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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 집(경기)
해공 신익희(1894~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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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갑 집 터
어수갑(魚秀甲)은 홍남표와 함께 강원도 문막에 있는 노림의숙교로 가서 후학양성의 길을 걷는 중 1919년 3월 22일 제 1회 졸업식을 하게 되었는데 고종인산에 참석한 후 독립선언서를 졸업생 40명에게 배포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만세운동을 고양하였다. 1921년 10월 군자금 확보활동 및 1926년 만세운동 발각으로 2차례에 걸쳐 체포되었고 징역 3년을 구형받았다. 출소 후 1945년 김포군 하성면장을 역임하고 1946년에는 민주주의 민족전선 경기지부 서기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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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신흥상회
이석영(1855-1934)은 1855년(철종 6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른 살이 되던 1885년에 영의정을 지낸 거물급 관료이자 한양 인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던 친척 이유원의 양자(養子)로 입적되었다. 연로한 양부 이유원은 3년 뒤 세상을 떠났고, 양부의 재산은 대부분 이석영에게 상속되었다. 구한말 10대 부자, 한양 3대 부자로 꼽히던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은 자연히 거부가 되었다. 1910년,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뒤인 9월의 어느 날, 회의에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나기로 결의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헐값에 처분한 재산은 약 40만 원으로, 이 재산의 대부분은 이석영 선생이 소유하던 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석영은 많은 재산을 독립군 자금으로 내놨고 그 돈이 씨앗이 되어 서간도 삼원포에 경학사가 창립되고,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가 설립됐으며,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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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기념관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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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박물관
1997년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문을 연 여주박물관은 여주의 역사와 민속자료 등을 조사·수집·전시·교육하고, 새로운 학술자료를 발굴하며 여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주박물관 2층 여주역사실에서는 우리나라 근, 현대에 여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역사와 여주 출신 독립운동가 및 여주 3.1운동, 국권 회복을 위한 여주인들의 투쟁 흔적 등을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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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수 집
정철수(1924~1989)는 1943년 12월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에 배치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太行山)으로 가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에 참여하였다. 1944년 9월 화북(華北)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수료하고, 1945년 1월 조선의용군 화북조선인민위문단(華北朝鮮人民慰問團) 대표로 태행구(太行區) 지역을 순회하면서 조선인민을 위로하였다. 정철수는 '조선인민은 해방구 군민들과 함께 작전(作戰)하여 철저히 일본파쇼를 소멸하고 중한(中韓)인민의 해방을 위해 분투할 것을 희망'한다고 역설하였다. 해방 이후 길림시(吉林市)에서 조선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취임하는 등 조선동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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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한 집
차병한(1885~1933)은 1919년 4월 3일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 시위를 차희식(車喜植)·차병혁(車炳爀)·장제덕(張濟悳)·장소진(張韶鎭)·이영쇠(李永釗) 등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당시 그는 장안면 석포리(石浦里) 이장으로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여러 사람들과 연락하며 고향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날 차병혁 등과 조암(朝岩)장터에 모인 2천 여명의 시위군중을 지휘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안면 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이 때 그는 차병혁과 함께 면장 김현묵(金賢默)을 만나 동참할 것을 권유하고,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고, 김현묵을 선두에 세워 인근의 쌍봉산(雙峯山)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시 시위군중과 함께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서류를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투석으로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오후 5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몽둥이를 가지고 화수리(花.樹里)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여, 공포를 발사하며 대항하는 일본 경찰과 투석전을 벌여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을 죽이고, 주재소를 파괴·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1920년 12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소요·살인·방화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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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장호 묘
