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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삼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원삼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 주민들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1919년 3월 21일 새벽 좌전고개를 출발한 시위대는 좌항리와 사암리를 거쳐 원삼면사무소에 이르렀다. 면사무소에 이르자 면사무소 주변의 고당리와 문촌리 주민이 합세하였다. 김영달·김성남·이용환 등은 중간에 합류한 황경준·김은수·최상근·안명옥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며 만세를 외쳤다. 한편 이은표와 이인하 등은 시위 과정에서 주민들에게 전날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시위대는 이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후 외사면 백암리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원삼면과 외사면 경계인 비둘기고개에서 일제 경찰의 발포로 해산당하였고, 황경준·김은수·최상근·김성남·안명옥 등은 해산 후 각자의 마을에서 체포되었다. 김성남(1897~1953), 김영달(1901~1967), 김은수(1884~1960), 안명옥(1882~1943), 이용환(1880~1919), 이은표(1897~1974), 최상근(1891~1943), 황경준(1883~1940)은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많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주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들은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산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경과 헌병의 무차별 총격에도 굴하지 않은 채 시위를 이어나갔다. 이해 5월 9일 김성남, 김영달, 이용환은 징역 6월형을, 김은수, 이은표, 최상근, 황경준, 안명옥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에 김은수, 이용환, 이은표, 최상근에게, 1992년에 황경준에게 추서했다. 또한 대통령표창을 1992년에 김성남, 김영달에게, 건국포장을 2006년에 안명옥에게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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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면영 묘
유면영(1873 - 1931)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五浦面 陽伐里)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오포면사무소 앞에서 단독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주민 600여 명이 모여들었으며, 군중들을 이끌고 광주군청(廣州郡廳)으로 시위 행진하였다. 군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이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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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면영 추모비
유면영(1873 - 1931)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五浦面 陽伐里)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오포면사무소 앞에서 단독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주민 600여 명이 모여들었으며, 군중들을 이끌고 광주군청(廣州郡廳)으로 시위 행진하였다. 군청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이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5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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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성낙중 묘)
성낙중(1894 - 1919) 선생은 1919년 용인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성낙중 선생은 원삼면 사암리와 맹리 주민 등 약 300여 명과 함께 백암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는 선두에 서 있었다. 전날 면사무소가 습격당해 격양된 일제 헌병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이에 성낙중 선생은 쏟아지는 총알에 순국하셨다. 그의 행적은 오랫동안 묻혀있었지만 2013년 우연히 발견된 『3.1운동 시 피살자 630명 명단』을 통해 발굴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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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3.1만세운동기념탑
용인3.1운동기념탑은 용인시 전역에서 일어난 1919년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요청으로 용인시가 2011년 4월에 건립한 것이다. 「숭고한 빛」을 주제로 한 스테인리스 재질의 주탑은 LED 조명을 설치해 영원히 타오르는 횃불을 상징하고 있으며, 기념탑의 바닥에는 태극기의 건곤감리가 바닥에 새겨져 있어 마치 태극기를 바닥에 펼쳐놓은 모습이다. 횃불과 태극기를 형상화하여 민족의 기상을 표현하였다. 3.1 만세운동 기념탑 좌우에는 독립만세를 부르는 화강석 군상 조형물이 배치되어 주탑을 중심으로 바닥에 놓여있는 태극기를 두고 만세운동을 펼치는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기념탑 전면 옹벽에 부착된 석면에 용인의 3.1운동 내역과 피체되어 고초를 겪은 분들의 명단을 음각으로 새겨 넣었다. 반대편에는 건립 취지문과 기념탑 건립현황을 석면에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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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수 3대 독립항쟁기적비
의병장 해주오공인수 3대 독립항쟁 기적비는 오인수(1868 - 1935) 의병장과 아들 오광선 장군 그리고 손녀 오희영과 오희옥, 3대에 걸친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기념하여 광복 63주년을 맞아 2003년 11월 17일에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 어현마을 입구에 해주오씨 호군공파 용인 원삼면대종회에서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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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악학교 터
