화, 강흥문은 체포되어 모두 징역 8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천화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1919년 12월 13일 옥중 순국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기리고자 본 안내판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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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각 집 터
심상각(1888~1963)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3·1운동 때 파주군의 주동자로 활약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계획,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파주(南坡州) 경찰 주재소가 있는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시위행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된 후 귀국하여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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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각 표창장, 훈장증
심상각(1888~1963)은 경기도 파주 사람으로, 3·1운동 때 파주군의 주동자로 활약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계획,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파주(南坡州) 경찰 주재소가 있는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시위행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된 후 귀국하여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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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묘
장준하(1915~1975)는 평북 삭주(朔州) 사람이다. 서주(徐州)지구에서 일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김준엽(金俊燁)·홍기화(洪基華) 등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10월말까지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분교 간부훈련단에 병설로 설치된 한국광복군 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고 광복군 제2지대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한광반 훈련 당시 여가를 이용한 과외 활동으로 김준엽(金俊燁)과 함께 교양과 선전을 위한 잡지인 "등불"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광복군의 존재를 중국인들에게 알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 정보·파괴반에 배속되어 훈련을 받고 국내 침투공작을 벌이기 위해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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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각 묘
심상각(1888~1963)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3·1운동 때 파주군의 주동자로 활약하였고, 그 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여 군 전체가 봉기할 것을 계획,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그 여세를 몰아 남파주(南坡州) 경찰 주재소가 있는 봉일천리(奉日川里)까지 시위행진하여 만세를 불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약 10년간 활동하다가, 광복된 후 귀국하여 광탄보통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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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진 묘
정태진(1904~1952)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 전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41년 6월 조선어학회 〈조선말큰사전〉 편찬원이 되었고, 1942년 9월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을 맞아 출옥 후, 1945년 8월 조선어학회를 다시 조직하여 〈큰사전〉 편찬을 계속하였으며 대학에서 국어학을 강의하였다. 1952년 〈우리말 큰사전〉 속간을 위해 서울에서 편찬사업에 진력하다가 귀향 도중 교통사고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