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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성 묘
최윤성(1893 - 1945)은 황해도 봉산(鳳山) 사람으로, 1919년 3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 독립선언서 1,000여 매를 인쇄하여 배부하고 피신하였다고 한다. 1920년 1월 황해도 평산군에서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의 목적하에 등사기로 군사공채모집 취지서와 통지서 60여 부 작성 및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0년 4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11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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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활동지 굴암사(용덕사)
이곳은 구한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항쟁과 일제강점기 3.1만세독립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굴암사로도 불리운다. 옥여 임경재(任璟宰, 미상~1907) 의병장은 1907년 고종황제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의 정국을 개탄하고 동년 7월, 당시 이천군 신면(新面,) 남정동(南井洞)의 이근풍의 집에서 주창용, 신규희, 조상현 등과 봉기할 것을 결의하여 포군 32명을 모집하고 의병대를 편제했다. 광주군 되고개에 이르러 김봉기를 대장으로 하여 장두지(獐頭地:또는 노루목)에서 일본 기병대를 격퇴하였다. 이어 이천, 광주, 용인, 죽산 등지를 전전하면서 크게 위세를 떨쳤다. 이천읍 우편소와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고, 용인의 굴암사(현 용덕사)에서 일본 토벌대와 교전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용인 최초의 3.1운동은 원삼면 좌전고개에서 시작되었다. 좌항일, 가좌리, 사암리, 맹리, 문촌리 등지의 면사무소에 집결한 주민 수백 명은 백암으로 이동하다가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해산되었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특히 3월 23일 용덕사 승려들은 독립선언서를 마을에 배포,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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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100년전 1919년 용인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3·1운동을 전개했다. 3월 21일 원삼면 좌항리를 시작으로 용인시 곳곳에서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일어난 만세운동은 원삼면· 이동면· 모현면· 내사면· 수지면· 읍삼면· 기흥면· 외사면· 남사면· 수여면 등 용인 전 지역에서, 주민· 학생· 스님· 기독교인· 천도교인 등 직업,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나서서 일으킨 운동이었다. 이때 참가한 인원은 1만32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이동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이동면 주민 2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1일에 용인군 송전리 삼거리에 있는 이동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놀란 송전리 주재 헌병들이 출동하자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현재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송전리 이동파출소 앞 게시판 옆에 이 운동을 기념하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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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이한응 묘)
이한응(1874 - 1905)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대한제국기 한성부주사,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순국지사이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 졸업 후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있는 동안 대한제국의 위상을 고양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후에 국내에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조병세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원통함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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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숙 집
정현숙(이명 정정산)(1900 - 1992)은 결혼 후 부군인 오광선을 따라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오광선이 신흥무관학교와 한국독립군 등에서 대일 항전을 벌일 때 정현숙은 독립군 활동을 배후에서 도왔으며, 1936년 부군이 피체된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요인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한국여성동맹 맹원으로도 활동하며 오희영·희옥 두 딸을 광복군으로 길러낸 여성독립운동가의 전형을 보여준 정현숙은 오인수 의병장으로부터 시작된 「용인 3대 독립운동가문」 일원으로 만족과 향토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95년 정부에서는 정현숙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2020년 4월에는 오광선과 함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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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엽 묘
홍종엽(1899 - 1983)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형 홍종욱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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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홍종엽 집
1919년 3월 28일 홍종욱(1892 - 1968)·홍종엽(1899 - 1983) 형제는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두 형제는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두 형제는 권종목과 더불어 포곡면 만세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각각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았다. 홍종욱(1892 - 1968)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동생 홍종엽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해 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시위 행진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홍종엽(1899 - 1983)은 1919년 3월 28일 권종목(權鍾穆) 등과 주동이 되어 동리 사람 200여 명과 함께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삼계리(三溪里)를 거쳐 만세 시위 행진을 벌였다. 이 때 형 홍종욱과 함께 권종목으로부터 태극기를 전달받아 시위 대열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김량장리(金良場里)까지 행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징역 10월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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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목 묘
권종목(1886 - 1959)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蒲谷面)에서 삼계리 주민 2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가 이끄는 시위대는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금어리(金魚里)로 진출하여 200여 명의 시위대와 합류하여 연합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둔전리를 거쳐 대대리에 이르기까지 행진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에 붙잡혀 그 해 5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받았으며, 그는 곧바로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기각되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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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천리3.1운동 만세시위지
고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의왕면 고천리 주민 800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던 곳이다. 광주군 의왕면 고천리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31일 밤 고천리에서 800여 주민이 만세시위를 펼치면서 시작되었다. 의왕면과 인근 주민은 지지대 고개에서 횃불을 높이 들어 올리고 만세를 높이 부르며 의왕면사무소와 경찰 주재소를 둘러싸고 만세를 외쳤다. 일제 경찰은 군대를 불러 시위대를 해산시켰으며 이날 2명이 총상을 입고 46명의 주민이 체포되어 즉결 태형을 맞았는데 걷지 못할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고 한다. 시위에 참여했던 인물로는 이봉근·성주복(1894-1971)·이복길 등이 있다. 성주복(1894~1971)은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일원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3월 5일 오전 8시경, 남대문역 앞에는 학생들의 주도로 수많은 시위군중이 모였다. 주도자인 강기덕과 김원벽은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을 크게 쓴 깃발을 휘두르며 달려와 제2회 시위운동을 벌일 것을 선포하였다. 시위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면서 선두에 선 강기덕과 김원벽 등의 지휘에 따라 남대문으로 향하였다. 남대문에 이르렀을 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주도자를 검거하자, 시위대는 일경의 제지를 피하여 1대는 남대문시장으로부터 조선은행 앞을 거쳐 보신각으로 향하고, 1대는 남대문에서 대한문 앞과 무교정을 지나 종로 보신각 앞에서 시위대와 합류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벌였다. 당시 성주복은 배재고보 4학년으로서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남대문역 일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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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복 묘
성주복(1894 - 1971)은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일원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는데, 당시 배재고보 4학년으로서 시위대열에 참가하여 남대문역 일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1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05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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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승 집 터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박사(1896 - 1989)는 1932년 조선어학회 간사였고,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으로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서울시 교육위원회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에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71년에는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장을 역임하였다. 주요 학술 저서로는 역대 조선문학정화국어학논고, 국문학연구초, 국어학개설 등이 있고, 시집으로는 박꽃, 심장의 파편 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벙어리 냉가슴, 딸깍발이 등 다수가 있다. 또한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란 요약 자서전이 있다. 1948년에 역대국문학전집, 1981년에 국어대사전을 편저했다. 이희승 박사는 1989년 작고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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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리3.1운동 만세시위지
금오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양주군 시둔면(현 의정부시)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5일에 윤원세와 이윤의 등은 금오리를 중심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금오리 사거리에서 군청과 면사무소 등이 있는 의정부리로 행진하려고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로 해산되었다. 이후 윤원세는 1936년에 전국멸왜기도집회에서 독립 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1938년 4월에 황해도 신천에서 열린 천도교 특별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받고 4월 25일에 귀가하였으나, 후유증으로 5월 2일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원세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