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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묘
변영로(1898~1961)는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가이다.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문」을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同人)으로 활약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발자크의 작품 등 해외 문학을 국내에 번역·소개하였다. 1924년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하였고, 1927년에는 백두산을 여행한 후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 「천지(天池) 가에 누워」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 주간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결국 일본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나야만 했다.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이사,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별세하였다. 변영로는 친일 문학 연구가 임종국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중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민족의 저항 정신을 노래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다. 1922년 발표한 「논개」는 변영로의 대표적인 시로,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죽은 논개(論介)의 애국충절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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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백호 묘
한백호는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에서 각종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신간회 광주지회는 서울특별시 강남구일대를 포괄한 지역에서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지회이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우경화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배격하고 통일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전국적으로 150여 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은 4만 여명에 달했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포괄하는 신간회 광주지회는 1927년 8월 24일에 설립되었는데, 회원의 총수는 알 수 없다. 1927년 8월 24일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 남한산소년회관에서 설립대회를 개최하여 회장 한순회(韓順會), 부회장 석혜환(石惠煥), 총무간사 한철기(韓哲基), 유인목(兪仁穆), 허범(許範), 김상환(金尙煥), 한백호(韓百鎬) 등을 선출하였다. 1928년 12월에는 지회장을 석혜환(石惠煥)으로 개선하였으며, 1929년 12월에는 조직 개편에 따라 유인목(兪仁穆)이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 말부터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하자 이 해 1월 신간회를 고수하고자 하는 회원들이 광흥(廣興) 지회로 개편하고자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금지되었고,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지회도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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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근 묘
고영근(출생, 사망 미정)은 개항기 때,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정부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개혁개방운동을 전개한 관리 · 독립운동가이다. 1898년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가담하여, 근대개화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협회의 총대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이무렵 독립협회에서 선거한 중추원의관 17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으며, 독립협회 부회장을 맡는 등 독립협회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898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개최된 만민공동회를 대표하여 5흉을 재판에 회부할 것, 대신을 가려 쓸 것, 헌의6조를 시행할 것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민권운동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1898년 12월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은 만민공동회의 금지를 명하는 조칙과 함께 시위대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대하여 기습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 집에 피신하면서 만민공동회의 활로를 모색하였다. 1899년 1월 만민공동회 대표 자격으로 독립협회 대표인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사후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어려운 처지에 있던 만민공동회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5월 최정덕(崔廷德)·현제창(玄濟昶)·윤병길(尹炳吉)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다시 설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3년 12월 윤효정(尹孝定)과 협력하여,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처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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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효정 묘
윤효정(1858~1939)은 일제강점기 독립협회 간부, 대한협회 총무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탁지부주사로 근무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할 때 고종양위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일본 거류지에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고베[神戶]에 머물며 박영효(朴泳孝) · 우범선(禹範善) 등과 조일의숙(朝日義塾)을 세워 우리나라 유학생을 수용하였다. 우범선과 사귀는 동안 우범선이 을미사변의 관련자라는 것을 알고, 민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영근(高永根) 등을 시켜 우범선을 죽였다. 귀국하여 1905년 이준(李準) · 양한묵(梁漢默)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치 체제를 목적하였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를 토대로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민중을 기반으로 애국 인사를 포섭, 교육 확장과 산업 개발을 통한 한국의 자강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서, 전국에 25개 지부를 설치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당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당하였다. 이에 장지연 · 오세창(吳世昌) · 권동진(權東鎭) · 유근(柳瑾)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 사업을 계승하였다. 대한협회의 총무로서 이 회의 기관지인 『대한협회회보』 · 『대한민보』를 간행하여 일제의 통감정치와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를 규탄, 공격하였다. 1908년 전국에 60여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는 등 강력한 애국단체로 성장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용한 금액이 1300만원의 거액에 달하자, 일제에 의한 경제적 예속이 주권 상실의 근본임을 판단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창신동에 숨어 살았다. 1919년 3 · 1운동 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철원군으로 옮겼고, 1924년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로 이사하였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풍운한말비사」를 연재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홍만자회(紅卍字會) 한국 지부의 일을 맡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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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묘
김춘수는 개항기 경기도 가평군 일대에서 활동한 의병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이명으로는 병수(柄洙)를 사용하였다. 1898년부터 의병활동에 투신한 김춘수는 1907년 소모대장 이범구(李範九) 및 의병 800명과 함께 경기도 가평·강원도 홍천·양근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김춘수는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전국 13도의 의병이 모여 조직한 13도창의군에도 가담하였다. 하지만 이후 춘천에서 체포되었고 탈출한 뒤 금강산에 들어가서 후학을 전념하다가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로 돌아와 훈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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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응 묘
