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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리 헌병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이포리 헌병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4월 1일 금사면 이포리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으로 여주에서는 최초로 3.1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이다. 여주에서는 1919년 4월 1일 이포리를 비롯하여 인근 지역에서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포헌병주재소 앞에 모인 주민 3,000여 명은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시위 군중들은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는 등 시위는 점차 격화되었다.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헌병들의 발포로 독립만세시위 군중들은 해산하였으며, 이때 만세시위를 이끌던 지도자 10명이 체포되었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가 벌어져 37명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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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식 묘
홍만식(1842 - 1905)은 1866년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참판에 있을 때인 1884년 아우 홍영식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다가 실패,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하자, 아버지 홍순목은 자살을 하였고 그도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에 부친과 그에게 사면령이 내려지고 다음 해에 춘천관찰사에 제수되어 여러 번 부임하라는 독촉을 받았으나 끝내 취임하지 않았으며, 1895년 8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음독자결코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해주관찰사를 비롯한 의정부 찬정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상소 때마다 직함을 쓰지 않고 「미사신(未死臣)」의 세 자만을 썼으며, 나라의 기울어져 감을 통탄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 자결 순국하였으며,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은 그 충의를 높이 평가, 숭정대부 참정대신(崇政大夫參政大臣)에 증직하고, 장례를 후히 지내게 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홍만식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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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집
엄항섭(1898 - 1962)은 보성법률상업 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9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부 참사가 되었으며, 1924년 4월에 상해한인청년동맹회를 조직하고 재정부장을 수행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임시의정원 헌법 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1917년 4월에 제정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약헌을 수립하는 데 일조하였고, 1936년 11월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1년 11월에는 외무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5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의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김구의 판공비서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에 귀국하여 김구와 함께 활동하다가 6.25 당시 1950년 9월 납북되었으며 1962년 7월 30일에 사망하였다. 198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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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형 묘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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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영준 구 묘
곽영준(1899 - 1932)은 1919년 3월 24일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시장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하고, 1,0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원을 위해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위해 활동하다가 1920년 7월 다시 체포되어 1922년 1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 을 받았고, 동년 3월 29일 공소기각 되었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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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집 터
조성환(1875 - 1948)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1919년 4월에는 노령지역 대표위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군무부 대표위원이 되었다. 1919년 8월 7일 만주에서 대한군정부를 조직하고, 12월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군사부장에 취임하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31년에 임시의정원 경기도 위원, 193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3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을 거쳐, 1937년에 한국 광복 전선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193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되었고,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중국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하였다. 현재 보통리고택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조성환의 부친인 조병희가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과 함께 매각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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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팔 집 터
원용팔(1862 - 1906)은 구한말 충청도와 강원도 등 중부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1차 전기의병 시기인 1896년 여주 일대에서 봉기한 심상희의진에 참여한 뒤 다시 의암 유인석 휘하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2차 중기의병 시기인 러일전쟁이 끝나던 1905년 8월 강원도 원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2~3백 명 정도에 이르는 의진을 이끌고 원주를 점령하고자 횡성을 거쳐 원주로 들어가고 있었으나,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의진은 무너지고 원용팔은 횡성에서 체포되어 원주로 압송된 뒤 10월 7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지만, 대한 의사의 올곧은 기상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경성감옥에 수감된 뒤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1906년 3월 45세에 옥중 순국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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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
