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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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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화 묘
이용화(1879 - 1919)는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출신으로, 김진성·백남식 등과 함께 3월 28일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마을을 돌며 주민들에게 시위계획을 알리고, 일장기를 고쳐 태극기를 제작 후, 3월 28일 가납리에서 만세를 부른 후 해산하던 광적·백석면민들과 합세하였다. 총 950여 명에 달하는 시위대는 논 가운데에 모여 오후 4시경 시위를 재개하였는데, 의정부에서 급파된 헌병과 광적면장이 주모자를 찾자 이들을 크게 꾸짖었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면장이 도망가자, 시위대는 일본 헌병과 면장에게 돌팔매질을 시작하였고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던 이용화는 일본 헌병의 무차별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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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대 묘
의암 정용대(1882 - 1910)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 출신으로, 대한제국 때에 적성, 풍덕, 김포, 통진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한국군 특무정교(特務正校)였던 그는 군대 강제 해산에 대한 의분으로 스스로 창의좌장군(倡義左將軍)이 되어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경기도 양주를 비롯한 적성·풍덕·교하·통진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2월 27일에서 3월 2일에 걸쳐 일본 헌병대 및 경찰대와 교전하였으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군자금 조달을 풍족히 하여 지속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김포와 적성 등지에서 군량미와 금품을 징발하며 전투를 준비하다가 경기도 일대의 의병소탕전을 전개한 일본 토벌대에 의하여 1909년(순종 3) 10월 28일 체포되어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1월 26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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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집
조소앙(1887 - 1958)은 파주 교하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본 유학 시절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는 대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박은식, 홍명희 등과 함께 박달학원에서 청년 혁명가를 양성하였다. 1917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2월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명 명의의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에 사회당을 창당하고, 1950년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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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 묘
조용하(1882 - 1937)는 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조소앙의 형이며, 일제강점기 경학사(耕學社), 하와이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 한인협회(韓人協會) 등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이다. 조용한은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는데, 이에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뒤, 출옥 후 1928년 5월 다시 중국 상하이로 도항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교총장인 친형 조소앙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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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선 추모비
조필선(1888 - 1965)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7일 양주군 백석면(百石面) 연곡리(連谷里)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였으며, 이튿날인 3월 28일에도 6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오산리(梧山里) 들판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백석면사무소 앞까지 시위행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그해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갸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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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규 묘
안종규(1889 - 1946)는 경기도 양주(楊州)군 백석면 연곡리 구장(區長)이었다. 1919년 3월 초순 민족대표들이 조선독립선언을 하자 이에 찬동하여 양주군 백석면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27일 다수의 지역 주민들을 규합하여 친형인 안종태와 함께 군중에 대하여 「조선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어 3월 28일에도 오산리 들판에서 인근 주민 600여 명을 규합하여 면사무소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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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필선 묘
조필선(1888 - 1965)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7일 양주군 백석면(百石面) 연곡리(連谷里)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였으며, 이튿날인 3월 28일에도 6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오산리(梧山里) 들판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백석면사무소 앞까지 시위행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그해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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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백석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백석면 주민 6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7일 밤, 백석면 연곡리 구장이던 안종규와 그의 형 안종태가 주도하여 연곡리에서 주민 20~30명과 함께 횃불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인 3월 28일에도 이들 형제는 이사범·김대현·조필선 등과 더불어 600여 명의 주민을 인솔하여 오산리 대들벌로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이후 다시 백석면사무소 앞으로 진출하여 시위를 계속하였다. 만세시위를 주도한 안종규는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그의 형 안종태는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후 출옥하였으나,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한 이사범·김대현·조필선 등은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안종규(1889~1946)와 안종태(1882~1920)은 경기도 양주 사람이다.