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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순 순국추모비
임형순(1871 - 1908)은 조선 후기 항일 의병장으로 1907년 7월에 이천창의소를 결성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이천을 중심으로 여주·광주·양평·용인·안성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십 차례 전투를 하였다. 그 뒤 본거지를 이천과 광주의 접경인 원적산에 두고 양평과 광주를 연계 교차하면서, 이천·광주·양평·여주 등지를 유격전으로 수시로 습격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하였다. 수많은 항전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그였지만, 계속된 일본군의 토벌전에 밀려 제천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908년 5월 안동전투에서 교전하다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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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기념비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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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둔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신둔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4월 1일 이천군 신둔면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벌인 곳이다. 이천군 신둔면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수광리에 위치한 신둔면사무소 앞에서 일어났다. 이천군 신둔면 수하리에 살던 서기창, 이상혁 등이 주도한 신둔면 만세시위는 3월 31일 같은 마을에 사는 김명규의 집에서 거사 준비모임을 갖고, 김영익이 거사의 취지와 장소를 알리는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같은날 집집마다 이를 회람시켰다. 4월 1일 신둔면사무소 앞에 약 5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들자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기창이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행렬은 이천읍내로 향하였는데 군중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나, 이천 주둔병이 총칼로 강력히 제지하여 모두 해산되었다. 이날 밤에는 신둔면·모가면·백사면·대월면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계속했으며, 이것이 마침내 이천군내 연합시위로 전개되었다. 서기창(1893~1930), 이상혁(1893~1921), 김영익(1885~1934)은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이천군 신둔면 수하리에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신둔면사무소 앞에서 많은 주민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5월 8일에 서기창과 이상혁은 징역 1년형을, 김영익은 태 90도를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에 서기창과 이상혁에게 추서했다. 또한 대통령표창을 1986년 서기창과 이상혁에게, 2011년에는 김영익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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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 신둔면의거기념비
이천군 신둔면 만세시위는 1919년 4월 1일 수광리에 위치한 신둔면사무소 앞에서 일어났다. 서기창·이상혁은 3월 31일 김명규의 집에서 거사 준비모임을 갖고, 김영익이 거사의 취지와 장소를 알리는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집집마다 이를 회람시켰다. 4월 1일 신둔면사무소 앞에 5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들자 이상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서기창이 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행렬은 이천 읍내로 향하였는데 군중이 수천 명에 이르렀으나, 이천 주둔병이 총칼로 강력히 제지하여 모두 해산되었으나 그날 밤 신둔면·모가면·백사면·대월면에서 봉화를 올리며 시위를 계속했다. 당시 운동을 주도한 서기창·이상혁·김영익·이치조·송면호·권중효·김순철 등 7명이 체포되어 고문과 옥고로 순국하였다. 이천 신둔면 지역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한 7명의 공적과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1985년 4월 2일 신둔면 한천회에서 본 비를 건립하였으며, 신둔체육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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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기 추모비
김봉기(1865~1908) 의병장은 1907년 들어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마저 해산되어 국권상실의 위기에 빠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다시 일어난 정미의병기에 의병 봉기의 뜻을 세우고 1907년 7월 초순 포수 32명을 모아 의병부대를 편성하고 총대장이 되어 의병들을 이끌고 이천읍을 습격하여 일본 기병대와 접전을 벌였다. 그 후 새로 가담해온 의병들의 수가 점점 불어나서 광주·양근·지평·여주·이천 지역을 누비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많은 전과를 세웠다. 그러나 전직 한국군 정위였던 홍병수의 꾐에 넘어가 홍세영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08년 3월 13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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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병전적비
이천의병전적비는 1896년 1월 18일 이천 옛 백현(신둔면 넋고개)에서 이천수창의소 의병들이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을 맞선 백현전투의 승리와 이천 의병들의 구국정신을 기리고,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치다 전사한 의병열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88년에 건립되었다. 넋고개 백현전투는 동학농민운동 이후 구한말 최초의 항일 의병운동으로 역사적 의미가 큰 을미의병의 최초의 승전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천의병은 1896년 1월 17일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병진을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총대장은 민승천이 되어 구연영, 조성학, 김태원 등이 삼기구 대법(1기를 각 3대로 나누어 편성)에 따라 부대를 편성하였고, 옛 백현(신둔면 넋고개)에서 일본군 180여 명과의 전투에서 144명을 전사시키는 대승리를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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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조 집 터
김원조(1884~1922)는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대한군정부 부원으로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한 인물이다. 이천 지역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군정부에 가입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 연락기관 설치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서울로 돌아왔다. 1920년 1월 2일에 낙원동 부호 신완식에게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같은 달 25일에는 조정윤의 집을 습격하는 등 모금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2월 28일에 고향인 이천군 율면 총곡리에서 은신하던 중 독립단 사건의 주모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다.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고문 후유증으로 1922년 4월 15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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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소년단 독립운동기념비