공북학교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4월 3일 여주군 북내면 주민 800여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4월초 여주군 북내면에서는 천송리와 당우리의 공북학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다. 특히 당우리의 공북학교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은 짧은 기간에 조직적으로 준비되어 진행되었다. 경성공립농업학교 학생이던 이원기, 원필희, 이원문 등은 서울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여주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4월 1일 독립선언서를 기초로 이원기가 작성한 경고문을 이원문의 집에 모여 필사하여 주민들에게 배포하였다. 4월 2일 이원기의 집과 4월 3일 장암리 구장 원도기 집에서 각각 독립만세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 장암리와 현암리, 덕산리, 외룡리 등의 주민 800여 명이 당우리 공북학교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여주 읍내로 향하였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오학리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시위군중이 오학리를 지날 무렵 일제의 발포로 시위대열은 해산되었다. 이원기(1900~1968), 최영무(1885~1952), 강두영(1898~1960), 김학수(1900~미상), 조경호(1901~1942), 이원문(1901~1968), 원필희(1896~1968)는 경기도 여주 사람으로 북내면 당우리의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였다.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는데도 여주 지역은 호응하지 않아 서울사람으로부터 무시 당하자 분개한 이원기는 4월 1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독립선언서를 참고로 하여, 4월 5일 여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겠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이원기, 원필희, 이원문, 조경호는 이원문의 집에서 만나, 독립선언서를 참고하여 42매의 경고문을 작성하여 이 날 인근지역에 배부하였다.4월 2일에는 이원기의 집에서 강영조, 김학수, 이원문과 다시 만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3일 장암리 이장 원도기의 집에서 김학수, 원필희, 이원기 등이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있었는데, 최영무, 강두영, 강만길, 최명용 등이 이웃 동리인 현암리 주민들로부터 빨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해달라는 독촉을 받았다고 하자 거사일자를 앞당기기로 결의하였다. 급히 마을주민들을 독려하여 북내면 당우리공북학교로 향한 이들은 현암리, 장암리, 덕산리, 와룡리 등 인근 마을을 다니면서 주민들을 규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배포한 후, 당우리의 공북학교에 모인 8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혔다. 이 해 7월 31일 이원기는 징역 1년형, 최영무는 징역 1년 6개월형, 강두영, 김학수는 징역 8개월형, 조경호, 이원문은 태 90도, 원필희는 7월 13일 징역 8개월형을 최종적으로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이원기, 최영무, 원필희에게, 2018년에 조경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했고, 1980년에 최영무에게, 1983년에 이원기에게, 1992년에 강두영과 이원문에게, 2019년에 조경호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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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영 집
이인영(1868 - 1909)은 대한제국 말의 의병장으로서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 500명을 이끌고 춘천과 양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양주에서 13도창의군 총대장으로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공략할 계획으로 진공 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허위를 후임으로 삼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상주에 은신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잡혀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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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필희 집
원필희(1896 - 1968)는 경기도 여주(驪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경성농림학교 학생으로 여주군 북내면 장암리에 거주하였으며,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본래 손병희(孫秉熙)를 따랐던 그는 여주군의 독립만세운동 책임자로서 군내 각 면으로 돌아다니면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도록 계몽하였는데, 1919년 4월 5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동지들과 같이 협의한 후 북내면 국민학교에서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를 들고 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 하다가 일헌병에 붙잡혔다. 그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7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여독으로 요추 및 척추를 다쳐 평생 불구로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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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필희 묘
원필희(1896 - 1968)는 경기도 여주(驪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경성농림학교(京城農業學校) 학생으로 여주군 북내면 장암리(北內面 長岩里)에 거주하였으며,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본래 손병희(孫秉熙)를 따랐던 그는 여주군의 독립만세운동 책임자로서 군내 각 면으로 돌아다니면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정신을 고취하며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도록 계몽하였는데, 1919년 4월 5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동지들과 같이 협의한 후 북내면 국민학교에서 미리 준비해 둔 태극기를 들고 군중을 지휘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 하다가 일헌병에 붙잡혀서 이해 5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고 7월 1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의 여독으로 요추 및 척추를 다쳐 평생 불구로 지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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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만식 영세불망비
홍만식(1842 - 1905)은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이며 초대 우정국 총판을 지낸 홍영식의 형으로, 1866년(고종 3)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 후 관직에 진출하여, 수찬(修撰)과 검열(檢閱)을 지내고 여주 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1905년 일제에 의하여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음독자살하여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