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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훈 묘
윤태훈(1874 - 1908)은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1907년 음 10월 박장호의진(朴長浩義陣)에 소속되어 의병 30여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 평창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박장호는 황해도 장연(長淵) 출신으로 호는 화남(華南)이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강원도 홍천에서 관동의병(關東義兵)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말에는 이강년(李康秊)과 연합하여 경기·강원지역을 넘나들며 일본 군경과 맞서 싸우며,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의병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박장호의진에 속한 윤태훈은 1907년 12월 20일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부하 30명과 박성춘(朴聖春)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 30여 명을 규합하여 평창군 연평면(蓮坪面) 녹산(鹿山)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다가 패주하였다. 이때 윤태훈은 가지고 있던 총을 묻어 두었다. 또 윤태훈은 1908년 음력 정월 15일 윤응원(尹應元) 등과 합세하여 강원도 홍천 일대에서 항전을 벌였다. 1908년 음 6월경 녹산에 묻어두었던 총을 찾아 가지고 돌아오던 윤태훈은 일본군 울진수비대(蔚珍守備隊)에 체포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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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응 공적비
이만응(1857 - 1938)은 경기 여주(驪州) 사람으로, 1894년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일제의 침략 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의병을 봉기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춘천에서 거의하고 이소응(李昭應) 의진의 아장(亞將, 두 번째로 높은 장수)으로 활약하며 의진의 중요한 일을 함께 의논하고 추진하였으며, 1896년 1월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을 처단하고, 서울 진격 중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교전을 치르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2002년 10월 20일에 그의 묘 아래쪽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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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응 묘
이만응(1857 - 1938)은 경기 여주(驪州) 사람으로, 1894년 일제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거하고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과 복제개혁을 추진하는 등 조선의 국권을 탈취하려는 침략 정책 수행을 가속화하자, 이만응은 의병을 봉기하여 일본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1896년 1월 20일 춘천에서 거의하고 이소응(李昭應) 의진의 아장(亞將, 두 번째로 높은 장수)으로 활약하며 의진의 중요한 일을 함께 의논하고 추진하였으며, 1896년 1월 관찰사 겸 선유사로 부임하는 조인승을 처단하고 서울 진격 중 가평 벌업산 전투에서 교전을 치루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타계 후 대신면 무촌리 원통산하에 자리 잡았으나, 다음 해에 양평군 개군면 앙덕리로 이장하였고, 그 후 1999년 부친의 묘 아래인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 2002년 10월 20일에 그의 묘 아래쪽에 공적비가 세워졌다.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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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천조씨 송덕비(이만응 어머니)
춘천 의병장 삼 형제(의병장 이만응의 어머니)의 어머니인 백천조씨의 평소 가르침인 “효도는 마땅히 힘을 다하는 것이요, 충성을 위해서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 (孝當竭力 忠則盡命: 효당갈력 충칙진명)”라는 뜻에 따라 슬하의 삼 형제가 을미 춘천의병에 참여하였다, 본 비는 백천조씨의 높으신 사상을 기리고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2002년 10월 20일 후손들이 세웠다. 이진응(1991, 애국장), 이만응(2002, 애족장), 이경응(2000,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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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유적지
구한말 대표적인 유학자이자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대표한 화서(華西) 이항로(1792~1868)의 유적지이다. 유학자인 김형묵, 최익현, 양헌수, 유인석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항로의 위정척사론은 김평묵이 발전적으로 집대성하였고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에 의해 실천적 차원에서 의병 항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에 의해 의병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 나갔는데, 화서학파들은 을미사변 후부터 대한제국 멸망 직전까지 국내의 제천, 평산, 춘천, 홍천과 국외의 간도 지방과 연해주 등지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화서학파의 반개화(反開化), 항일(抗日)운동은 최대 규모로 장기간 지속되어 이후 일제강점기 국내외의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곳에는 위정척사사상의 화서학파의 창시자인 화서 이항로의 생가를 비롯하여 묘소와 신도비, 후학을 가르쳤던 벽계강당, 이항로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노산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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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호 친필비 - 사군이충
