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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 터 표지석
양평읍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24일 양평군 양평읍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양평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경기도 내에서 규모뿐만 아니라 시위 양상도 매우 격렬하였다. 3월 초부터 4월까지 장기간 지속된 만세운동은 격렬한 시위로 전개되어 피검자 및 중형을 선고받은 인사도 많았다. 1919년 3월 24일 연희전문학교 서기 이신규가 독립선언서 등을 가지고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시장의 큰 길에서 독립에 대한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날이었던 이날 약 1,000여 명의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으며, 이신규의 연설과 함께 격문을 보여주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시위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오후 2시경 일본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이끌던 이신규와 곽영준을 주동자로 체포하자 시위군중은 크게 격분하여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면사무소, 우편소 앞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군청으로 몰려가 국세철·세금정리부 등을 파기하였다. 갈산면 시위의 주동자인 곽영준, 한창호, 김경성, 서상석, 김석봉, 한봉철 등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2년형, 10월형, 8월형, 6월형 등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신규(1899~1926)는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곽영준(1899~1932), 김경성(1888~1950), 한봉철(1898~1936)은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군중을 이끌었다. 양근 지역의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로 재직하고 있던 이신규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1919년 3월 24일 이곳에 도착하면서 본격화하였다. 3월 24일은 장날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곽영준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했고, 이신규는 길가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장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경성은 이 날 오후 3시 경에는 양근리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요구하였다. 시위 직후 이들은 체포됐고, 7월 9일에 김경성은 징역 6월, 곽영준은 징역 8월, 한봉철은 징역 10월, 이신규는 10월 23일에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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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읍 3.1운동 만세시위지
양평읍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4일 양평군 양평읍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양평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경기도 내에서 규모뿐만 아니라 시위 양상도 매우 격렬하였다. 3월 초부터 4월까지 장기간 지속된 만세운동은 격렬한 시위로 전개되어 피검자 및 중형을 선고받은 인사도 많았다. 1919년 3월 24일 연희전문학교 서기 이신규가 독립선언서 등을 가지고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 시장의 큰 길에서 독립을 달성하자는 연설을 하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장날이었던 이날 약 1,000여 명의 군중들이 운집해 있었으며, 이신규의 연설과 함께 격문을 보여주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이에 적극 호응하여 시위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오후 2시경 일본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를 이끌던 이신규와 곽영준을 주동자로 체포하자 시위군중은 크게 격분하여 헌병분견소로 몰려가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은 면사무소, 우편소 앞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군청으로 몰려가 국세철, 세금정리부 등을 파기하였다. 갈산면 시위의 주동자인 곽영준, 한창호, 김경성, 서상석, 김석봉, 한봉철 등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7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각각 징역 2년형, 10월형, 8월형, 6월형 등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신규(1899~1926)는 경기도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곽영준(1899~1932), 김경성(1888~1950), 한봉철(1898~1936)은 이 운동에 참여하면서 군중을 이끌었다. 양근 지역의 만세시위는 연희전문학교 서기로 재직하고 있던 이신규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장을 가지고 1919년 3월 24일 이곳에 도착하면서 본격화하였다. 3월 24일은 장날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곽영준은 독립선언서와 격문 수십 매를 시장에 모인 군중에게 배포했고, 이신규는 길가에 모인 1천여 명의 군중에게 연설과 동시에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뿌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장을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김경성은 이 날 오후 3시 경에는 양근리 면사무소에 가서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요구하였다. 시위 직후 이들은 체포됐고, 7월 9일에 김경성은 징역 6월, 곽영준은 징역 8월, 한봉철은 징역 10월, 이신규는 10월 23일에 징역 2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이들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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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읍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이 고장에서 있었던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터에 안내판을 세운 것이다. 고읍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는 고읍면·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 4개 면민 4,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3일 일어난 고읍면(현 옥천면) 만세 시위에는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였다. 강하면과 양서면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최대현·윤기영·이보원·신우균 등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고읍면사무소 앞에 모인 시위대가 양근 읍내를 향하여 행진할 것을 제의하자 최대현은 군중을 인솔하고 응암리와 용암리 사이 언덕까지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로 인해 최대현은 징역 6개월에 벌금 20원, 윤기영·이보원·신우균은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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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 전투지(사나사)