박장호(1850~1922)는 1905년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침탈되자 1906년 홍천에서 거의하여 관동의병의 영도자로서 활약하였으며 1907년에는 운강 이강년(雲岡李康秊)과 함께 연합하여 계속 일군과 대전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되어 국내에서의 항쟁이 불가능해지자 계속적인 투쟁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에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 국내로부터 도만해오는 청년들이 수십만에 이르자 동년 4월 15일 각지에 산재해 있는 의병영수·유림수뇌·보약사(保約社)대표·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대표 등 560여명이 유하현 삼원보 서구대화사(柳河縣三源堡西溝大花斜)에 회집하여 종래의 개별적인 행동을 지양하고 단일체로 통합하여 체계화한 항전을 전개하고자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단의 최고책임자인 도총재(都總裁)에 추대, 부총재 온당 백삼규(溫堂白三奎),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군사부장 전덕원(全德元) 등의 간부를 임명하고 결사복국(決死復國)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를 위해서 각현에 지단(支團)·분단(分團)을 설치하고 보민회·강립단 등 친일단체의 숙청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년호문제로 기원 독립단과 민국 독립단으로 분열되었는데 그는 전덕원(全德元)·이웅해(李雄海)·김평식(金平植) 등과 같이 기원독립단 즉 구왕조(舊王朝)에 충성하는 복벽운동(復酸運動)에 주력하는 수구파(守舊派)에 속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임시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게 되어 1921년 5월에는 군사활동을 단일화시키기 위한 광복군총영을 설립하게 되니 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던 그는 일제가 파견한 밀정에 의하여 이역땅에서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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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 묘
한규설(1848~1930)은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활동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1898년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중추원 의장으로 임명되고, 다시 법부대신으로서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당하게 되면서 본직에서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이어 이듬해 다시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찬정을 거쳐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제가 전권대사 이토[伊藤博文]를 앞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끝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이에 일제는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대궐 수옥헌(漱玉軒) 골방에 감금하고 본관(本官)을 면직시켰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곧 징계에서 풀려나 중추원 고문·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강제로 국권 피탈 후에 남작의 작위가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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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경 묘
성우경(1842~1916)은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친 시흥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시흥농민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시흥군 관리들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반란이었다. 제1차 시흥농민운동은 1898년(고종 35) 음력 7월 9일 시흥 읍내[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발발하여 관속배가사 9호가 파괴되고, 집물 등이 파손되었다. 1904년 9월 14일 일어난 제2차 농민 봉기는 개항 이후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일본이 철도 부설을 위해 노역자들을 강제 모집하는 데서 항쟁이 발생되었다. 성우경은 농민측 협상 대표로 선정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더욱 심각해진 부역 모집에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농민들을 규합하여 관공서 등을 공격하였다. 제1차 시흥농민운동 결과 성우경과 아전배 3인이 구속되었고, 시흥 한천변[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벌어진 제2차 항거에서는 수천 명이 운집한 결과 일본인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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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인표 묘
당인표는 1919년 3월 22·28·29일에 걸쳐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 일대의 독립만세 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이미 군하리에서는 장날인 3월 22일에 3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 때 참여했던 조강리(祖江里)의 최우석(崔禹錫)이 조남윤(趙南潤)·당인표(唐寅杓) 등은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들은 3월 28일 당인표의 집에 모여, 이튿날 오전 11시에 읍내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있으니 참여하라는 권유문 7매를 만들었다. 29일 오전 11시경 마을주민 400여 명이 읍내에 모이자, 조남윤과 당인표 등과 함께 이들을 지휘하여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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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문(홍병준) 묘
홍덕문은 휘는 병준(秉俊)이며, 본관은 남양이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음력 2월 25일(동두천 장날) 정오에 1천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그 후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다. 출옥한 후에는 일본 헌병이 가한 형독으로 인하여 수년 후 향리인 걸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동두천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26일 양주군 이담면 동두천 일대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중순경 정원이(鄭元伊)가 서울과 연락을 맡고, 청년지도자인 한원택(韓元澤)과 박창배(朴彰培)를 중심으로 독립선언서·태극기 등을 준비하였으며, 거사일을 동두천장날인 3월 26일로 잡았다. 1919년 3월 26일 송내·지행·좌기골·기촌·빈양말·하봉암·상봉암·창말·싸리말·안흥리 등 10여 마을 주민 1,300여 명이 일시에 시장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일찍이 만세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고 만세대장으로 불리던 홍덕문이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만세를 복창하면서 시장을 행진하였다. 이들은 이담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 신공우(申公雨)에게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고, 동두천역으로 진출하여 정차된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그러자 주내면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들이 칼을 빼들고 시위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박경필(朴慶弼)·고복돌(高福乭)이 헌병이 타고 있던 말의 다리를 몽둥이로 쳐 쓰러뜨리자, 헌병들은 총개머리를 휘둘러 선두에 섰던 홍덕문 등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렇듯 일본 헌병의 탄압으로 시위 주동자 7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