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93건
-
거모리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이 고장에서 있었던 3.1 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터에 안내판을 세운 것이다. 거모리 경찰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는 강은식(1885-미상) 등의 주도로 시흥군 군자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3일에 "거모 경찰관 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리자."라는 격문이 각 동리에 배포되었다.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 순사 6명과 군인 7명이 영등포에서 거모리로 파견되었다. 그럼에도 1919년 4월 4일 오전 11시 무렵에 경찰주재소 부근에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강은식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위를 이끌었다. 경찰과 군인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으나 시위는 계속되었다.
-
군자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군자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4월 4일 시흥군 군자면 면민 수백 명이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4월 3일에 거모경찰관주재소 및 군자면사무소를 불질러 부숴버린다는 격문이 군자면 각 동리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이 첩지가 하루 전 일경에게 발각되면서 면사무소 주변에는 영등포로부터 파견된 순사 6명, 군인 7명이 무장 경계하고 있었다. 4월 4일 오전 11시경 경찰관주재소 부근에는 군자면 면민 수백 명이 모였다. 그리고 군자면사무소 앞에서 원곡리에 사는 강은식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격렬한 기세로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당황한 일제 경찰은 총을 쏘아 이를 해산시키고자 했지만 일부만이 흩어졌을 뿐 시위는 계속되었다.같은 시각 죽율리에 사는 김천복도 죽율리 주민들을 설득하여서 거모리로 향하였다. 거모리로 가는 도중 총소리가 나자 일부가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김천복과 몇몇 사람들은 길을 우회하여 만세시위에 합세하였다. 김천복과 죽율리 주민들도 면사무소 및 주재소 부근에 집합한 수백 명의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천복(1897~1968)은 시흥군 군자면 죽율리에서 강은식(1885~미상)은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거모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김천복이 민족대표의 조선독립선언 발표 이후 이에 호응하기 위하여 1919년 4월 4일 군자면 죽률리 주민들을 대상으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기 위하여 거모리에 있는 면사무소 부근에 집합하라고 권하였다. 김찬복은 이장 집에 주민 수십 여 명을 모아 거모리를 향하여 행진하였으나 행진 도중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시위 대열은 흩어졌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찬복 등은 계속 전진하여 거모리 면사무소 및 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이르렀다. 한편, 강은식도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하여 거모리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에 수백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대열에 합류한 강은식은 태극기를 흔들고 군중을 독려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붙잡힌 김천복은 1919년 5월 2일에, 강은식은 1919년 7월 31일 징역 1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김천복에게는 2008년에, 강은식에게는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장수산 묘
장수산(1900-1981)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는데, 동리 사람들을 계몽하여 독립만세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6일 '비밀통고문(秘密通告文)'을 제작하여 각 동리의 구장(區長)에게 전달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낭정호 송덕비
소작인들의 곤궁함을 알고 당시로는 드물게 금전적인 부조를 해주어 칭송받은 낭정호(미상-미상)의 덕을 기려 일제강점기에 소작인들이 세운 비로,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에서 권희(權憘) 외 37명의 소작인이 돈을 모아 송덕비를 건립하였는데, 소작인 중 한 사람이었던 권희는 1919년 4월 7일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 장현리 만세 시위 계획을 주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된 독립유공자이다. 만세운동 이후 가세가 기울어 경성 지주 낭정호의 소작농이 되었으며, 1932년 여민동락(與民同樂) 소작인회 대표를 맡아 소작료 고정세율을 받아내 10년간 변동이 없게 되자 선의에 보답하는 낭정호 송덕비 건립을 추진하여 비문을 썼다.