박장호(1850 - 1922)는 1876년 의암 유인석 등과 병자수호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동의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10년 나라가 강제 합병되자 만주로 망명하였고 1919년 3.1운동 후 만주에서 여러 독립운동 단체 대표 등 5백여 명이 결성한 대한독립단의 도총재로 선출되어 항일 독립투쟁에 전념하였다. 독립투쟁하던 선생은 1922년 4월 2일 일제가 파견한 밀정에 의해 이국땅에서 순국하였다. 화남 박장호의 서거 90주기를 맞아 2012년에 세워진 친필비 事君以忠(사군이충)과 함께, 주위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옥중 휘호비와 백범 김구 휘호비가 같이 서 있다. 事君以忠(사군이충)은 화남 박장호의 친필로,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섬겨라’하는 가르침을 나타낸 것이다. 1962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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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면 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1919년 3월 10일에 백낙기, 최학순 등이 주민들에게 문호리 장날에 문상학교(현, 문호초등학교)로 모이라는 내용의 통문을 비밀리에 돌렸다. 통문을 받은 주민 수백여 명은 문호리 장날에 모여 함께 만세를 불렀으며 날이 저물도록 행진을 계속하였다.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주민 여러 명을 체포하였다. 체포된 최학순은 양주헌병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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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서종면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10일에 양평군 서종면 주민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양평의 3.1운동은 3월 10일 서종면 문호리에서 처음 만세 시위가 발생한 이래 약 한 달에 걸쳐 크고 작은 시위가 이어졌다. 1919년 3월 10일에 백낙기, 최학순 등이 주민들에게 문호리 장날에 문상학교(현 문호초등학교)로 모이라는 내용의 통문을 비밀리에 돌렸다. 통문을 받은 주민 수백 명은 문호리 장날에 모여 함께 만세를 불렀으며 날이 저물도록 행진을 계속하였다. 일본 경찰이 발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고 주민 여러 명을 체포하였다. 최학순은 양주 헌병대를 거쳐 서대문 형무소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수백 명이 참가한 문호리 시위는 천주교인들이 주도하여 천주교를 전국으로 전파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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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일 묘
김영일(이명 김영조)(1896 - 1979)는 1919년 3월 1일 경기도 양평읍 장날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는데, 정배리의 주민들을 규합하는 한편,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여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거사 준비를 진행하였다. 거사 당일 3월 1일 새벽에 양평읍 내에 도착하여 정오쯤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주고 시위군중의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갔으나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과 저지로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이 일로 양주헌병분견소에 붙잡혀 1919년 5월 5일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3개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8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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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영 묘
김교영(1858 - 1929)은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광주군 동부면(東部面) 망월리(望月里) 구장으로 재직하던 중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한 뒤, 같은 달 27일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인솔 후 동부면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혔다. 그해 4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소재하고 있던 묘소가 현 위치인 양평군 양동면 금왕리로 이장되었으며, 묘소 앞에는 2004년에 세운 공적비가 있다. 이 공적비도 묘소가 이전됨에 따라 함께 이전되었다.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김교영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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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고장 양동 표지석
양동은 ‘을미의병’의 발상지로, ‘지평의병’을 대표하는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김백선(金佰善) 등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킨 후, 원주 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치고 장렬히 최후를 맞이한 의병장들인데 그들 모두 양동면 출신이다. 석곡리는 의병마을로 알려져 있으며, 석곡리 사이실마을에는 양평 의병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의병의 고장 양동을 알리기 위해 2002년 10월 28일 을미의병 성역화 사업추진위원회에서 본 표지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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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 삼산리 전투터 표지석
정미의병 삼산리 전투터 표지석은 1907년 11월 7~8일 정미의병이 활동했던 곳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의 강제퇴위, 정미7조약 체결과 군대 해산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장 이인영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2천여 병력을 이끌고 삼산리에 본부를 두었다. 양동면 일원에 5천여 명의 의병이 집결하자 11월 7~8일 일본군 토벌대가 공격해왔고, 격렬한 전투로 인해 수많은 의병이 희생되었다. 이인영(1868 - 1909)은 대한제국 말의 의병장으로서 1895년(고종 32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유인석, 이강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의병 500명을 이끌고 춘천과 양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양주에서 13도창의군 총대장으로 1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공략할 계획으로 진공 작전을 감행하였으나, 이듬해 아버지가 사망하자 허위를 후임으로 삼고 문경으로 돌아갔다. 그 뒤 상주에 은신하던 중 일본 헌병대에 잡혀 경성감옥에서 처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