삼악학교 터는 여준이 인재 양성을 위해 고향에 설립한 삼악학교가 있던 곳이다. 삼악학교는 여준에 의해 1908년 9월 원삼면 능촌리에 세워졌다. 여준은 가족과 형이 살고 있는 능촌리를 방문하여 외가측 친척인 오태선, 오용근 등과 학교 설립을 협의하였다. 설립준비과정에서 학교 건물이 없어 난관에 부딪혔으나, 오항선이 자기 집을 기부하면서 삼악학교를 건설하게 되었다. 삼악은 쌍령산·구봉산·문수산에 둘러싸인 곳에 세워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여준(1862 - 1932)의 본명은 여조현(呂祖鉉)으로 롱징(龍井) 서전서숙에서 교육활동을 하였다. 신민회에 가입하면서 이승훈과 함께 1907년 12월 오산학교 설립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상동청년학원에 잠시 파견되었는데, 이 시기 자신의 고향에서도 인재를 양성하고자 삼악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던 오광선은 이 학교를 졸업한 후 여준의 추천으로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장지영에게 교육을 받았다. 구국모험단·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최초의 모스크바 비행학교 유학생이었던 김공집 역시 삼악학교에서 1913년부터 1년간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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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원 의병 교전지
정주원(1870~1925)은 경기도 죽산 출신이다.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한국군마저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그저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주원은 8월에 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하사리에서 자진하여 의병에 투신하여 30여 명의 동지를 이끌고 양지·양성군을 중심으로 의병 모집에 힘썼고 동지 150여 명을 규합할 수 있었다. 아울러 총기·탄약 등 무장을 갖추고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각 부서를 정하고 거병하였다. 9월 이후 죽산·양지 등지에서 의병장 임옥녀 부대와 합진하고 의병 모집활동을 전개하여 부하 9백 여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정주원은 전 부대를 3부대로 나누어 자신은 그 중 1부대를 인솔하고 수원군 수하 방면에 출동하여 수원·안성·양지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나머지 2부대는 양지·죽산의 경계에 배치하여 활약하도록 하였다. 1908년 1월 의병 50명을 인솔하고 당진 주재소를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2월에 다시 안성·양지·죽산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죽산군 능촌에서 일본군 15명과 교전하였다. 4월 양지군 사동에서 적과 접전하였으며, 용인군 요봉골에서 적과 교전 끝에 부상자 1명을 내었다. 1908년 7월 19일 오전 8시경 충청도 해미군 적서촌에서 일본군에게 발각되어 추격 당하던 끝에 체포되고 말았다. 9월 29일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11월 24일 종신유형으로 감형되어 충남 당진에서 은둔하다가 1925년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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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희옥 집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출신 오희옥(비공개 - 생존)의 집안은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 명문가」로, 할아버지는 오인수 의병장, 아버지는 오광선 광복군 장군, 어머니 정현숙과 언니 오희영은 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만주에서 태어난 오희옥은 언니 오희영과 함께 1934년 중국 류저우(柳州)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첩보 수집을 하고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등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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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선 집(용인독립운동유적)
오의선(1889 - 1931)은 1889년 태어나 메이지(明治) 대학 중 1919년 2월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향리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이 독립자금 모금을 한 흥화실업은행의 주식 모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 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으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가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후 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1년 3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5월 6일 옥사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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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선 집 터
오광선(1896 - 1967)은 1896년 죽능리 어현에서 정철화 의병의 중군장으로 활약한 오인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만주로 건너가 1918년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교관과 서로군정서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청산리대첩 후에는 대한독립군단에서 활동을 했으며 자유시 참변 후에는 이청천 장군과 함께 한국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김구의 주도하에 중국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별반 교도관으로 역임했다. 1940년 1월 베이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광복군 국내지대장으로 활동했다. 1967년 5월 작고하였다. 1962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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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묘
김석진(1847 - 1910)이 안장된 묘역이다. 1905년 11월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등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 반대투쟁과 파기운동을 벌이다 자결·순국하자 김석진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하여, 1906년 1월 22일 상소를 올려 을사5적 처단과 협박에 의한 을사늑약을 공법상 무효임을 주장하였다. 이어 매국노들과 같이 하늘로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하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열에 설 수 없다는 소를 올리고 의효전향관 자리를 물러났다. 1910년 한일병탄 후 일제가 남작의 작위로써 그를 회유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울분을 참지 못하고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현 서울시 번동의 창녕위궁 재사(昌寧尉宮 齋舍)에서 순국·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