일제강점기 1939년 장호원제일심상소학교(현 장호원초)에 다니는 14명의 학생들은 항일 독립운동단체 「독수리소년단」을 결성하였고, 단장 박영순을 위시해 김순철·이상진·조태옥·박기순·박기하·백운호·오기환·박승연·곽태현·이상한·이범상·박정순·김만식 등 어린 학생들은 장차 독립군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단체를 조직화하였다. 단체 결성 3년째인 1942년 2월 하순 읍내 전봇대와 시내버스 창틀에 “일본은 패망하니 조선 민족은 그들에게 협조하지 말 것”과 “조선 민족 단결로 자주독립을 이루자”는 내용의 벽보를 붙이고 이 유인물을 전국 각지의 현직 군수들에게 우송하였다. 이 일로 단원 14명은 3월 전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하고 어린 단원들은 사흘 만에 풀려났으나 주범으로 간주된 단원들은 형사처분을 받았다. 단장인 박영순은 형을 선고받고 긴 세월 옥살이를 했고 박승연·박기순·이상진·곽태현 등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일찍 마감했다. 어린 나이에 항일 벽보를 붙이는 등 독립운동을 펼친 이천 장호원 초등학생 독립운동 단체 「독수리소년단(荒鷲少年團)」을 기념하기 위해 해방 후 76년만인 2021년 12월 18일에 이천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 독수리소년단 독립운동기념비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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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족산 3.1운동 만세 시위지
백족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이천군 주민 1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이천군 청미면(현 장호원읍) 주민들은 1919년 4월 4일 밤에 백족산 정상에 올라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이때 인근 여러 면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연합시위를 펼쳤으며 시위에 참여한 군중은 1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군경은 사방에서 발포하여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주민들은 산 위에서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의 집요한 발포로 백족산 시위대와 인근에서 연합시위를 벌이던 주민들은 결국 해산하였으며 사상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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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흥 동상
이수흥(1905~1929)은 1905년 9월 11일 경기 이천에서 태어나 이천 공립보통학교 수학 후, 한때 입산하여 승려생활을 하다가 1923년 19세 때 만주로 망명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국내로 들어와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자격으로 황해도 평산을 거쳐 경성에 잠입한 후 동소문파출소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이고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안성 부호의 아들을 처단하였으며 이천 현방경찰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투쟁을 이어나갔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된 후,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고,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1929년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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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택수 추모비
유택수는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으로, 동생 유남수와 함께 참의부(參議府) 국내 특파원 이수흥(李壽興)을 도와 무장항일 활동을 하였다. 1926년 5월 이수흥이 일 요인암살 및 군자금 모집 등을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오자, 동소문파출소 습격 2개월 후인 동년 9월 10일 이수흥을 도와 경기도 안성에서 부호 박승륙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다가 박승륙이 불응하자 그의 아들 박태병 등을 사살하였다. 10월 20일에 이수흥이 이천의 현방리(玄方里) 주재소 등을 습격한 뒤에는 동생과 함께 그를 도피시켜 주었으며, 10월 25일에 그는 서울 수은동(授恩洞) 전당포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다가 주인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6년 11월 마침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28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택수의 애국애족의 거룩한 혼을 영원히 기리고 계승하고자 1984년 11월에 추모비를 세웠으며 이수흥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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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순국기념비
구연영(1864~1907)은 경기 광주(廣州) 사람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한때 정부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그 후 일제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 일제를 이땅에서 구축하기 위해 1895년 12월 31일 김하락(金河洛)·조성학(趙性學)·김태원(金泰元) 등과 함께 거의(擧義)하여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다. 구연영이 양근(陽根)·지평(砥平)에서 300여명, 조성학이 광주산성에서 300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였으며 인근 지역의 민중들이 이에 자발적으로 호응하여 농민과 관포수(官砲手)를 중심으로 900여명의 군사를 규합하였다. 따라서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었으며, 전투적이고 대규모적인 조직편제를 갖추었는데 창의대장에 민승천(閔承天), 각군도지휘(各軍都指揮)에 김하락이 선임되었고 그는 중군장(中軍將)을 맡았다. 동 의진은 1896년 1월 백현(魄峴)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백현전투는 을미의병사상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을 뿐 아니라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쾌거였다. 이어 2월 이현(梨峴)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폈으며 전열을 재정비하여 2천여 명으로 군세(軍勢)를 증강한 후 심진원(沈鎭元)의 광주의진(廣州義陣),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陽根義陣)과 함께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형성하여 남한산성을 공략, 입성하였다. 이들은 산성을 방어하는 한편 서울진공을 통해 일제를 구축키로 하고 이를 위해 우선 수원(水原)을 점령하고 주변의 의진과 연합하여 서울진공계획을 추진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관군의 공격으로 1896년 3월 남한산성이 함락됨으로 인해 계획이 좌절되었다. 이에 따라 동 의진은 경북 의성(義城)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그는 동년 4월 의진과 결별하고 이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장춘명(張春明)·한창섭(韓昌燮)·차화춘(車化春) 등 수십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신도대회를 통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을 폈다. 또한 이천·여주(驪州)·광주(廣州) 일대를 순회하며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