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93건
-
김윤식 묘
김윤식(1902 - 1950)은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고향 강진으로 내려가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준비 계획하다가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불복하고 공소(控所) 제기하여 무죄(無罪)를 선고받았으나 검사 측의 상고(上告) 제기 등을 거쳐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201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하희옥 묘
하희옥(1890 - 1978)은 1914년부터 1945년까지 미주 대한인국민회 아크론지방회, 뉴욕지방회, 시카고지방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4년 8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 회원, 1917년 9월 대한인국민회 은행채 보상 발기자로 활동하고, 1918년 10월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식자기계 청장을 위해 동맹자를 모집하였으며, 1919년 1월 15일 오하이오주 아크론 지방회 설립 발기인 및 구제원, 1921년 뉴욕지방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1924년 12월 복설(復設)된 시카고지방회의 재무·부회장 등으로 1945년까지 활동하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우자옥 묘
우자옥(1911 - 1966)은 함경북도 명천 출신으로, 1930년 1월 중순 함북 경성공립고등보통학교(鏡城公立高等普通學校) 2학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했는데, 격문과 깃발을 제작하는 한편 학생들을 독려하며 가두시위에 앞장서 거사일인 1월 25일에 2학년생 40여 명을 선발대로 이끌고 경성(鏡城) 서문 밖에 집합하여 동교생 300여 명과 함께 가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들 시위대는 인근의 경성공립농업학교까지 행진하여 농업학교 학생들의 시위 참가를 촉구하는 한편 태극기를 건네준 뒤, 도처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를 제지하는 일경에 의해 시위대가 해산되고 시위의 앞장에 섰던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 일로 1930년 3월 6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7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외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외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용인군 외사면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1919년 3월 31일 백암리를 비롯한 외사면 주민 3천여 명이 외사면사무소를 습격한 후, 헌병주재소까지 마저 습격하자 일제 헌병이 출동하여 발포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때 주민 1명이 죽고 여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백암리에서는 이외에도 4월 2일에 주민 5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했지만 해산당했고, 3일에도 시위운동을 벌이려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 못하는 등 3·1운동의 열기가 계속되었다.
-
백암장터 경기지역 의병 활동지
백암장터 경기 지역 의병 활동지는 1907년 전후 경기지역 의병이 주로 활동했던 곳이다. 1906년 음력 2월 16일 죽산군수 남정면은 3~40명의 의병이 백암장으로 몰려온다며 군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 의병이 다시 나타나 장터에서 2,000냥을 빼앗아 달아나기도 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 직후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면서 경기지역 의병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1907년 8월 12일 백암장에 전주의병이라 칭하는 50여 명의 의병이 나타나 일본인 1명을 총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9월 21일 일본군 나카하라(中原) 소대가 장호원에서 백암장으로 옮겨와 주둔하였다. 또한, 9월 13일 임옥여 의병이 백암장에 집결해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사 각 1명씩을 총살하고 한국인 순사 1명을 생매장하였다. 1909년에도 5월 12일과 7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의병이 백암장에 출몰한 사실이 있었다. 백암장은 용인-이천과 죽산-안성 등지를 연결하는 주요 길목이었기 때문에, 경기지역 의병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것이다. 임옥여(1871~1907)는 경기도 용인 사람이다. 1907년 8월 이천창의소의 좌장이 되어 21일과 30일에 이천주재 일군 기병과 교전을 벌였으며 포군 12명을 인솔하고 광주군 실촌면에 이르러 다시 포군 70여명을 모집한 뒤 용인 굴암에서 일군과 접전을 벌였다. 같은 해 9월 14일에는 포군 18명을 인솔하여 양근, 안성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포군 36명을 인솔하고 죽산군 원일면으로 가 고초곡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어 11월에는 광주군 상림의 길가에서 4명, 백암 장터에서 1명 등의 일진회원(一進會員)을 총살하였고, 또 죽산군 백암에서 순사와 순검 각 1명을 총살하는 등의 활동도 벌였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10일 자택에서 일군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총살당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의병공격대상지(송병준 별장)
용인지역 의병 공격 대상지는 1907년 용인지역 의병이 일본군과 일진회원 등을 처단하기 위해 공격했던 곳이다. 송병준의 별저는 일진회원들의 집합소였다. 송병준은 을사오적 가운데 한 명이자, 일진회장을 역임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이런 까닭에 송병준의 별저는 용인지역 의병의 주요 공격대상지가 되었다. 1907년 8월 24일 양지군에서 용인지역 의병과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다. 이때 의병의 공격에 패한 일본군은 송병준의 별저로 도주하였고, 일제는 송병준의 별저에 수 십명의 일본인 순사를 배치해 용인지역 의병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런 사실은 용인지역 의병이 당시 괄목할만한 활약을 펼쳤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송병준의 별저는 당시 양지군의 대표적인 친일세력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용인지역 의병의 주요 공격대상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
