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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맥 지평의병발상지 표지석
을미의병 발생 118주년을 맞아 2013년에 지평면 입구 로터리에 국맥 지평의병발상지 표석을 세운 것이다. 지평의병은 1895년(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같은 해 11월에 공포된 단발령에 항거하여 지평 출신인 이춘영과 김백선 등이 일으킨 의병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창의된 을미의병의 발원지이다. 당시 포군 400여 명을 모집하여, 당시 관아의 반대를 피해 원주 안창으로 이동한 후 을미년 11월 28일 지평의병 창의를 선포한 후 원주·제천·단양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주변 지역 의병 봉기를 자극하는 한편, 제천 남산성 전투, 충주성 점령, 단양 장회협 대첩 등의 여러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이후 간도와 만주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 때까지 싸움을 전개했고, 이후 독립군에 이어 광복군으로 편입되고 해방 후 국군으로 이어져 국맥 지평의병으로 불린다.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공격을 차단하여 재 반격의 기틀을 마련한 ‘지평리전투’ 역시 지평 의병이 중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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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원 추모비
금계 이근원(1840~1918)은 조선 말기 양평이 낳은 유림의 태두 화서 이항로의 후진 문하생으로, 화서 이항로 서거 후에 동문이었던 김평묵과 류중교 두 선생에게서 다시 수학해 화서학파의 구심점이 됐으며, 위정척사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유학자이다. 일제강점기하의 시대 속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의병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항쟁을 하였다. 금계 이근원 선생의 추모비는 2009년 8월 15일 지평의병정신선양회가 양평군의 지원을 받아 건립하였으며, 비신이 2.1m 정도 규모, 비문은 약 2,400여 자로 이루어졌고, 비문은 벽계서당 훈장 정석현이 짓고, 두전(頭篆)은 사단법인 화서학회 이사장 이종익이 썼으며, 교정은 정삼현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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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원 묘
금계 이근원(1840~1918)은 조선 말기 양평이 낳은 유림의 태두 화서 이항로의 후진 문하생으로, 화서 이항로 서거 후에 동문이었던 김평묵과 류중교 두 선생에게서 다시 수학해 화서학파의 구심점이 됐으며, 위정척사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유학자이다. 일제강점기하의 시대 속에서 직접 의병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면서 의병군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정신적 항쟁을 하였던 이근원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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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항쟁지 구둔치 표지석
구둔치는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울진까지 이어지는 옛 관동대로(평해로)로, 임진왜란 때 의병이 아홉 개의 진을 쳤다는 전설이 있으며, 1907년 정미의병 때에는 구둔치고개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던 곳이다. 3.1절의 97주년을 맞아 2016년에 구한말 의병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 관련 유적지를 중심으로 ‘기억의 징검다리’ 문화재 표석을 7개소에 설치했으며, 그중 한 곳이 구둔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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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기념비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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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의병, 지평리전투 기념관
1895년 을미의병 당시 양평군 지평면 출신의 김백선·이춘영 등의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켜 원주·제천·단양·충주 등지에서 벌인 ‘지평의병’의 항일운동을 기념하는 한편, 6·25전쟁 당시 1·4후퇴로 아군이 궁지에 몰렸을 때 한국·미국·프랑스 연합군 5,600여 명이 지평리 일대에서 5만여 중공군을 대항해 처음으로 승리함으로써 아군의 38선 회복을 위한 재반격 계기를 마련한 ‘지평리전투’를 기념하여 만든 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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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선 묘
의병장 김백선(1873 - 1896)은 양평군 청운면 출신으로, 기개와 용력이 비상하고 포수로서의 능력이 탁월해 1890년대부터 지평지역(현, 양평) 포군을 지휘하였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수 400여 명을 이끌고 이춘영·안승우와 함께 1896년 1월 12일 구한말 최초의 을미의병인 지평의병을 거의하였다. 단양전투 승리 후 유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였고 선봉장으로 활약 중 가흥전투 시 중군장인 안승우에게 병력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지원해주지 않아 패퇴하자 안승우에게 거센 항의를 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군율 위반으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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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비마 묘
