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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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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초등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3·1 만세운동 이후 안성에서는 지역 곳곳에서 만세 항쟁이 벌어졌다. 시민들은 구 안성군의 중심지이자 안성 장(場)이 열리는 안성읍내부터 구 양성군 지역인 양성면과 원곡면, 구 죽산군 지역인 일죽면, 이죽면, 삼죽면 등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안성읍내에선 1919년 3월 11일 안성공립보통학교(현 안성초등학교)에서 시위 움직임이 있었다. 이날 밤부터 안성 장(場)의 상인 수십 명은 만세를 불렀다. 이후 한동안 잠잠하던 안성읍내에서 같은 해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연속해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당시 생존권을 위협받았던 상인은 물론 기생까지 나서며 일본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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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만수 공훈기념비
류만수(유만수)(1921 - 1975)는 경기 안성(安城) 금광면 사람으로,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자로 생활하다가, 동년 5월 일본 가와사키(川崎)에 있는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 취업 중인 한국인 노무자들과 참여한 민족차별 반대 농성 시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같은 회사에서 강제수용 생활을 하다가 탈출하여 일본 내의 노무자 단체에서 활동하며 일본으로 온 강제 징용자들의 구출 활동을 한 후 귀국하여, 1945년 5월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하여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비밀리에 조직하고, 1945년 7월 20일 부민관(府民館)에 동지 3인과 다이너마이트 폭탄 2개를 만들어 몰래 대회장에 들어가 연단과 복도에 장치하여 폭발시킨 부민관 투탄 의거의 주역이었다. 애국지사 류만수 선생 공훈기념비는 애국정신과 독립 유공의 유덕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대한민국 광복회와 율곡문화원, 유한림문화원, 진주 유씨 문정공파 종친회에서 건립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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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항진 묘
최항진(1881 - 1919)은 경기도 안성(安城)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3일 안성군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 구장으로 있으면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시위 군중 1,00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등불과 횃불을 들고 양성읍(陽城邑)을 향하여 행진하던 중 양성읍의 시위군중 1,000여 명과 합세하여, 총 2,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시위행진을 벌였다.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활동하다가 부상을 당했으며, 1919년 4월 30일 안성경찰서장이 불을 지른 시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총칼로 주민들을 구타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강력하게 항의하다가 현장에서 일경에 의해 타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을 인정하여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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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규 집
정문규(1915 - 1970)는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사람으로,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유한제약주식회사(柳漢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중앙대학 동창인 최승우(崔昇宇)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중경 망명을 권유했다. 1943년 3월 이를 결행하여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7월 정문규는 “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정문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취급령 위반 등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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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규 공적비
정문규(1915 - 1970)는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사람으로,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유한제약주식회사(柳漢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중앙대학 동창인 최승우(崔昇宇)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중경 망명을 권유했다. 1943년 3월 이를 결행하여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7월 정문규는 “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정문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취급령 위반 등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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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항쟁지비(양성면)
전국 3대 항쟁지로 손꼽히는 양성의 3․1 독립운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3.1 독립항쟁이다. 3월 11일 오전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이 교정에서 부른 독립 만세가 기폭제가 되어 4월 1일 밤 양성면과 원곡면민 약 2천여 명이 동항리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관 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를 파괴, 방화하고 일본인을 축출하였다. 이날의 항쟁으로 361명이 검거되고 127명이 옥고를 치렀다. 그중에서 24명이 순국하였고, 일경의 주모자 색출 과정에서 9채의 가옥이 불에 타고 40명이 태장 60~90대를 맞는 등 막대한 피해와 고난을 겪었다. 양성의 3.1 독립운동은 보통학교 학생들로부터 시작하여 각 마을에 퍼졌고, 또한 원곡면민과 동맹한 지역 연합적 성격을 띤 항일 독립투쟁으로 이를 기념하여 1997년 6월 6일에 본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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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독립운동 역사마을(양성주재소 만세 이후 터)
안성 3.1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주요 시위가 있었던 장소(양성주재소- 만세 이후 터)에 세워진 기념 사적이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최은식(崔殷植) 등이 1,000여 명의 원곡면민들을 주동해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장을 선두에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들은 양성면에 있는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고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귀가하던 1,000여 명의 양성면민들이 합류됐고, 이로써 시위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양성주재소로 몰려가 일본인 순사부장을 불러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주재소에 불을 놓아 전소시켰다.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기물을 파괴, 방화한 뒤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또한, 인근 주재소와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또, 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귀향한 원곡면민들은 다시 원곡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 때 잡혀 옥고를 치른 사람만도 126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본래 현재 양성중학교 인근 도로변(양성면 동항리 413-7)에 있던 양성주재소는 만세 군중이 모두 불태워버려 사라지고, 일제는 보다 주민의 감시와 통제가 쉬운 위치로 옮겨 새로운 주재소를 지었다. 이 장소는 일제에 의해 만세운동 이후 새로 지어진 양성주재소의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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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양성공립보통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으로 안성에서 최초로 만세 시위가 벌어진 곳이다. 1919년 3월 11일 양성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는 소식을 들고 학교 운동장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의 독립만세운동에서 양성면 덕봉리 출신의 보성전문학교 학생이었던 남진우는 오전 11시경 조회시간에 학교에 와서 일본인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국인 교사 및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외쳤다. 양성공립보통학교 만세시위는 이후 4월 1일 일어난 원곡면·양성면 2,000여 주민에 의한 격렬한 시위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남진우(1899~1933)는 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2월 4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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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3.1독립운동발상지비
양성의 3․1운동은 안성군 양성공립보통학교 전교생이 기미년(1919년) 3월 11일 오전 11시 돌연 교정에서 부른 독립 만세가 기폭제가 되어 4월 1일 밤 양성면과 원곡면민 2천여 명의 군중이 동항리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친 사건이다. 경찰관 주재소가 지척에 있었으며 일본인 교장과 교사가 제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교정과 뒷동산에서 독립만세를 여러 날 외쳤고, 추후 이것이 양성지역은 물론 안성지역 3.1 독립만세운동의 계기가 되었기에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31회 졸업생이 양성초등학교 내에 1997년 5월 5일 세운 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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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선 묘
오창선(1884 - 1974)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며, 1919년 양성과 원곡 지역의 3.1운동 선봉 주동자이다. 그는 원곡면, 양성면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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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근 묘
오정근(1886 - 1954)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원곡면과 양성면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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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선 묘
오윤선(1893 - 1960)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하는 등 앞장서서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