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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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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내만세운동 표지석(강춘석, 김원배)
강춘석, 김원배 두 분은, 1919년 3월 30일 아침 마을 사람들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동천리(東川里)로 행진하였고, 동천리 주민과 합세해 그 규모는 300여 명에 달했다. 시위행렬은 오전 11시 30분 무렵 풍덕천리(豊德川里)를 거쳐 수지면사무소에 나아가 만세를 불렀으며, 시위 행렬이 읍산면(邑山面) 마북리(麻北里)로 가던 중 일본 헌병과 대치하였고, 헌병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며 2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곳 하손곡 마을의 동천동 362번지에 살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두 분은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4월 28일 용인헌병분대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201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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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내만세운동 표지석(김영석, 윤만쇠, 천산옥)
김영석, 윤만쇠, 천산옥 등 세 분은, 1919년 3월 30일 아침 마을 사람들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동천리(東川里)로 행진하였고, 동천리 주민과 합세해 그 규모는 300여 명에 달했다. 시위행렬은 오전 11시 30분 무렵 풍덕천리(豊德川里)를 거쳐 수지면사무소에 나아가 만세를 불렀으며, 시위 행렬이 읍산면(邑山面) 마북리(麻北里)로 가던 중 일본 헌병과 대치하였고, 헌병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며 2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곳 하손곡 마을의 동천동 339번지에 살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세 분은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4월 28일 용인헌병분대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201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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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내만세운동 표지석(김원배)
김원배(1889 - 미상)는 1919년 3월 30일 아침 마을 사람들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동천리(東川里)로 행진하였고, 동천리 주민과 합세해 그 규모는 300여 명에 달했다. 시위행렬은 오전 11시 30분 무렵 풍덕천리(豊德川里)를 거쳐 수지면사무소에 나아가 만세를 불렀으며, 시위 행렬이 읍산면(邑山面) 마북리(麻北里)로 가던 중 일본 헌병과 대치하였고, 헌병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며 2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곳은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4월 28일 용인헌병분대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201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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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형 묘
범정 장형(1889 - 1964)은 평북 용천 사람으로,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시기에 만주와 경성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한일 강제 병합 이후 만주에서 군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하였고, 치료소와 만선토지개간주식회사, 미곡상과 정미소 등을 운영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임시정부에 조달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단국대학교를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등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장형은 1964년 12월 30일에 서울 내수동 자택에서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단국대학교 한남동 서울캠퍼스 내에 매장되었다가 2007년 단국대학교 캠퍼스가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위치인 단국대학교 죽전캠퍼스 내로 이장되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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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3.1만세운동기념탑
수지 3.1만세운동 기념탑은 300여명의 수지 주민들이 고기리에서 동천리를 거쳐 풍덕천까지 독립만세를 외친 열사들의 수지 항일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기념탑 설계 공모를 통해 선정된 정기웅 작가의 『독립의 메아리는 주탑과 기단에 태극기 형상과 만세를 부르는 민중의 손들을 중첩시킨 단순한 조형미로 3.1저항정신을 명료하게 표현했으며,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후손들과 뜻이 있는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서 2009년 11월 27일에 세웠다. 수지구 풍덕천동에 소재한 새마을 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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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량장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
김량장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김량장공립보통학교는 1916년 개교한 학교로 1919년 3월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바로 첫 졸업식이 치러진 1919년 3월 24일에 만세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1회 졸업생들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3·1운동 소식을 듣고 졸업식이 치러진 1919년 3월 24일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학생들은 일본 천황에 대한 만세삼창 순서가 되자 우리말로 ‘일본 천황 망세(亡歲)’라고 하여 만세가 아닌 망세를 삼창하였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졸업식이 끝난 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두 패로 나누어 만세시위를 벌이며 김량장터로 행진하였다. 학생들이 행진하자 주변에 있던 주민들도 적극 호응하며 시위에 참가하였다. 일제는 기마병을 투입하여 시위를 저지하였고, 결국 시위대는 해산하게 된다. 이날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 중 박용중·송요중·이영환·이원경·차거복·이태원 등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졸업장을 빼앗기고 15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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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항쟁기념탑
