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93건
-
이춘영 묘
이춘영(1868 - 1896)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출신으로,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김백선을 만나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안승우와 함께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원주·제천·단양·충주성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수안보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이춘영 집
이춘영(1868 - 1896)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출신으로,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김백선을 만나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안승우와 함께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원주·제천·단양·충주성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수안보 전투에서 적탄에 맞아 2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안승우 집
안승우(1865 - 1896)는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이다. 을미년(1895) 말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에서 이춘영, 김백선과 함께 지평의병을 일으켜 제천, 충주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제천의 남산성 전투에서 비가 와서 주 무기인 화승총에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접전하다가 결국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
1919년 4월 7일 양동면사무소 광장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3,000여 명이 만세운동을 펼쳐 3.1운동을 확산시킨 선인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양평문화원 양동분원과 양평을미의병정신 현창회에서 2013년 11월 세운 양동기미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높이 4.5m 크기이며, ‘사생취의’ 정신을 널리 선양하기 위해 양동 역사 만들기 추진위원회에서 건립했다. 양동만세공원(석곡리 418-3번지 일원)에 위치하고 있다.
-
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양동만세공원)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양평 을미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도 양평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마을은 안종응, 안승우,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당시 양동은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화서학파가 위정척사사상을 기반으로 창의 호국투쟁을 처음 논의한 곳인 양평군 양동면은 명실상부한 1895년 을미의병(지평의병) 발상지로서, 한국 근대 항일민족운동 50년 현대사의 시발점이라는데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
을미의병발상지 표지석(사이실 마을)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양평 을미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도 양평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마을은 안종응, 안승우,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당시 양동은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이춘영과 김백선은 현재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 안승우 생가에서 안종응과 함께 양평의병을 창의하기로 하고, 안창에서 최초 의병이 집결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원주, 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쳤다. 양평 을미의병(지평의병) 발상지 사이실마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김백선(1873 - 1896), 안승우(1865 - 1896), 이춘영(1868 - 1896)은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안승우의 아버지인 안종응은 의병부대의 실질적 후원자로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안승우의 아들 안기영(1884 - 1920) 역시 을미의병 당시 제천의진의 중군장으로서 의병사에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1962년 안승우에게, 1991년 김백선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건국훈장 독립장을 1963년 이춘영에게, 대통령표창을 1968년 김백선에게, 건국포장을 1999년 안종응과 안기영에게 추서하기도 했다.
-
안승우 묘
안승우(1865 - 1896)는 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으로, 을미년(1895) 말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에서 이춘영·김백선과 함께 지평의병을 일으켜 제천·충주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제천의 남산성 전투에서 비가 와서 주 무기인 화승총에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접전하다가 결국 적에게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고 절명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양서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양서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1919년 3월 30일, 4월 1~2일 양평군 양서면 주민 2,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0일 양평군 양서면 도곡리에서 약 13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 4월 1일에는 2,0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는 양서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는 전날 강하면 만세시위에도 참여했던 최대현도 참가하였다. 다음날인 4월 2일에도 여운긍, 여광현 등이 선도하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양서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4월 3일 인근 4개 면민 4,000여 명이 참여한 고읍면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여광현(1886~1962)은, 경기도 양평 신원 출신으로, 1919년 3월 31일 오후 11시에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는 밤을 새워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4월 1일 이웃 양서면 사무소로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에도 고읍면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고읍면 주민뿐 아니라 인근의 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지에서 합류한 시위 군중이 4천여 명에 달하였다. 여광현은 이들과 함께 양근읍으로 향했다가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최대현(1852~1931)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강하·양서·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여운형 집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여광현 묘
여광현(1886 - 1962)은, 경기도 양평(楊平) 신원 출신으로, 1919년 3월 31일 오후 11시에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는 밤을 새워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4월 1일 이웃 양서면(楊西面) 사무소로 행진하며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3일에도 고읍면(古邑面)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고읍면 주민뿐 아니라 인근의 강상면·강하면·양서면 등지에서 합류한 시위 군중이 4천여 명에 달하였다. 여광현은 이들과 함께 양근읍으로 향했다가 만세현장에서 일경에 붙잡혀,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영세불망 대한독립운동 참전공적비
1891년 양서면 청계리에서 출생한 이기정과 1890년 양서면 증동리에서 출생한 어영해는 일제강점기 시절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소속돼 독립운동에 매진했으며, 3·1운동을 얼마 앞둔 1919년 초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아 고향인 양평에 행동대원으로 파견됐다. 양서면이 고향인 두 사람은 당시 양평 주민들에게 조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일제의 부당한 행위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했으며, 1919년 3·1운동 당일에는 주민들을 모아 면사무소(현재 양평읍 소재)를 습격하는 거사를 감행하였다가, 선두에 섰던 이기정 선생은 무장한 일본 헌병대의 총격에 의해 총알이 우측 허벅지를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
이승룡 집
이승룡(1853 - 1896)은 경기도 양근(楊根, 현 楊平) 사람으로서, 의병장으로 경기도 남한산성에서 활동하였다. 일제가 1894년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른 후, 친일정권을 사주하여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이승룡은 비분강개(悲憤慷慨)하며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1896년 초 경기도 양근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입성하여 항전하다가 일본군의 꾀임에 빠져 남한산성을 나왔다가 붙잡혀 동년 음력 2월 14일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