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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규 집
김윤규(1894 ~ 1962)는 1894년 12월 16일 경기도 수원시 음덕면 신남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31일에 대부면 동리에 사는 노병상, 홍원표 등과 함께 영전리 사격장에서 만나 독립 만세 시위 결행을 약속하였다. 같은 날 태극기를 제작하여 이것을 들고 4월 1일 새벽에 대부면 주민들과 함께 권도일의 집 앞에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었다.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는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집터는 김윤규가 노병상, 홍원표와 함께 당시 부천군 대부면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시위에 활용할 태극기를 제작했던 곳이다. 집은 멸실되고 터만 남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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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기념비(대부동, 대부면)
안산 단원 대부면의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 등 3인은 1919년 3월 13일 대부면 영전리에서 만나 독립만세운동을 결의하고 이날 밤 11시 김윤규의 집에서 포목(베와 무명)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4일 오전 3시경 집 밖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니 이곳 주민들이 합세하여 권도일의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대부면사무소 앞에서도 시위하였다. 1982년 4월 1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옛 대부면사무소에 3.1독립만세기념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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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동(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대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1일 부천군 대부면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1일 대부면 영전리에서 김윤규, 노병상, 홍원표 등이 만나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이날 밤 오후 11시경 대부면 동리의 김윤규 집에 모여 포목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전 3시경 이들은 주민과 같이 지역 주막을 운영하던 권도일의 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김윤규(1894 ~ 1962), 노병상(1891~1982), 홍원표(1875~1962)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1919년 4월 1일 부천군 대부면에서 이들은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김윤규 집에 모여 천으로 태극기를 만들었다. 집합한 시위군중 수십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했으나 일경에 붙잡히게 된다. 이해 5월 8일 이들은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는 노병상과 홍원표에게, 1992년에는 김윤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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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칠 공적비
홍순칠(1877 ~ 1932)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秀岩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는 등 준비를 갖춘 후, 3월 30일 비입동(碑立洞)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이게 되자 만세 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普通學校)와 공자묘(孔子廟)를 돌며 독립만세 시위를 펼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 60주년을 맞아 안산지역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고 홍순칠의 유업을 기리고 추모하는 뜻으로 그의 생가 근처인 와동공원에 안산지역에서 최초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3월 30일을 기념하여 2005년 3월 30일에 공적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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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만세시위지 와리 집결지
3.1운동 만세시위지 와리 집결지는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 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와리 주민들이 집결했던 곳이다. 수암면 와리 대지주 홍순칠은 1919년 3월 29일 이장들을 통해 수암면 내 18개 리에 통문을 돌려 주민들에게 다음날 수암리 비석거리에 모이게 했다. 이에 따라 3월 30일 와리 주민들이 수암리로 향하기 위해 와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홍순칠은 4km떨어진 비석거리까지 이들을 인솔하였다. 이렇게 비석거리에 모인 2,000명의 시위군중은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홍순칠(1877 ~ 1932)은 경기도 시흥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시흥군 수암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주민을 규합하였다. 3월 30일 비입동에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이게 되자 만세 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와 공자묘를 돌며 독립만세 시위를 펼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소요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개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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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어록비(샘골교회)
최용신 (1909~1935) 선생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0월 YWCA 교사로 이곳 샘골 (천곡.泉谷)에 파견되어 마을사람들과 YWCA의 지원으로 1933년 1월 천곡학원 건물을 신축하고, 문맹퇴치와 농업기술 및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35년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장중첩증으로 2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하였으며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 현 일동 818 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선생의 농촌계몽과 독립을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薰)의 소설 「상록수(綠樹)」에서 실제화 되어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2004년 10월 7일 최용신의 제자인 홍석필이 1억 5천만 원을 기탁함으로써 건립 사업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어, 천곡(샘골)강습소가 있던 그 자리에 2007년 11월 20일 최용신 기념관을 건립 및 개관하였다. 가까이에는 최용신의 묘와 함께 추모비를 비롯하여 농촌계몽 활동을 했던 교회인 샘골교회, 심훈문학기념비, 최용신의 유훈비와 기념비, 샘골강습소 주춧돌 15기 및 향나무 5그루 등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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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신 묘
최용신 (1909~1935) 선생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0월 YWCA 교사로 이곳 샘골 (천곡.泉谷)에 파견되어 마을사람들과 YWCA의 지원으로 1933년 1월 천곡학원 건물을 신축하고, 문맹퇴치와 농업기술 및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35년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장중첩증으로 2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하였으며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 현 일동 818 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선생의 농촌계몽과 독립을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薰)의 소설 「상록수(綠樹)」에서 실제화 되어 농촌운동의 큰 귀감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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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익수 묘