강종근 순교기념비
강종근(1901 - 1942)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혹독한 고문으로 순교자가 된 첫 번째 목회자이다. 1930년 협성신학교 졸업 후 1937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 연천군 연천면에 있는 연천교회에서 근무하며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는 설교를 하였고, 1938년 5월 목사가 되어 강원도 금화군 창도면 창도교회(昌道敎會)로 옮겨서도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1940년 6월 철원 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 중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붙잡혀서 1941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2년 6월 고문으로 인한 신병의 악화로 순국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박관준 순교추모비
박관준(1874 - 1945)은 평안남도 개천(价川) 사람으로, 기독교의 장로였으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였다. 1938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의회에서 「동아대국교개종헌의서(東亞大國敎改宗獻議書)」를 살포하다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후에도 신사참배 거부와 신앙의 자유를 위한 운동을 벌였으며,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예심중에 병이 사경(死境)에 이르자 병보석되었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45년 2월 15일 별세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주기철 어록비
주기철(1897 - 1944) 목사는 일제 강점기 마산 문창 교회와 평양 산정현 교회를 담임했던 목회자이자 순교자이며 민족 운동가로, 장로교 목사로 마산 문창 교회에서 목회하는 등 목회자로 살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 정책에 반대하고 싸웠던 민족 운동가였다. 일제는 전쟁 정책 수행을 위한 소위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운동의 일환으로 1935년부터 신사 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였는데, 그는 신사 참배 강요는 기독교 신앙에 위배된다고 보아 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저항하였으며, 이 일로 평양 산정현 교회 시무 때인 1938년 2월 이후 네 차례 투옥되는 등 일제의 강요에 맞서 투쟁하였다. 네 번째로 투옥된 지 3년 8개월이 지난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김영학 순교기념비
김영학(1877 - 1932)은 3·1독립운동 당시 양양(襄陽)의 기독교회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동년 10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지부(支部)로서 양양군단(襄陽郡團)을 결성하고 군단장(郡團長)으로 활약하며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국외로 나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 1922년 9월에 노령(露領) 해삼위(海蔘威) 방면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노령 지역에서 선교사업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929년 소련 공산당에 붙잡혀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복역 중 1933년 옥중에서 별세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임옥여 동상
임옥여(1871 - 1907) 의병장은 경기도 용인(龍仁) 사람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농상공부 주사직에 있다가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침략에 항일 투쟁을 결심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정미의병기인 1907년 8월 이천창의소(利川倡義所)의 좌장(左將)이 되어 이천, 용인, 광주, 죽산, 광주 일대에서 혁혁한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07년 11월 10일 자택에서 일군수비대의 습격을 받고 총살당해 순국하고 말았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원삼면 3.1운동 준비지
원삼면 3·1운동 준비지는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의 주동자들이 거사 하루 전에 모여 만세시위계획을 최종 모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한 곳이다. 1919년 3월 15일 용인군 원삼면 좌항리의 황경준, 김영달, 김성남, 이은표, 이용환 등은 서울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은표의 집에 모여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20일 밤에 평창리 도창마을 입구 최상근의 주막에서 최종 모임을 갖고, 만세시위에 쓸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21일이 되자 횃불을 들고 좌전고개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는 한편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알렸다. 이와 같이 최상근 주막터는 원삼면 3·1운동의 책원지였다. 김성남(1897~1953), 김영달(1901~1967), 이용환(1880~1919), 이은표(1897~1974), 최상근(1891~1943), 황경준(1883~1940)은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용인군 원삼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원삼면사무소 앞에서 많은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만세를 며 시위행진을 주동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들은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산면사무소 앞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일경과 헌병의 무차별 총격에도 굴하지 않은 채 시위를 이어나갔다. 이해 5월 9일 김성남, 김영달, 이용환은 징역 6월형을, 이은표, 최상근, 황경준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에 이용환, 이은표, 최상근에게, 1992년에 황경준에게 추서했다. 또한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김성남, 김영달에게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