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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곶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삼곶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삼곶리 주민 4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1일 나용기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마을 서당 교사 이홍식을 자기 집으로 불러 면내의 각 동리 구장에게 보낼 격문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작성된 격문 6통을 한씨동·나성돈·나개동을 통해 중면 중사리·횡산리·합수리·삼곶리 등 5개 동리 구장에게 배부하였다. 4월 1일 오전 7시, 삼곶리에 약 400명의 주민이 모이자 나용기는 선두에 서서 옥양목으로 만든 태극기를 들고 연천읍내로 진출하여 시위행진을 시작했으나 일본 헌병에게 저지당하여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후 약 100명의 군중이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삼곶리헌병주재소에 몰려갔지만 헌병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다시 한 번 400여 명이 모여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시위를 벌이고 주재소를 습격했지만 헌병이 시위대를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시위를 주도한 나용기는 징역 2년형, 이홍식은 태형 90대에 처해지고, 태극기는 압수되었다. 나용기(1858~1920)는 기도 연천(漣川)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연천 일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그는 3월 31일 같은 동네의 서당 교사인 이홍식(李洪植)을 자기 집으로 불러 독립만세 시위계획을 논의하고, 그에게 연천면내의 각 이장에게 4월 1일 오전 7시에 세얄골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할 테니 동네 사람들에게 연락하라고 하는 내용의 격문 6매를 작성케 하였다. 격문은 작성 즉시 한씨동(韓氏童)·나개동(羅開童)에게 주어 면내 중사리 등의 이장에게 전하게 하였다. 4월 1일 오전 7시 삼곶리에 4백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자신이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선두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외치며 연천읍내를 행진하였다. 그는 결국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이 해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홍식(1886~1935)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연천군 중면 삼곶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나용기(羅龍基)와 함께 계획하였다. 당시 서당 교사였던 이홍식은 3월 31일 중면 나용기와 논의하여 4월 1일 오전 7시에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나용기의 지시를 받아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는 내용의 격문 6통을 작성하여 이를 한씨동(韓氏童) 이외 1명으로 하여금 중사리를 비롯하여 5개 마을의 구장에게 전달케 하였다. 이와 같은 이홍식의 활동으로 4월 1일 중면 삼곶리에서 약 4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일 수 있었다. 이 일로 이홍식은 1919년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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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조 추모비
김병조(1877 - 1948)는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9년 3월 1일 항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서명하고 3월 1일부터 평북 일원을 순행하며 각처에 격문을 보내고 궐기를 독려하다 3월 25일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6월 만주로 옮겨 항일운동과 교육사업 등 15년간 활동하다 1933년 귀국하여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후 반탁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46년 12월 24일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 중 1950년 9월경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동시에 한국교회 순교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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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룡 추모비
이명룡(1873 - 1956)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1902년 정주군 상업회의소 소장이 된 그는 일제가 식민지배를 목적으로 설립한 동양척식회사의 토지매수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6년 형을 받아 3년간 복역하였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때에도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서 손병희 등과 만세를 외치다 왜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조만식 등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조직,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사재를 모두 털어 평동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47년 4월 공산당의 탄압으로 월남한 후에는 반공연맹 이사,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3.1정신선양회 등의 고문을 역임하였다. 1956년 11월 12일 서거하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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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추모비
이승훈(1864 - 1930)은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을사조약에 이어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망국의 한을 느끼며 모든 것을 정리 후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우고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했으며, 신민회 총감과 태극서관 관장을 역임하는 등 애국활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에 무관학교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105인 사건에도 주모자라 하여 계속 투옥되었으나 5년 만에 출옥 후, 이듬해에 오산교회 장로가 되어 기독교 활동과 함께 사회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에는 33인의 대표로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에 체포되어 세번째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조선교육협회 창립, 제4대 동아일보 사장 역임, 물산장려운동 확산 등 사회운동과 이상향 실현을 위해서 힘쓰다가 1930년 5월 9일에 67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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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명흠 묘
백명흠(1909 - 1936)은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으로, 1927년 신간회의 창립에 감화되어 1930년 항일운동에 투신하였으며, 1935년 투쟁자금 확보를 위해 서울 종로3가의 중앙병원을 구입 운영하였고,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감행하였다. 항일투쟁 활동 중 일제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다 1936년 7월 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었으나, 그날 오후 순국하였다.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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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항쟁의사추모비
