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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생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낙생면사무소는 1919년 3월 27일 광주군 낙생면과 돌마면 면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7일 새벽부터 29일까지 사흘간 돌마면과 낙생면 면민들이 연합하여 만세시위을 전개하였다. 돌마면 군중들은 거사 당일인 27일 오전 10시경, 분당리 장터에 모여서 한백봉, 한순희 등의 주도하에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게 외치며 본격적인 시위에 돌입하였다. 면내의 여러 곳을 순회하다가 오후에는 낙생면 판교리에 진출하여 낙생면 면민들과 합세하였다. 낙생면 면민들도 돌마면 시위군중들과 연합하여 만세시위을 전개하였다. 시위를 선도한 남태희는 돌마면 시위를 주도한 한백봉, 한순희 등의 권유를 받고 낙생면 면민들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그 결과 돌마면 군중들은 낙생면 면민들과 합세하여 면소재지인 판교리에 집결하였고, 인근 백현리·운중리·궁내리 주민들까지 시위에 합세하게 되면서 그 수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판교리는 면소재지이자, 7명의 헌병이 소속된 헌병주재소가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다. 시위 군중들의 숫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과격한 양상으로 진행되지 않았던 탓인지 헌병들과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당일 저녁 무렵까지 시위대는 만세운동을 계속하다가 해산하였다. 한백봉(1881-1950)는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1919년 당시 광주군 돌마면 율리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곳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 추진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파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여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동리 주민에게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8∼29일의 양일에 걸쳐 돌마면의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행진을 계속하였다. 밤에는 횃불, 낮에는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격렬하고 끈기있게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7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9월 13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순회(1885-1961)는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광주군 천도교구장이던 그는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될 때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지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장차의 활동 자금으로 쓰기 위한 특별희사금 모집에 나섰는데, 이 사실이 일경에게 포착되어 1938년 3월 4일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붙잡혔고, 동년 5월 12일 석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1993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남태희(1867~1926)는 낙생면과 이웃한 면들과 연합해 낙생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는 등 3.1운동의 열기를 이어나갔다. 정부는 202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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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장 묘
윤치장(1876-1972)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정미 군대해산을 당하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국권을 바로 잡고자 1907년 음력 10월경 동지 70여 명을 규합하여 거병하였으며, 대체로 광주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0월 11일 양주(楊州)에서 체포되었는데, 광주군 묵동(墨洞)에서 주둔한 일본 기병대와의 교전, 군자금 모금 및 탄약 구입 등의 사실로 인해 1909년 3월 23일 경성 공소원으로부터 징역 15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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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운동지
수원고등농림학교 학생 운동지는 1920년대 수원고등농림학교 한국인 학생들이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던 곳이다. 1919년 3월 3일 밤, 수원고등농림학교 한국인 학생 36명이 기숙사를 빠져나와 서울의 시위운동에 합세하였다. 이러한 항일의식이 계승되어 이후 1920년대는 동맹휴학과 비밀결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5월 3일에는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학생 전부가 조선인 차별 금지를 포함하여 학교에 7가지 요구 조건을 제출하고 동맹휴교를 단행하였다. 순종의 인산을 당한 1926년에 수원농림학생들은 자진휴학을 결정하고 6월 10일 상경하여 순종의 인산무전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1926년 6월 21일 학생 20명이 일제의 처사에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단행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1926년 4월 수원고농 농학과에 입학한 김찬도, 우종휘, 고재천, 권영선, 김봉일, 김익수 등과 임학과의 백세기, 육동백 등은 1926년 6·10만세사건, 동맹휴교 사건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들은 수양단, 건아단, 계림흥농사, 조선농민사 등의 비밀결사운동을 진행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이처럼 수원고농은 항일학생운동의 진원지이자 핵심적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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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민단 결성지(서호)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는 독립운동 결사체인 구국민단을 조직하고자 비밀리에 준비모임을 하던 곳이다. 구국민단(救國民團)은 1920년 수원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결사단체로 1919년 9월 수원군 동면 남창리에 거주하던 학생 박선태(朴善泰)는 같은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에 거주하던 학생 이종상(李種祥)·이득수(李得壽) 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펴기로 하고, 1920년 7월경까지 수원일대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창가집과 『대한민보』 등 다수를 반포하였다. 