1907년 10월 양평의병이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10월 27일 일본군 보병 제13사단 예하 51연대 제11중대와 사나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사나사는 이때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으나 그 후 여러 차례 걸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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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룡 묘
이승룡(1853 - 1896)은 경기도 양근(楊根, 현 楊平) 출신의 의병장으로, 일제가 1894년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 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 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국권 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1896년 초 경기도 양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입성하여 항전하다가 일본군의 꼬임에 빠져 남한산성을 나왔다가 붙잡혀 동년 음력 2월 14일 피살, 순국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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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년 묘
이연년(1874 - 1944)은 경기 양평(楊平) 사람으로, 1907년 7월 포수 30여 명과 함께 김춘수의진(金春洙義陣)에 참여하여 종사(從事)가 되어 의병 200여 명을 인솔하여 지평·양근·홍천 등지에서 왜적과 전투하였고, 황경평에서 의병 모집을 위한 전령문 작성 및 대송면 곡수에서 일본 순사를 살해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08년 3월에 일본 수비대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이송되었다. 1908년 5월 22일에 평리원(平理院)에서 소위 내란죄로 유배 10년 형을 받고 완도(莞島)에서 유배 생활을 하셨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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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기념비
양평의병기념비는 한말 전후기 의병의 요람인 양근과 지평이 통합된 양평의병으로 정립하고, 광복 70주년 및 을미의병 창의 120주년에 즈음하여 숭고한 창의호국정신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2012년 을미 12월 28일에 양평의병기념사업회에서 세운 비로, 양평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2,000여 분 중 밝혀진 의병 200여 분의 성명을 돌에 새겼다. 용문산관광지 친환경농업박물관 인근에 자리하고 있으며, 한국민족독립운동발상지, 화서연원독립운동기념비, 용문항일투쟁기념비 등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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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 전투지(용문사)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용문산의 용문사를 비롯하여 상원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권득수 의병장은 의병을 모집하여 용문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해 놓고 항일활동을 펼쳤다. 조인환 의병장은 용문사를 근거지로 삼사 인근 지역의 관아와 파출소, 우편소 등을 습격하여 일제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군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와 용문사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때 용문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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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평의병 전투지(상원사)
1907년 후기의병 당시 양평의병의 근거지였던 곳이다. 일제가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면서 의병의 대일항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즈음 양평의병은 권득수·조인환 의병장의 지휘 아래 용문산의 상원사를 비롯하여 용문사, 사나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양평의병이 활발하게 항일전을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양평의병은 1907년 8월 24일 일본 보병 제52연대 제9중대가 용문사를 습격해오자 상원사로 후퇴하여 항쟁하였다. 이때 상원사는 일본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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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지평의병 충혼비
1895년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 등 일제의 극악무도한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당시 지평현 곡수(曲水)에 살고 있던 이춘영이 중심이 되어 의병이 일어났고 이는 전국의 의병 봉기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본 비는 지평현 곡수리 의병 영웅들의 충혼과 고귀한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2021년 6월 6일 곡수1리 마을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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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지평면 곡수리 3.1만세운동 충혼비
양평군 지평면 곡수리 전 지역은 1919년 식민 통치 시국일 때 일제의 비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인 만행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3.1만세운동의 정신이 계승되어 지평면 곡수리 우시장을 거점으로 3천여 명의 인원이 집결하여 격렬하게 만세 시위를 하였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본 비는 곡수리 3.1만세운동 영웅들의 충혼과 고귀한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기 위해 2021년 6월 6일에 곡수1리 마을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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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영 기념비
지평면의 의병장 괴은 이춘영(1868 - 1896)은 본관 덕수(德水). 자 우삼(友三). 호 괴은(槐隱). 경기 양평(楊平) 출생. 1895년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원주(原州)에서 안승우(安承禹)와 함께 1895년 11월 28일 원주 안창에서 지평 의병을 일으켜, 지평 포군장 김백선과 그 부하 400여 명을 포섭, 단양(丹陽)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그후 풍기(豊基)로 진격하다가 친척 이민옥(李敏玉)의 배신으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충주(忠州)로 피신, 유인석(柳麟錫)의 의병부대와 합류하여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재차 의병활동을 하였다. 조령(鳥嶺)·달천(川)·수안보(水安堡)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28세에 충주에서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