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 이장인 안종규는 1919년 3월 초순 민족대표들이 조선독립선언을 하자 이에 찬동하여 양주군 백석면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3월 27일 친형인 안종태와 함께 다수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어 3월 28일에도 안종태·이사범·조필선 등과 함께 동면 오산리 속칭 대들벌 들판에서 인근 주민 600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면사무소 앞까지 진출하여 만세시위를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해 5월 23일 두 형제는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는 안종태에게 1993년에 안종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경기도 양주 출신의 이사범(1878~1943), 김대현(1872~미상), 조필선(1888~1965) 모두 1919년 3월 27일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서 안종규와 안종태와 함께 인근 주민 다수를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6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백석면 오산리 들판에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백석면사무소까지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사범, 김대현, 조필선 모두 징역 6월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는 조필선에게, 1993년에는 이사범에게, 2010년에는 김대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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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 정용대 연합의병전투지
이은찬(1878 - 1909)은 원주 부흥사면(현, 판부면) 출신의 한말 의병장으로,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9월 원주에서 해산군인 등 500명의 의병을 모은 뒤 경북 문경의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 모집에 진력하여 경기도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이 13도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를 편성하고 서울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해 12월 소속부대원과 함께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다.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 간도지방으로 항일운동의 거점을 옮겨 군사를 양성하고자 하였으나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 밀정에 의해 1909년 3월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 해 6월 27일에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정용대(1882 - 1910)는 대한제국기에 적성, 풍덕, 김포, 통진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한국 군대 강제해산에 대한 의분으로 1908년 2월 향리에서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의병장이 되어 적성·풍덕·김포·통진 등지에서 병력을 지휘하였으며, 같은 해 2월 27일∼3월 2일에 일본 헌병대 및 경찰대와 교전을 하였고, 계속 김포와 적성 등지에서 군량미와 금품을 징발하면서 전투준비를 하다가 1909년 10월 28일 붙잡혔다.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이 선고되어 1910년 순국하였다.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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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 묘
이순재(1891 - 1944)는 1919년 3월 29일 양주군 진접면 부평리 봉선사의 승려로서 김석로·김성암 등과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그 준비로써 독립시위에 대한 격문 200여 매를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 명의로 인쇄하여 인근 각 동민에게 배포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고, 동년 5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아 동년 7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동년 9월 11일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5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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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김순갑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장흥면(長興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 양주군에서도 곳곳에서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양주군 장흥면은 조그마한 산 속에 있으면서 옛날 서산(瑞山)이라는 곳으로, 이때에도 이씨 왕조시대의 환관(宦官)이 많이 살고 있어 양반과 상놈의 사회 신분계급이 오랫동안 존속했던 곳이다.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에서는 이회명(李會明) 등이 주동이 되어 시위가 진행되었다. 1919년 3월 28일 저녁 8시경에 동리 주점 앞에 수십명이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 29일에도 이른 아침에 동민들이 모이자 이회명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시위행렬을 인도하여 장흥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여기에는 이미 3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이 군중의 주도 인물은 김순갑과 정윤삼(鄭允三)·김완순(金完順) 등이었다. 김순갑은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 있는 교현리 주민들의 선두에서서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면사무소 앞에서 이회명이 인솔한 집단과 합하여 시위대는 크게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 후 체포된 김순갑은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항소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고, 1920년 2월 26일에 서대문감옥을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윤삼은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장흥면(長興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 양주군 곳곳에서도 만세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양주군 장흥면(長興面)은 조그마한 산 속에 있으면서 옛날 서산(瑞山)이라는 곳으로, 이때에도 이씨 왕조시대의 환관(宦官)이 많이 살고 있어 양반과 상놈의 사회 신분계급이 오랫동안 존속했던 곳이다. 장흥면 교현리(橋峴里)에서는 이회명(李會明) 등이 주동이 되어 시위가 진행되었다. 1919년 3월 28일 저녁 8시경에 동리 주점 앞에 수십명이 모여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 다음날 29일에도 이른 아침에 동민들이 모이자 이회명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서 시위행렬을 인도하여 장흥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이미 300여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이 군중의 주도 인물은 정윤삼과 김순갑(金順甲), 김완순(金完順) 등이었다. 정윤삼은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 있는 교현리 주민들의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시위 후 체포된 정윤삼은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항소하였다. 그러나 6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했으나 8월 14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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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재 신도비
월남 이상재(1851 - 1927)는 일제강점기에 YMCA 전국연합회 회장이자 신간회 창립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민권운동가, 청년운동가이다. 독립협회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으며, 민립대학설립위원회 위원장, 보이스카우트 총재, 민족유일당 운동인 신간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1902년 개혁당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옥중에서 기독교와 인연을 맺고 그때부터 기독교적인 삶을 평생 실천하였다. 1927년 3월 29일 노환으로 서거하였으며, 10만 군중의 애도 속에 한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장의를 엄수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