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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삼거리 앞 3.1운동 만세 시위지
수지면 고기리 이장이었던 이덕균은 1919년 3월 28일 안종각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다음날인 3월 29일 100여명의 주민들을 선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동천리를 지나면서 300명의 규모로 커져갔고, 풍덕천 수지면사무소에 다다르자 주변지역 주민들까지 운집하였다. 안종각이 수지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대는 기세를 더욱 떨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최우돌이 보정리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였고, 마북리(삼거리)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계를 치고 있던 일본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시위대를 주도했던 안종각과 최우돌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순국하였다.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덕균 역시 체포되었다. 이덕균(1879~1955)은 경기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으로서 동지 안종각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튿날인 3월 29일 8시경에 동민 100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동천리에서 주민 100여명과 합류하여 동일 오후 2시경까지 수지면 일대를 돌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동년 5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종각(1888~1919)은 경기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 이덕균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튿날인 3월 29일 부락민 10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 진행중에 인근 동천리 주민 100여명과 합세되어 계속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오후 2시경에는 수지면사무소 광장에서 면민 6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런뒤에 기흥면 소재 일본인 마을을 습격코저 행진하던 중에 일군의 무차별한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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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 3.30만세운동 기념표석
이곳은 (구)기흥면사무소 있던 곳으로, 101년 전 지역주민들이 일제로부터 독립과 나라의 주인공임을 선언하며 집결하고자 했던 기흥지역 만세운동의 역사 현장이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기흥 주민들은 공세리 탑안골과 하갈리 개울번던에 모여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오후에는 구성 주민들이 “대한민국만세”를 외치며 신갈리로 향하였다. 『3.30 기흥 만세운동 기념 표석』은 101년 전 용인 기흥지역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흥독립운동 개요와 만세운동 당시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행진했던 「만세길」을 형상화하여, 화강암 재질의 가로 80㎝×세로 130㎝ 크기로 2020년 8월 15일 세웠으며, 신갈동행정복지센터 앞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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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학교(용인독립운동유적지)
명륜학교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1호인 용인향교(일명 구성향교) 내에 설립되었던 용인 최초의 신식학교로 구한말 나라의 위기를 근대교육으로 극복하자는 애국사업의 일환에서 1906년 개교하였다. 명륜학교의 초대 교장은 학부대신을 역임한 이도재(李道宰)로, 당시 명륜학교에서 가르치던 과목은 서당, 또는 향교나 서원에서 행해졌던 전통 한학교과와 역사·과학 등 근대적인 교과가 혼합된 것이었다. 이를 통해 명륜학교가 전통교육 기관에서 근대학교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학교였음을 알 수 있다. 명륜학교의 설립자인 동전(東田) 맹보순(孟輔淳, 1862~1933)은 경기도 안성에서 출생한 구한말 대학자로, 명륜학교 제자들은 모두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재로 성장하였는데 제자들 중에는 만주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김혁과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이영선, 3·1운동 때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피체되어 옥사한 어대선(魚大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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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면 독립만세운동 표지석
수지면 고기리 이장이었던 이덕균은 1919년 3월 28일 안종각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다음날인 3월 29일 100여명의 주민들을 선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동천리를 지나면서 300명의 규모로 커져갔고, 풍덕천 수지면사무소에 다다르자 주변지역 주민들까지 운집하였다. 안종각이 수지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대는 기세를 더욱 떨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최우돌이 보정리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였고, 마북리(삼거리)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계를 치고 있던 일본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시위대를 주도했던 안종각과 최우돌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순국하였다.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덕균 역시 체포되었다. 이덕균(1879~1955)은 경기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으로서 동지 안종각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튿날인 3월 29일 8시경에 동민 100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동천리에서 주민 100여명과 합류하여 동일 오후 2시경까지 수지면 일대를 돌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동년 5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종각(1888~1919)은 경기 용인 사람이다.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 이덕균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튿날인 3월 29일 부락민 10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 진행중에 인근 동천리 주민 100여명과 합세되어 계속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선도하였다. 오후 2시경에는 수지면사무소 광장에서 면민 6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런뒤에 기흥면 소재 일본인 마을을 습격코저 행진하던 중에 일군의 무차별한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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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흥독립만세운동 표지석