3·1운동 당시 용인에서 1만 3,200여 명이 궐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폭압으로 사망 35명, 실종 139명, 상해 502명, 수형 65명 등 741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 밖에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1905년의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용인에서는 관내에서만 58회에 걸쳐 의병들의 항일투쟁이 있었다. 또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일신을 던진 35명의 우국 독립지사들이 있었다. 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1995년 8월 15일에 용인군 독립항쟁기념탑을 건립하였다. 높이 15m이며 화강암으로 조성된 삼각의 받침대 위에 뾰족한 탑을 세웠으며 애국지사들을 표상한 6인의 청동입상이 배치되어 있다. 용인시 처인구 김량장동 326번지 통일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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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유근 묘)
독립운동가 석농 유근(1861 - 12921) 선생은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였으며,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때는 간부로 활동했다.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 관료들을 지면을 통해 비판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장지연이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황성신문의 사장으로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자강회 활동을 하는 한편, 신민회에서 역시 활동했다. 종교계에 있어서도 민족 종교 대종교가 창건되자 이에 간부로 활동하였다. 그는 조선 강제합병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3.1운동 이후 한성정부라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었다. 동아일보가 창간될 때에는 언론계 원로로서 고문으로 추대되는 등 언론 활동을 지속하다가 1921년 서거하였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그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196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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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 추모비
유근(1861 - 1921)은 일제강점기 용인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했다. 1898년 황성신문이 창간할 때 주필,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으며, 특히 시일야방성대곡을 쓰다가 장지연 선생이 격분한 나머지 끝을 맺지 못하자 선생이 후반부를 마무리짓고 신문을 인쇄함으로써 한국언론사에 빛나는 논설의 탄생에 기여했다. 이후 1907년 황성신문 5대 사장으로 취임, 경술국치 직전까지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함양에 노력했다. 1915년 중앙학교장에 취임, 민족경제 자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조직을 지원하다 배후자로 체포돼 곤욕을 치렀으며, 3·1운동 때는 한성정부를 수립하는데 「13도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동아일보 창간을 발의하면서 「동아일보」라는 제호를 짓기도 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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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각 집
남정각(1897 - 1967)은 호는 오산(午山)이며 이명(異名)은 영득(寧得·英得)이다.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출생하였다.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를 중퇴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3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중국청년회(中國靑年會) 어학과를 다니다 중퇴, 창춘[長春]·톈진[天津]·상하이[上海]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 1922년 6월 항일 무력독립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행동대원으로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서울에 있던 김한(金翰)과 폭탄반입을 협의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구하지 못하고, 1923년 2월 권정필(權正弼)·유시태(柳時泰)·유병하(柳秉夏) 등과 자금 마련을 위해 3차례에 걸쳐 서울 내자동(內資洞)의 부호 이인희(李麟熙)에게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다 잠복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4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8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후 1929년 톈진으로 건너가 톈진교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자 교포의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고, 귀국 후에는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에 가입하여 건국사업을 위해 활동하였다. 1967년 1월 29일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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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각 유허비
오산 남정각(1897 - 1967)의 생가 터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장춘·텐진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텐진으로 가 독립운동비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유시대·유병하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서울 이인희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출감 후 다시 텐진으로 망명하여 텐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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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수 묘
정철수(1924 - 1989)는 고려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대종손으로, 보성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중국 산동성 지난에 배치되었지만, 동료 두 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투항한 뒤,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으로 가 조선의용군에 참여하였다. 이 때 이름을 고철로 고친 후, 조선 의용군 등에서 항일 무력 투쟁을 펼쳤다. 해방 이후 지린에서 조선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취임하는 등 조선동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그 후 1983년 한국방송공사(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고국에서 노모가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85년에 아들을 데리고 영구 귀국하였다. 사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