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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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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묘
월남 이상재(1851 - 1927)는 1896년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1906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도왔으며, 1913년 황성기독교청년회(서울YMCA) 총무로 YMCA 운동에 전념하면서 3.1독립만세운동과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을 뿐만 아니라 1924년 소년척후대(보이스카웃 연맹의 전신)의 초대 총재와 조선일보 사장으로 인재 양성은 물론 민족언론 문화창달에 힘썼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3월 노환으로 서거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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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기 묘
정세기(1894 - 1981)는 경남 하동(河東) 사람으로, 1919년 3월 13일 하동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수많은 장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같은 해 5월 2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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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 의병 전투지
고동 의병 전투지는 1907년 11월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07년 11월 14일 의병들이 당시 장흥면 이패상리 고동에서 400m 정도 떨어진 고양 방향 북방고지 숲속에 매복하고 있었다. 양주경무서는 의병 130여 명이 내습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헌병분견소의 10여 명과 함께 고동으로 향했다. 당일 오후 5시경 고동으로부터 200m쯤 떨어진 지점에 도착한 토벌대(일본군)는 의병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하여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2시간여에 걸친 치열한 전투 후 잠시 소강상태가 되자 토벌대는 고동에서 숙영을 하였다. 의병들은 야음을 타서 북쪽으로 이동하였고, 다음날 오전 6시경 고동에서 북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매복하였다. 토벌대는 이를 탐지하고 다시 의병들을 공격하였다. 화력에서 열세인 의병들은 서쪽 고지를 넘어 파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병 2명이 죽고, 다수의 의병이 부상당하였다. 토벌대는 말 6필, 소 2필, 총 23정, 칼 1점 등을 노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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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암 묘
정현섭(1896 - 1981)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으로,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岩)이다. 정화암(鄭華岩)이라고도 잘 알려져 있는데, ‘화암’은 중국에 건너가면서 부르게 된 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색공포단, 상해해방연맹, 중한청년연합회 등을 결성하여 무력 항일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다.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광복군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 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고, 광복 후 귀국해,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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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묘
김진우(1883 - 1950)는 강원도 영월 사람으로, 병장기 대신 붓을 들어 대나무를 강직하게 그려낸 항일 서화가(書畵家)였다. 12세에 항일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모시고 서간도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의병 전쟁을 치렀고,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의원을 지냈으며,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소집을 요구하는 문건 ‘아(我) 동포(同胞)에 고(告)함’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동년 9월 국내 활동을 위해 귀국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 신의주지청(新義州支廳)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4년 8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하는 등 독립활동을 하였으나 해방 후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안타깝게 사망했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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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근 묘
안경근(1896 - 1978)은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1918년 사촌 형 안중근(安重根)이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상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당시 임정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구(金九)를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투구하였다. 노주군관학교와 운남군관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후, 만주에서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 상해에서 황포군관학교의 구대장, 낙양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한 군사 전문가로서, 재상해한국독립당대회에 참석하여 밀정 이종홍의 교살과 애국단 조직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군특무대의 대원으로도 활약하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김구의 그림자 역할을 했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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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영 묘
윤기영(1871 - 1941)은 경기도 양평(楊平) 사람으로, 1919년 3월 31일 강하면, 4월 1일 양서면, 4월 3일 옥천면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망국의 통한을 가누지 못하고 있던 중 서울에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 일로 인해 1919년 10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으며, 혹독한 고문과 태형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평생 병고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하였다.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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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응선 묘
윤응선(1853 - 1925)은 경기도 양평 출신으로, 1895년 명성황후 시해 및 단발령이 내려지자 의암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한 호좌의진(湖左義陣)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이 일제의 강제로 체결되자 월악산(月岳山) 용하동(用夏洞)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논의하다가, 제천시(堤川市) 덕산면(德山面) 광천(廣川)에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2015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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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강하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 주민 3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9일 강상면 시위와 3월 30일 용문면 시위에 이어서 3월 31일에는 강하면에서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고종 승하 이후 독립운동을 도모하고 있었던 최대현은 윤기영, 이보원, 신우균 등과 모의하여 3월 31일 오후 11시경 강하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00여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최대현은 4월 3일, 4개 면민이 합동으로 추진했던 고읍면 시위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대현(1852~1931), 윤기영(1871~1941), 이보원(1870~1949), 신우균(1889~1921)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3월 31일 오후 11시에 이들은 강상면사무소 앞에서 군중 3백여 명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뒤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시위는 밤을 세워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는데,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4월 3일 강상, 강하, 양서, 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이들은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최대현은 11월 7일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았지만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신우균은 10월 5일에, 윤기영과 이보원은 1919년 10월 15일애 태형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최대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윤기영에게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보원에게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신우균에게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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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현 집 터
최대현(185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 도곡리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강하·양서·고읍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와 용암리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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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현 묘
최대현(185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 오위장(五衛將) 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켜 부하 70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1919년 3월 31일 양평군 강하면(江下面) 사무소 앞에서 68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면민 30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다음 날인 4월 1일 양서면(楊西面) 도곡리(陶谷里)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부근에서 집합한 2천여 명과 함께 다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그는 4월 3일 강상(江上)·강하·양서·고읍(古邑) 등 4면의 주민 약 4천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때 태극기를 휘날리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이후 시위군중을 인솔하고 고읍면 옹암리(瓮岩里)와 용암리(龍岩里) 사이의 언덕까지 행진하는 등의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는 11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및 벌금 20원을 받고 이에 불복 공소하여, 11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 및 벌금 2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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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마을 표지석(개군면 양덕리)
개군면은 애국애족(愛國愛族) 의병의 고장이라 칭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고종황제 폐위 후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시작되었을 때, 기자 맥켄지(Fredric A. Mckenzie)가 양평지역을 방문해 지평의병의 모습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양평군 개군면 구미리 입구에 ‘구미리 호국충열, 의병에 고장’임을 알리는 표지석과, 옛 구미포 나루터에서 임진왜란 때 원호 장군이 향병(鄕兵)을 모아 왜군을 기습하여 향군이 승전한 나루터임을 알리는 ‘옛 구미포 나루터’ 표지석이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