천비마는 김백선장군의 말의 이름이다. 김백선(金伯善, 1873~1896)은 양평군 출신으로 지평 군수 맹영재와 동학농민군을 무찌른 공으로 절충장군에 임명되었다. 일본이 침략해 오자 맹영재와 의병을 일으킬 것을 말했으나 거절당하자, 지평 동향인 안승우와 이춘영 등과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포군 400여 명을 이끌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가흥전투 중 병력 지원 요청을 하였으나 응해주지 않은 안승우에게 항의를 하다가 군령으로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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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용두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3일 양평군 청운면 주민 2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청운면에서의 만세시위는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23일 용두리시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용두리시장 만세시위는 단월면 덕수리의 신재원, 부안리의 김종학, 앙동면 쌍학리의 정경시, 청운면 갈운리의 민주혁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여물리에 있는 다리 위에서 시위 계획을 논의하고 신재원이 제공한 광목으로 태극기 3개를 제작하여 품에 넣고 시장으로 들어갔다. 신재원과 김종학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주변에서 2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어 시위대를 형성하며 행진하였다.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시위군중과 충돌하였으나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다. 신재원(1860~1920), 정경시(1855~1929), 김종학(1876~미상), 민주혁(1870~미상)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23일 청운면 용두리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신재원은 3월 1일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을 한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정경시와 만나 용두리 장날인 3월 23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23일 그들은 용두리 시장으로 가던 중 김종학과 민주혁을 만나 그들의 거사계획을 말했고 찬성을 얻게 된다. 여물리 다리 밑에서 신재원은 김종학과 민주혁에게 자신이 사 가지고 온 흰 천으로 조선 독립기라고 쓴 깃발 3개를 만들게 하였다. 장터에 이르러 150여 명의 군중을 동원하여 그 선두에 서서 신재원과 김종학은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 해 6월 21일 신재원과 정경시는 징역 2년형, 김종학은 징역 1년 6월, 민주혁은 4월 24일에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게 된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신재원에게는 1977년, 정경시에게는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신재원과 정경시에게, 2006년에는 민주혁에게, 2010년에는 김종학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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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용팔 묘
원용팔(1862 - 1906)은 구한말 충청도와 강원도 등 중부지방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1차 전기의병 시기인 1896년 여주 일대에서 봉기한 심상희의진에 참여한 뒤 다시 의암 유인석 휘하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여 중군장으로 활동하였다. 2차 중기의병 시기인 러일전쟁이 끝나던 1905년 8월 강원도 원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2~3백 명 정도에 이르는 의진을 이끌고 원주를 점령하고자 횡성을 거쳐 원주로 들어가고 있었으나,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의진은 무너지고 원용팔은 횡성에서 체포되어 원주로 압송된 뒤 10월 7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지만, 대한 의사의 올곧은 기상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경성감옥에 수감된 뒤 옥고를 이기지 못하고 1906년 3월 45세에 옥중 순국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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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거론 동학유적지
이곳은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도전2리 전거론(全巨論)은 동학의 2세 교조인 해월신사(海月神師)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1897년 8월부터 1898년 1월까지 5개월간 은거하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이후 강원도와 경기 북부, 경상도 일원의 산간 마을을 전전하다가, 제자인 임순호가 이곳에 집을 마련하고 모시게 되었으며, 최시형은 「이천식천(以天食天)」, 「이심치심(以心治心)」 등의 법설을 펼쳤다. 또한, 1897년 12월 24일 의암 손병희에게 동학의 도통(道統)을 전수한 곳이자, 최시형의 차남이자 항일투쟁에 앞장서며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2년 형의 옥고를 치르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 독립운동가인 최동호(崔東昊, 1897~1923)가 태어난, 유서 깊은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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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거주지, 최시형 은거지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최동호는 서울 출신이며 천도교인으로, 천도교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차남이자 고려혁명당수(高麗革命黨首) 최동희의 동생이다. 1915년 이래 형과 함께 국권회복 운동을 통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는데, 1919년 3월 1일 천도교도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다가 5월 27일 일경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