유익수(1870 - 1926)는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秀岩面 秀岩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인근 18개 동리 2,000여 명의 주민들을 인솔하고 선두에 서서 읍내의 향교·면사무소·보통학교 등을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튿날에는 수원군 반월면(水原郡半月面) 장터로 나아가 6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6년여를 병석에서 고생하다가 1926년 사망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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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수암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수암면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에 시흥군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미 읍내의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을의 이장에게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윤병소와 김병권은 3월 29일 화정리에서 이봉구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대열에 참여하였다. 또한 월피리의 유익수는 수암면 성포리 주민 3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집 앞을 지나가자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면사무소 서쪽에 있는 도살장터에 모여 있다가 시장을 거쳐 비석거리에 집합하였다. 윤병소와 유익수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향교,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지를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편 와리의 홍순칠도 유익렬의 하인 임학신에게서 비석거리 집회 소식을 듣고 허치선의 집에 모인 30여 명을 인솔하여 비석거리 집회에 참가하였다. 윤동욱은 능곡리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이봉문은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이장에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수암면의 18개 마을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는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유익수(1870~1926), 김병권(1878~1951), 윤동욱(1891~1968), 홍순칠(1877~1932)는 경기도 시흥 사람이고, 윤병소(1887~1919)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날 면내 18개 동리의 주민 2천여 명의 오전 10시에 비석거리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른 이들의 뒤를 시위군중은 만세를 고창하며 따랐고, 해산을 명령하는 일경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하였다. 읍내로 진입하여 경찰 주재소, 공립 보통학교, 면사무소, 향교를 돌며 군중을 지휘하여 평화적으로 시위하였지만 결국 시위 후 체포된다. 유익수는 이 해 7월 31일 징역 1년형을, 윤병소는 5월 27일 10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게 된다. 홍순칠은 5월 27일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병권은 5월 27일 징역 6월을, 윤동욱은 징역 8월을 받았으나, 동년 7월 31일 태 90도로 감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는 윤병소에게, 1983년에는 유익수에게, 1992년에는 홍순칠에게, 1996년에는 윤동욱에게, 2006년에는 김병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또한 1990년에는 유익수와 윤병소에게 유익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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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암동 3.1운동기념탑(위대한 투쟁)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 30일 안산지역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상록구 수암동 비석거리는 당시 수암면 인구의 4분의 1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던 곳이다. 수암동 비석거리 3·1운동의 역사적 사실을 재조명하고 만세운동 정신을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 그 인근의 독립운동에 나선 주민들이 집결했던 장소인 옛 수암주재소 터에 '수암동3·1운동기념탑'을 세웠다. 6.6m 높이의 화강암으로 만든 기념탑이며, 안산 독립운동의 역사와 안산 3·1운동의 주역 13인의 이름이 안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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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거리 3.1운동기념비
비석거리는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에 시흥군 수암면 18개 마을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이미 읍내의 비석거리로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을의 이장에게 돌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윤병소는 3월 29일 화정리에서 이봉구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네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대열에 참여하였다. 또한 월피리의 유익수는 수암면 성포리 주민 3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기 집 앞을 지나가자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면사무소 서쪽에 있는 도살장터에 모여 있다가 시장을 거쳐 비석거리에 집합하였다. 윤병소와 유익수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향교, 주재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등지를 돌면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한편 와리의 홍순칠도 유익렬의 하인 임학신에게서 비석거리 집회 소식을 듣고 허치선의 집에 모인 30여 명을 인솔하여 비석거리 집회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수암면의 18개 마을에서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는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게 되었다. 수암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유익수는 징역 1년, 홍순칠은 징역 1년, 윤병소는 징역 10개월을 받았다. 유익수(1870~1926), 김병권(1878~1951), 윤동욱(1891~1968), 홍순칠(1877~1932)는 경기도 시흥 사람이고, 윤병소(1887~1919)는 경기도 수원 사람이다. 이들은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 수암리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 날 면내 18개 동리의 주민 2천여 명의 오전 10시에 비석거리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른 이들의 뒤를 시위군중은 만세를 고창하며 따랐고, 해산을 명령하는 일경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진하였다. 읍내로 진입하여 경찰 주재소, 공립 보통학교, 면사무소, 향교를 돌며 군중을 지휘하여 평화적으로 시위하였지만 결국 시위 후 체포된다. 유익수는 이 해 7월 31일 징역 1년형을, 윤병소는 5월 27일 10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게 된다. 홍순칠은 5월 27일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소하여 7월 31일 징역 6월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병권은 5월 27일 징역 6월을, 윤동욱은 징역 8월을 받았으나 동년 7월 31일 태 90도로 감형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는 윤병소에게, 1983년에는 유익수에게, 1992년에는 홍순칠에게, 1996년에는 윤동욱에게, 2006년에는 김병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또한 1990년에는 유익수와 윤병소에게 유익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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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군청 3.1운동 만세시위지
안성군청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30일 안성군 주민 1,000여 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9일부터 안성 읍내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군청 앞에서 시위를 전개했다. 3월 30일 오후 7시부터 100여 명의 안성 주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시작하자, 점차 시위대가 1,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안성장터를 시작으로 안성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른 후 면사무소로 이동하여 면사무소의 유리창을 파괴하였으며, 군청으로 가서 군수에게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였다. 3월 31일에도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행진하며 격렬하게 만세를 부르다가일본 경찰의 진압으로 해산되었다. 권만동(1898~1924)는 1919년 3월 경기도 안성군 읍내면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3월 11일부터 시작된 안성군 읍내면의 시위는 3월 30일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3월 30일 읍내면 동리, 서리, 장기리에서 모여든 500~600명의 시위대는 저녁 8시경부터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로 행진하였다. 다음날 3월 31일 3,000명의 시위 군중이 읍내에 모여서 군청과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등불 행진을 하였다. 읍내면 서리에 살던 권만동도 읍내면의 각 마을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2일 징역 6월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공소와 상고를 했지만, 모두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