안종응(1845~1906)은 경기도 지평 사람이다. 1896년 강원도 원주에서 아들 안승우(安承禹)와 이춘영(李春永)이 일으킨 의병부대의 실질적 후원자로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경사에 뛰어난 학자였던 안종응은 단발령 소식을 접하고 이미 무장항쟁에 뜻을 두고 있었다. 더욱이 아들 안승우가 일찍이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이들 부자는 위정척사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은 그로 하여금 의병 거의의 뜻을 세우게 했던 것이다. 따라서 안종응은 아들 안승우와 이춘영에게 의병 거의를 권고하고 이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 안승우, 이춘영 등은 원주 안창리에서 거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안종응은 이들 의병부대의 전투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포군 김백선(金伯善)을 의병부대에 끌어들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의병부대는 제천으로 가서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유인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자기 대신에 안종응을 의병대장으로 추천할 만큼, 안종응은 제천·충주 의진내에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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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기영 묘
안기영(1884~1920)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을미의병 당시 제천의진의 중군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안승우(安承禹)의 아들이다.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1907년 이강년(李康秊)의진에 참여하여 대일항전에 나섰다. 1896년에 이미 거의한 바 있는 이강년 의병장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1907년 3월 충북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경상, 강원, 충청도 일대를 넘나들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특히 지방민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해 신출귀몰한 유격전술을 구사하여 의병사에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와 같이 후기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이강년의진에서 안기영은 종사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특히 안기영은 이강년 의병장이 1907년 재거의할 당시 자신의 집을 군사 소모의 거점으로 제공하는 등 처음부터의진을 지원하였다. 또한 1895년 을미의병 당시 유인석(柳麟錫)의진의 활동상을 기록한 창의록인 『하사 안공을미창의사실』을 보존하여 후세에 역사의 진실을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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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천 지단
박광천(1853~1910)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1907년 8월경 의병장 김상진(金相鎭)의 부하가 되어 강원도 홍천군 동신대 동은교동에서 활동하던 중에 친일 밀고자를 처단한 후 붙잡혔다. 그후 1909년 11월 2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동년 12월 23일 경성공소원과 1910년 1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교수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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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 지단
이재복(1881~미상)은 이정숙(李正肅)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재복은 이같은 시기인 1908년 3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이정숙 의진에 투신하여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수비대와 총 4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치열한 반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8년 9월 1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7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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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필 묘
나상필(1884~1940)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음력 7월경 서울 창성동에서 임시정부로부터 밀파된 요원 정상섭(鄭祥燮)을 만나 군자금 모집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충남 논산으로 내려가 그 곳에 있던 윤교병(尹喬炳)과 함께 군자금 모집방안을 상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논산군 노성면 병사리의 윤교병과 합류한 뒤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1919년 음력 11월경 윤교병과 함께 논산군 논산면에 거주하는 윤일병(尹一炳)으로부터 100원을 모금하였고, 1920년 3·4월에도 2회에 걸쳐 역시 윤일병으로부터 260원을 모금하였다. 1920년 음력 4·5월경에는 윤교병과 함께 논산군 노성면 죽촌리 거주 윤임중(尹任重)으로부터 350원을 모금하였다. 이어 같은 해 음력 6월경 윤교병과 함께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의 강창문(姜聞昌)을 찾아가 이시영(李始榮)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사실을 알리고 군자금을 요청하여 그로부터 40원을 모금하였다. 같은 해 7월경에는 윤교병과 함께 충남 보령군 미산면 용수리의 이시우(李是雨)로부터 40원을 모금하는 등 1919년 말부터 1920년 7월까지 전후 6회에 걸쳐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921년 10월 28일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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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치서 묘
차치서는 양평의병에 참여한 의병이다. 김백선, 안승우, 이춘영은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양평의병 중에는 대를 이은 의병 가문이 눈에 띄는데 연안차시 가문의 차치서는 그의 조부, 아버지와 함께 양평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흥안씨의 안종응, 안승우, 안기병 역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양평 을미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도 양평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마을은 안종응, 안승우,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당시 양동은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이춘영과 김백선은 현재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 안승우 생가에서 안종응과 함께 양평의병을 창의하기로 하고, 안창에서 최초 의병이 집결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원주, 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쳤다. 양평 을미의병(지평의병) 발상지 사이실마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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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현 묘
전석현(1884~미상)은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적인 독립만세시위가 발발했다는 소식은 양평군에도 전해졌다. 용문면 광탄리, 강하면 면사무소 앞, 양서면 면사무소, 고읍면, 청운면 용두리 시장, 양근읍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발했다는 정보를 들은 전석현과 이종성(李鍾聲)은 양동면에서도 속히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부락에 배포하는 동시에 많은 동지를 규합하였다. 미리 약속했던 1919년 4월 7일에 양동면사무소 앞에 많은 군중이 모였고 이날은 때마침 석실리 양동장날이라 장사꾼과 합세하였다. 전석현은 선두에 서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종성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은 일제히 호응하였다. 군중은 시가지를 돌며 시위하고 양평읍내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각 부락을 지날 때마다 남녀노소가 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만세를 따라 불렀다. 그 때 용두리 헌병대가 양평으로 연락하여 불시에 기마헌병대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일사불란한 시위대가 계속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니 일병이 총을 쏘아 사상자가 많이 났다. 군중은 목적지인 양평을 가지 못하고 전석현과 이종성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전석현은 6월 24일 경성지방법원 여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4월 24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