-
윤동욱 기념비
윤동욱(尹東旭, 1891-1968)은 1891년(고종 28)에 산현리에서 출생하였다. 29세가 되던 1919년 3월 30일, 1,000여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전개되었던 시흥군 수암면 비석거리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는데, 이날의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송치되었고 1919년 5월, 경성법원으로부터 8개월의 징역형을 언도받았으며, 결국 태형 90도에 처해졌다.1923년 이후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고, 해방 후에는 5년간 산현리 구장을 역임, 지역 재건에 힘쓰다가 1968년 77세의 일기로 산현리 자택에서 타계하였다. 1996년 8월 15일,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
장수산 기념비(매꼴공원)
장수산(1900-1981)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는데, 동리 사람들을 계몽하여 독립만세시위를 펼 것을 계획하고 1919년 4월 6일 '비밀통고문(秘密通告文)'을 제작하여 각 동리의 구장(區長)에게 전달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같은 해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언도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윤동욱 부조
윤동욱(尹東旭, 1891-1968)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으로 1919년 3월 30일 수암면(秀岩面) 수암리(秀岩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수암면 면내 18개 동리(洞里) 주민이 3월 30일 오전 10시에 비립동(碑立洞)에 모두 모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작정한데서 비롯되었다. 이날 모이기로 한 비립동에는 2,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여들었는데, 윤동욱은 마을 주민을 이끌고 여기에 참가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유익수(柳益秀)·윤병소(尹秉昭) 등이 군중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고, 그 뒤를 시위군중은 만세를 고창하며 따랐다. 이들은 주재소·보통학교·향교 등을 돌여 행진을 벌였다. 윤동욱은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를 벌이며 보통학교 앞을 지날 때, 순사 임건호(任健鎬)를 만나 만세시위에 가담할 것을 강요하였으나, 그는 불응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이해 5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8월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같은 해 7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권희 집 터
권희(權憘, 1900-1955)는 경기도 안산군 마유면 장상리 안두일(지금의 시흥시 장현동)에서 대대로 세거한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종손으로 태어났으며, 1919년 4월 7일 군자면 구 장터 만세운동을 모의하다 일제로부터 피체(被逮)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권희의 집에서 친구인 장곡리 장수산(이명 장순한), 이종영, 이종진, 이종형, 이응수와 모여 서울에서 온 손님을 통해 들은 만세운동 이야기를 하며 만세운동을 모의하였고, 4월 6일 권희가 대표로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려 한다. 우리들은 이 기쁨에 대하여 내일 7일에 이 마을 구 장터(지금의 서안산 나들목 부근)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려고 한다. 각 주민은 구한국(舊韓國) 국기 1기를 휴대하여 모이라.”는 ‘비밀통고(秘密通告)’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를 동민들이 돌려 보도록 하며 활동하다가 피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하였다.
-
권희 구 묘
권희(1900-1955)는 1919년 4월 6일 시흥군 군자면(君子面) 장현리(長峴里) 자신의 집에서 '일제의 학정에 대해 항거하기 위하여 4월 7일 군자면(君子面) 구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니 참가하라'는 비밀통고서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여 인근 동민들이 돌려보도록 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이에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묘소는 장현동 안동권씨 세장지(世葬之)에 있다가 시화지구 외곽 도로 토취장(土取場)에 편입되어 1993년 장현동 산72번지로 이장하였고, 2016년 6월 1일 지금의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구 묘비만 남아있다. 정부에서는 권희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윤동욱 기념비
독립지사 윤동욱(1891-1968)은 산현동 출신으로 1919년 3월 30일, 수암면 비석거리에서 1천여 명의 주민들의 선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수암면 면사무소 앞에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로 인해 체포되어 같은 해 7월에 형이 확정되어 태형 70대에 처해졌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해 시흥 지역에서 이루어졌던 조국 독립을 위한 숭고한 희생과 정신을 되살리고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계승하고자 하는 지역민들의 자발적인 추진 노력으로 2019년 3월 30일 독립지사 윤동욱 기념비가 건립되었으며, 시흥시 산현공원 후문에 위치하고 있다. 윤동욱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정부는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조병세 구 묘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열사로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철종 10년(1859)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사헌, 예조판서, 좌의정, 중추원 좌의장 등을 역임하고,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무효화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김천복 기념비
김천복(1897 ~ 1968)은 1919년 4월 4일, 죽률리(죽율리) 주민 수십 명을 모아 당시 군자면 거모리의 면사무소, 경찰주재소(현 군자초등학교ㆍ파출소 주변) 앞에서 펼쳐졌던 ‘군자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본 경찰에 맞서 수백 명의 시위대를 이끌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 후 체포되어 1919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고, 동년 6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정신과 지역 독립지사의 업적을 지역의 정체성과 자긍심으로 계승하고자 하는 여론과 추진 노력으로 시흥시 죽율로 생금어린이공원에 2018년 7월 17일 독립지사 김천복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국가에서는 김천복 선생을 기리기 위해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