1919년 3월 28일 오산장날을 기하여 오산역 광장에서 8의사 주도하에 800여명 군중이 집결하여 오산역사, 우편소, 주재소, 면사무소, 금융조합, 일본인 상점, 주택 등 다수를 습격 파괴하고 일본인들을 몰아냄으로써 일본 경찰에 체포, 고문 및 징역을 받았다. 이는 일제의 치욕적인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을 드높인 역사적 사건으로,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을 기리고 항쟁의사들의 구국정신을 후예들에게 길이 물려주기 위해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 84주년을 맞이하여 위대한 선열들의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2003년 3월 28일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오산의 3.1독립만세운동 발상지인 오산역 광장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오산대역 건너편에 위치한 공원으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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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돌베개공원
장준하(1915 - 1975) 선생은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됐다 탈영해 1945년 광복군에 가담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비서, 비상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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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근원지 오산장터 표지석
오산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4일 오산장(우시장)에서 시작되어 3월말까지 진행되었다. 1919년 33인의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 현장을 목격한 오산의 세교동 출신 유진흥은 감격하여 오산에서도 이와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하게된다. 곧 오산으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등의 동지를 규합한 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였다. 3월 29일 오산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동지들에게 각 동리에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3월 25일 오산리의 만세운동이 젊은 학생들과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되었다. 이후 이산리에서 3월 29일 오후 5시경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시장에 모여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는 유진흥과 안낙순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오산주재소의 순사 오오키(大木)가 유진흥 등 3명의 주동자를 체포하자 안낙순을 위시한 시위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기세를 더욱 높였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500여명이 됐고, 이들은 이성구, 이규선, 김경도, 정규환, 김용준, 유진흥 등과 함께 면사무소에 몰려가 투석전을 하였다.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렀고, 오산역을 파괴한다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 경찰과 보병이 합세하여 발포하자 무기에 대항할 수 없자 해산하게 되었다. 오산3.1운동 주모자로 몰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며 성호면(오산)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는 징역6월에서 1년8월까지 형을 선고했다. 그 중 공칠보, 김경도, 김용준, 안낙순, 유진흥, 이규선, 이성구, 정규환 이 8분의 의사를 8의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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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
1926년 5월 3일 수원군에 위치한 오산공립보통학교 6학년 학생 71명은 담임교사 후루카와(古山誠治)의 처벌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다나카(田中) 교장에게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후루카와 교사가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언행과 과도한 구타를 일삼고 순종의 망곡제를 저지하자 학생들은 이와 같은 교사 밑에서 수업을 받을 수 없으니 처벌해 달라고 동맹휴학을 단행한 것이다. 이에 오산공립보통학교 후원회 회장 한필호가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후루카와 교사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자 학생들은 다시 집단 휴학하는 등 반발을 일으켰다. 결국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 더 이상 후루카와 교사의 수업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하여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해주자 5월 7일 학생들은 수업에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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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면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오산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4일 오산장(우시장)에서 시작되어 3월말까지 진행되었다. 1919년 33인의 조선독립선언으로 시작된 3.1독립만세운동 현장을 목격한 오산의 세교동 출신 유진흥은 감격하여 오산에서도 이와같이 실행할 것을 결심하게된다. 곧 오산으로 내려와 이성구, 김경도, 이규선, 정규환, 김용준, 안낙순, 공칠보 등의 동지를 규합한 후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 준비하였다. 3월 29일 오산장날을 거사 일로 정하고 동지들에게 각 동리에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3월 25일 오산리의 만세운동이 젊은 학생들과 천도교도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해 금융조합과 일본인, 중국인 가옥을 파괴하며 전개되었다. 이후 이산리에서 3월 29일 오후 5시경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이 대규모로 벌어졌다. 시장에 모여있던 300여명의 군중들은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는 유진흥과 안낙순 등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오산주재소의 순사 오오키(大木)가 유진흥 등 3명의 주동자를 체포하자 안낙순을 위시한 시위 군중들은 석방을 요구하며 기세를 더욱 높였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더욱 늘어 500여명이 됐고, 이들은 이성구, 이규선, 김경도, 정규환, 김용준, 유진흥 등과 함께 면사무소에 몰려가 투석전을 하였다. 군중은 더욱 늘어 7~800명에 이르렀고, 오산역을 파괴한다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일본 경찰과 보병이 합세하여 발포하자 무기에 대항할 수 없자 해산하게 되었다. 오산3.1운동 주모자로 몰려 체포된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한 농민들이며 성호면(오산)에 살던 주민들이었다. 이들의 만세운동에 대해 일제는 징역6월에서 1년8월까지 형을 선고했다. 그 중 공칠보, 김경도, 김용준, 안낙순, 유진흥, 이규선, 이성구, 정규환 이 8분의 의사를 8의사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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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독립운동기념비
김혁(1875 - 1939)은 1919년 3월, 용인 신갈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 후 신민부(新民府) 집행위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김좌진 장군 등과 함께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28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환이 위독해 가출옥했으나 9년 여 동안의 모진 옥고의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순국, 현재 서울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132에 안장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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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독립운동유적(민영환 묘, 신도비)
충정공 민영환(1861 - 1905)이 안장된 묘역으로, 그는 당시 최고 세도가였던 여흥민씨 척족의 일원으로 1878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진을 거듭해 도승지·형조판서·한성부윤 등 요직을 맡았다. 이후 1897년 특명전권공사로 제정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당시 여러 열강을 방문해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 이후 독립협회 후원 및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지만 친일세력에 의해 실패하고, 파직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에 의해 실패하고, 동포와 각국 공사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