기흥구 영덕동 개울번던은 1919년 3월 30일 당시 용인군 기흥면에서 가장 먼저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자 주변 지역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위해 모인 집결지이다. 1919년 3월 23일 갈천리에서 시위대가 태극기를 들고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3월 30일에는 하갈리에 거주하는 김구식이 탑안골 강변에 모인 3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대한제국 장교 출신인 김혁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기흥면사무소로 이동하는 동안 계속 불어났으며, 면사무소 앞에서 면 직원들이 태극기를 치우려 하자 면사무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일본 헌병이 출동하자 시위대는 읍삼면으로 이동하여 연합 시위를 벌였다. 김구식(1881~1947)은 경기도 용인 사람이다. 용인군 일대에서 만세시위가 각 면·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자신이 살던 하갈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3월 30일 하갈리 강가에서 주동이 되어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4월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6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었고 이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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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식 구 묘
김구식(1881 - 1947)은 1919년 당시 용인군 기흥면 하갈리(器興面 下葛里) 사람으로, 용인군 일대에서도 만세시위가 각 면·리에서 일어나자 자신이 살던 하갈리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3월 30일 하갈리 강가에서 주동이 되어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6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고하였으나 기각, 이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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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내만세운동 표지석(홍재택)
이 곳은 머내만세운동을 주도했던 홍재택이 살았던 곳으로, 1919년 3월 28일 수지면 고기리 구장 이덕균, 안종각 등과 함께 머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수지(동천리, 풍덕천리), 구성(보정리, 마북리, 언남리), 낙생 등 인근 지역들을 사전에 연결하고 연락을 분담시키는 등 시위계획을 사전에 조율하고 역할을 분담했다. 이 곳에 거주하던 홍재택은 이러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4월 16일 용인헌병분대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2019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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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내만세운동 발상지 표지석
고기초등학교 운동장 및 정문 앞은 1919년 3월 29일 오전 9시경 고기리 주민 100여 명이 머내만세운동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로, 당시는 고기리 마을 입구의 공터였다. 수지면 고기리 이장이었던 이덕균은 1919년 3월 28일 안종각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다음날인 3월 29일 100여명의 주민들을 선도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동천리를 지나면서 300명의 규모로 커져갔고, 풍덕천 수지면사무소에 다다르자 주변지역 주민들까지 운집하였다. 안종각이 수지면사무소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대는 기세를 더욱 떨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최우돌이 보정리에서 시위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였고, 마북리(삼거리) 방면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계를 치고 있던 일본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시위대를 주도했던 안종각과 최우돌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순국하였다.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이덕균 역시 체포되었다. 머내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안종각에게 애국장(1991년), 이덕균에게 애족장(1990년), 이도해, 홍재택, 강춘석, 권병선, 김영석, 김원배, 김현주, 남정찬, 윤만쇠, 이달순, 이희대, 정원규, 진암회, 천산옥, 최충신에게는 대통령표창(2019년)을 각각 수여했다. 용인시와 고기동·동천동 주민들이 만세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9년 3월 29일에 『머내만세운동 발상지』 표지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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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균 공적비
이덕균(1879 - 1955)은 1919년 3월 28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으로서 동지 안종각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튿날인 3월 29일 8시경에 동민 100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부르며 시위행진 중 동천리에서 주민 100여명과 합류하여 동일 오후 2시경까지 수지면 일대를 돌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동년 5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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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이덕균 묘)
용인 독립만세운동시위를 주도했던 이덕균(1879 - 1955)이 안장된 묘역이다. 용인 독립만세시위는 1919년 3월 21일 원삼면 좌전고개에서 시작하여 용인군 전역으로 확대된 운동이다. 용인의 독립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평화적인 시위가 전개되다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발포로 점차 과격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는 당시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이장으로서 동지 안종각(安鍾珏)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이튿날인 3월 29일 8시경에 동민 100명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시위를 시작했다.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 중 동천리에서 주민 300여 명과 합류하여 수지면 일대를 돌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같은 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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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내만세운동 표지석(권병선, 남정찬, 이희대)
이곳 동막골 주민들은 1919년 3월 29일 오전 권병선, 남정찬, 이희대, 진암회 등의 주도 아래 고기동의 만세 행렬과 합세해 용인 중심지를 향해 행진하는 등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벌였다. 주도했던 이들은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4월 28일 용인헌병분대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201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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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내만세운동 표지석(김현주)
김현주(1892 - 1956)는 1919년 3월 30일 아침 마을 사람들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동천리(東川里)로 행진하였으며, 동천리 주민과 합세해 그 규모는 300여 명에 달했다. 시위행렬은 오전 11시 30분 무렵 풍덕천리(豊德川里)를 거쳐 수지면사무소에 나아가 만세를 불렀으며, 시위 행렬이 읍산면(邑山面) 마북리(麻北里)로 가던 중 일본 헌병과 대치하였고, 헌병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며 2명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곳 하손곡 마을의 동천동 359번지에 살던 김현주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체포되어 4월 28일 용인헌병분대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2019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