한편, 1920년 6월 삼일여학교 여교사 차인재(1895-1971)의 소개로 졸업생 임순남, 최문순(1903-미상) 등이 활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6월 20일에 임순남(林順南)·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 여학생을 동지로 포섭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박선태는 단장, 이득수는 부단장이 되어, 조선독립국가의 실현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입옥 또는 순국한 지사의 가족 및 유족의 구조를 목표로 삼아 활동하였다. 이들은 수원의 서호(西湖) 또는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며 목표달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특히 여학생들은 장차 간호부가 되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실형 또는 집행유예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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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면수 구 묘
임면수(1874-1930)는 삼일학교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수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으며, 1912년 2월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柳河縣三源堡)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데 경기도 대표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개척사업과 신흥학교 설립에 기여하는 한편 군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2월 길림(吉林)에서 활동중 길림영사관 일경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석방되었으나 평생을 고생하다가 병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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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상업강습소 터
1908년 4월 15일 홍건섭, 홍민섭, 김흥선, 양성관, 신준희, 박재윤 등이 중심이 되어 수원군 남부면 남수동에서 수원상업회의소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9년 2월 2일에 수원상업회의소 부속사업으로 상업에 관한 지식, 기능의 강습을 목적으로 수원상업강습소를 부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강습소는 오늘날 수원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된다. 일반 민중의 교육을 위하여 야학으로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 힘으로 경영하는 민족교육기관으로 경제적 자활을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909년 7월 15일 조선상업회의소령이 공포되면서 이 법령에 의한 새로운 상업회의소 설립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여 1916년 4월 수원상업회의소가 폐쇄되고 이에 따라 상업강습소도 경영난으로 폐교의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에 몇사람 유지의 열성으로 그 해 4월 27일 화성학원이라 개칭하고 주학으로 보통과, 중등과, 고등과를 두고, 야학에는 초등과, 전수과를 두게 되었다. 이규재, 최상훈, 정준화, 윤용희 등이 교편을 잡았다. 1926년 2월 20일 홍사훈이 인수하여 같은 해 5월에 화성학원이라는 교명으로 당국의 인가를 얻었으나. 당초 설립목적과는 달리 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화성학원(수원상업강습소)은 애국계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수원의 민족교육기관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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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 독립 기념탑, 대한민국 독립운동 기념비
처음 삼일운동기념탑과 대한민국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던 현재 삼일 위치에는 본래 일제가 세운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일본 순사의 순직비가 세워져 있었다. 1919년 3월 28일, 사강시장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을 진압하던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는 애국지사 홍면옥에게 총상을 입히고 군중을 피해 도망치다 붙잡혀 처단 당했다. 노구치가 처단 당했던 장소가 지금의 사강시장 옆 수협건물 앞, 옛 송산면사무소(=지금의 사강 4리 마을회관), 송산면사무소 뒷산(=송산초등학교) 등이다. 한편 일제는 노구치 순사부장의 순직을 기리는 비를 지금의 방화수류정 인근 삼일상고 부근에 세웠는데 광복 후 1945년 8월 15일에 이 순직비를 부수어 없애고 그 자리에 대한민국독립운동기념비를 세웠다. 1969년에 4월 12일 삼일동지회가 팔달산에 삼일독립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전에 중포산에 세워졌던 기념비를 함께 같은 자리에 이전하기로 하면서 현재의 모습이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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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환 3.1운동기념비
김세환(1889-1945) 선생은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운 후 다시 귀국하여 수원 상업회의소(水原商業會議所)에 근무하다가. 교육사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하고 사직한 후 미국 선교사 「밀리」의 후원을 받아, 수원 삼일남녀학교(三一男女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또 기독교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던 중,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11일 서울 당주동(唐珠洞)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달 21일에는 이갑성(李甲成)의 집에서 독립선언의 방법으로 천도교측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토의하기 위한 기독교측 대표들의 철야회합에 참가하였다. 이 때 그는 이 문제를 이인환(李寅煥)과 함태영(咸台永)에게 일임하고 지방의 동지 규합을 위해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충청남도와 고향인 수원·이천(利川)지역에서 활동하였다. 24일 일단 서울로 올라와서 결과를 보고한 후,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동지 규합에 온 힘을 기울였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도 주도급 인물로 3월 13일 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다음 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출감한 뒤에도 교육사업을 위하여 재산가인 홍사훈(洪思勳)을 설득하여, 수원 상업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육을 통한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조국의 광복과 함께 자신이 건립한 수원 상업학교 사택에서 5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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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학교 아담스기념관
