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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근 유물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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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포장 3.1운동 만세 시위지
군포장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시흥군 남면 주민들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군포장은 안양과 의왕, 군포의 경계지이자 상업적 요지였기 때문에, 시장을 중심으로 인근의 주민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었다. 군포와 안양 인근에서 모인 주민 2,000여 명은 군포장에서 시위를 전개한 뒤 군포장역 앞에 위치한 경찰주재소로 행진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과 일본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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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천, 이재현 추모상
안양 지역 출신의 항일 애국지사 우봉(牛峰) 이재천, 해평(海平) 이재현 형제 추모상이다. 우봉·해평 형제는 1913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 밑에서 독립활동을 펼쳤으며, 이재천은 지난 1935년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옥사하였고, 동생인 이재현은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과 함께 중국 상해와 홍콩 등에서 광복군으로 독립활동을 벌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항일 애국지사 이재천·이재현 형제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안양시 자유공원에 본 추모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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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근 의거지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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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 집
이재현(1917~1997)은 경기도 시흥 사람이고 이해평(李海平)이란 이름으로도 활동했다. 1939년 10월 중경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교관을 맡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후에는 광복군 국내정진군으로 베이징에서 교포를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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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근 의거비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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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근 부조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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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우 집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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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가래비3.1운동기념비
가래비 3·1운동기념비는 1919년 3월 28일 만세배미에서 일어난 가래비 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86년에 12월에 건립되었다. 앞면에는 ‘가래비삼일운동기념비(가래비三一運動紀念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건립 후기와 추모비, 그리고 취지문과 건립 위원회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변태섭이 지었고, 글씨는 근당(槿堂) 양택동(梁澤東)이 썼다. 건립 후기문은 경기도 학예연구관 강대욱이 붙였다. 2007년 10월 16일 인근 만세배미 자리에 새롭게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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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는 양주 가래비에서 일제에 저항하다 희생된 백남식·이용화·김진성 열사 등 순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1986년 건립된 가래비 3·1운동기념비의 위치가 협소하고 도로에 인접해 있어 접근성이 떨어지므로, 2007년 10월 16일 가래비 3·1 만세 운동의 현장인 만세배미에 새로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횃불 모양 순국 기념비의 좌대 폭 4.1m, 좌대 높이 2.5m, 비신 너비 1.1m, 비 높이 6m, 봉화 폭 1.2m, 봉화 높이 1.5m이며, 옆면에는 후기문과 독립선언문 등이 새겨져 있다. 양주시 지원과 민간의 성금 협찬으로 설립된 순국 기념비 양옆에는 가래비 3·1 만세운동 당시 순국한 백남식·이용화·김진성의 흉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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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태 묘
안종태(1883~1920)는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연곡리에 살면서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1919년 3월 27일 밤, 동생인 안종규와 함께 연곡리의 주민들에게 연설을 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고, 28일에도 인근 주민 600여 명을 규합하여 백석면 오산리 들판에서 대규모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시위대열을 이끌고 백석면사무소까지 진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일로 1919년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고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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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인순 묘
윤인순(1880 - 1909)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양주에서 의진을 형성하여 양주, 파주, 적성, 포천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7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양주에서 의진을 형성하여 양주·파주·적성·포천 등지에서 활약하였으며, 1907년 말경 13도연합의진에 참여하여 서울진공작전을 폈으나 좌절되었다. 그후 허위(許蔿)를 대장으로 하여 임진강 일대에서 잔류 의병들을 규합하여 부장으로 활약하다가, 1908년 6월 허위가 잡힌 뒤 30∼40명의 소규모 의병을 인솔하고 파주·적성·양주 등지를 전전하면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1909년 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양주·파주·포천·영평·연천·삭녕·김천·배천·연안·장단을 연결하는 육상과 해상 도서지방 등지에서 활약하며 항전을 계속하다가 1909년 3월 17일 양주 북방 40리 지점에서 삭녕수비대와 전투 중 부하 16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