수원의 삼일학교는 1903년 수원 출신 애국지사이자 기독교인인 이하영(李夏榮), 임면수(林冕洙) 선생 등이 주동이 되어 당시 수원군 보시동 북감리교회에서 문을 연 매일학교가 삼일학교의 전신이다. 삼일학교는 만세운동 이전인 1915년 삼일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아담스 기념관은 1923년 삼일학교의 새 교사로 지어졌다. 삼일학교라는 교명은 기독교 교리의 삼위일체를 뜻하고 아담스(Adams)는 삼일학교 신축 교사를 지으라고 헌금을 모아 보내준 미국 교회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삼일이 기미년의 3·1운동을 계속 연상시킨다는 사유로 1938년 결국 팔달심상소학교로 이름을 바꾸어야 했다. 당시 교무주임 유부영(柳富榮) 선생은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창씨개명을 거부하다 강제 징용되었고, 돌아오지 못했다. 삼일이라는 학교 이름은 해방 후 1946년이 되어서야 되찾을 수 있었다. 아담스 기념관은 중국인 시공 책임자인 왕영덕의 감독 아래 붉은 벽돌을 쌓아 올린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이다. 아담스 기념관은 한국전쟁 시기에도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전쟁 당시 아담스 기념관은 네덜란드 군의 막사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아담스 기념관은 현재도 도서열람실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기도기념물 제 175호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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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민단 주요활동지(매향중학교)
매항중학교는 학생독립운동단체 구국민단의 주요 활동지였던 삼일여학교의 후신이다. 본 사적은 매향중학교 정문에 위치하고 있다. 구국민단(救國民團)은 1920년 수원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결사단체로 1919년 9월 수원군 동면 남창리에 거주하던 학생 박선태(朴善泰)는 같은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에 거주하던 학생 이종상(李種祥)·이득수(李得壽) 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펴기로 하고, 1920년 7월경까지 수원일대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창가집과 『대한민보』 등 다수를 반포하였다. 한편, 1920년 6월 삼일여학교 여교사 차인재(1895-1971)의 소개로 졸업생 임순남, 최문순(1903-미상) 등이 활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6월 20일에 임순남(林順南)·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 여학생을 동지로 포섭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박선태는 단장, 이득수는 부단장이 되어, 조선독립국가의 실현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입옥 또는 순국한 지사의 가족 및 유족의 구조를 목표로 삼아 활동하였다. 이들은 수원의 서호(西湖) 또는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며 목표달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특히 여학생들은 장차 간호부가 되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실형 또는 집행유예선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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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환 집
김세환(1889-1945) 선생은 3·1운동 때 중앙지도체 인사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 중앙대학으로 유학하여 새로운 학문을 배운 후 다시 귀국하여 수원 상업회의소(水原商業會議所)에 근무하다가. 교육사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하고 사직한 후 미국 선교사 「밀리」의 후원을 받아, 수원 삼일남녀학교(三一男女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또 기독교 청년회에 가입하여 조국독립을 위하여 노력하던 중, 조국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11일 서울 당주동(唐珠洞)의 박희도(朴熙道)로부터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가담하기로 결심하였다. 이 달 21일에는 이갑성(李甲成)의 집에서 독립선언의 방법으로 천도교측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토의하기 위한 기독교측 대표들의 철야회합에 참가하였다. 이 때 그는 이 문제를 이인환(李寅煥)과 함태영(咸台永)에게 일임하고 지방의 동지 규합을 위해 22일 서울을 출발하여, 충청남도와 고향인 수원·이천(利川)지역에서 활동하였다. 24일 일단 서울로 올라와서 결과를 보고한 후,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동지 규합에 온 힘을 기울였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도 주도급 인물로 3월 13일 체포되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친 재판 끝에 다음 해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출감한 뒤에도 교육사업을 위하여 재산가인 홍사훈(洪思勳)을 설득하여, 수원 상업학교를 설립하여 2세 교육을 통한 계속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조국의 광복과 함께 자신이 건립한 수원 상업학교 사택에서 57세를 일기로 운명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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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시 삼일독립운동기념비
시흥시 삼일독립운동기념비는 조국 광복에 대한 민족적 염원을 후세에 기리고 1919년 시흥시 지역 3.1만세운동 참여자들의 자주독립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군자면 만세 시위의 현장이었던 곳에 시민들의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주탑은 자주독립의 의지와 광복을 향한 염원을 담아 솟아오르는 불꽃을 형상화하고,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민족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태극기를 새겨 넣었다. 전면에는 시흥시 지역 3.1만세운동의 함성을 상징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