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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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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내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평내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평내리 주민 15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13일에 평내리 이장인 이승익은 조선 총독이 배부한 만세운동 확산 방지 안내문을 주민에게 읽어준다는 구실로 100여 명을 소집하여 이들과 함께 만세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에도 주민 15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으나 일본 헌병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옛 양주 지역에서 첫 만세 시위를 주도한 이승익은 징역 10개월, 우보현, 이석준, 김영하, 정기섭, 이보영은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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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1993년 3월 1일 남양주시 화도읍 답내리 555(월산교회 내)에 화도 3·1운동을 주도한 김필규 목사 외 7명의 독립운동가의 공적과 그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화도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달용 등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3월 16일 사전에 발각되어 다수의 주도 인사들이 일경에 피체되었다. 월산교회 목사 김필규(1874~1919) 등은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 시위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 답내리와 월산리의 주민들이 총궐기하여 마석우리 병참 앞으로 몰려가 피체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들은 그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함으로써 5명이 즉사하고 5명이 중상을 입은 채 시위 군중은 해산되고 말았다. 3월 19일 이른 아침에 일헌병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많은 사람을 연행해 갔다. 이 일로 김필규도 피체되어, 1919년 4월 25일 보안법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고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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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병분견소 만세시위지
마석우리 현병분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화도면 주민 1,000여 명이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8일 밤 10시 무렵에 이달용, 김원석, 이승면, 구영식, 김필규 등은 화도면 월산리와 답내리 주민 200여 명과 이곳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1,000여 명으로 늘어나 헌병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들은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는데,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달용, 손복산, 신영희 등 4명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필규는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수정하기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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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선열추념비
국권을 왜적에게 빼앗기고 고종의 승하를 계기로, 기미년 3월 16일 화도면 유지 이달용 외 9인이 모의하여 봉기할 시기와 방법을 결정하던 중 왜경에게 발각되어 3월 18일 아침 이재하, 이승보, 이택하 제위가 피검되었다. 이에 군민들이 마석우리 왜경 병참 앞에 모여 피검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와 같은 순국선열들의 뜻과 얼을 길이 기리고자 화도읍이 1965년 11월에 이 추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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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일 묘
김봉일(1905-1983)은 경남 고성(固城) 사람으로, 1920년 수원고등농림학교 재학 중 농촌사회 계발이 독립운동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하여 같은 학교 학생 10여 명과 항일결사단체 건아단(健兒團)을 조직하였다. 수원군 부근에 여러 개의 농민야학을 설립하여 농민들을 교육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0년에는 '조선인에 대한 조선 농촌 개발'이라는 주장에 동조하여 일본 동경에 있던 조선농우연맹(朝鮮農友聯盟)에 가입하여, 민족농장 건설의 꿈을 키웠다. 일제의 단속을 피하고자 계림농흥사(鷄林農興社), 조선개척사(朝鮮開拓社)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 민족 농민운동을 이어가던 중, 1928년 9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 및 투옥되어 18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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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수 묘
이아수(1898~1968)는 평안북도 강계 사람으로, 이명은 이아주이다. 정신여학교 3년생으로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 남대문역에서 학생 및 시민으로 구성된 대규모 시위대에 합류하여 독립기를 내세우고 적포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연호하며 시가행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과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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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수 묘
이혜수(1891~1961)는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를 조직하고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연락하며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고 애국지사들의 비밀 연락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혁신단(革新團) 조직,〈혁신공보(革新公報)〉발행, 친일 매국노 처단을 위한 암살단의 주요 회의 장소 제공, 숙소 및 의류, 자금 공급 등 적극 협조하였다. 또한, 1922년 12월 김상옥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고, 비밀 연락과 제반 편의 제공 및 독립운동자금 전달을 도우며,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거사 시 나흘 동안 은닉시켰다. 이로 인해 일경에게 끌려가 체포되었으며, 1923년 12월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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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묘
김용식(1897~미상)은 평남 성천(成川) 사람이며, 성천 지역의 부호로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군자금 모금 및 전달을 지원하고 대한국민회 성천 지회의 재정부장에 취임하여 동지들을 규합시키고, 독립신문과 등사한 배일 격문을 성천 읍내에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성천 경찰서원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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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욱 묘
이병욱(1897~1978)은 서울 출생으로, 1919년 3·1독립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과 북경(北京), 상해(上海), 남북 만주의 동지들과의 연락 사무에 종사하였으며, 1920년 무기를 국내로 운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1922년에 조직한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여 활약하였으며, 1924년 국내로 진입하여 통의부(統義府) 지부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부호에게 협박장을 보내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재차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1932년 10월, 재차 만주로 망명하여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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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화광중학교)
1919년, 남양주시 화도읍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3월 16일 화도면에서 이달용, 이승보, 이재하, 이택하, 이덕재, 이인하, 김우동, 이덕주, 류인명, 홍순철, 윤태익, 윤준, 구영식은 봉기할 것을 결정하고 연락하던 중 일제에게 발각되어 18일 아침 이재하, 이승보, 이택하는 피검되었다. 그날 밤 답내리 월산리의 주민이 총궐기하여 마석우리 병참 앞에 쇄도한 후 피검인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앞장서 나갔던 이달용, 손복산, 신영희, 유상규, 이교직은 일제의 무자비한 총검에 순국하였고 이재혁, 윤균, 강덕여, 윤정석, 원대현은 중상을 당했다. 3월 19일에 일제는 또다시 김필규, 이승민, 강선원, 윤성준, 남국우용, 김원석, 권은, 이윤원을 연행하였다. 남양주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85년에 독립기념비를 세웠으나, 기념비가 있던 장소가 험난하다는 이유로 1998년 11월에 봉기 발원지인 화광중학교 앞에 3.1운동기념비를 새롭게 다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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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직 묘
이교직(1882~1919)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18일 밤 이달용(李達鎔) 등이 주동한 화도면(和道面) 마석모루(磨石隅)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만세 시위 계획을 세우다가 발각되어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마석모루에 있는 헌병 주재소 앞에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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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성 의병 전투지
김연성(1870~1909)은 1907년 9월 창의하여 동년 12월까지 경기도 양주·적성 등지에서 부하 30~40명을 이끌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1908년 1월 13도창의대진소가 결성될 때, 김연성은 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 권중희(權重熙)의 휘하에서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이 무산된 뒤에는 1908년 1월 이강년 의진에 합류하여 의병 소모관을 역임하였으며, 1909년 1월부터는 관동창의원수부의 중군장이던 이은찬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리하여 김연성은 1909년 1월부터 동년 4월 이은찬이 체포될 때까지 경기·강원도·황해도 일대에서 일본군 헌병분견소 습격 및 군자금 모집 등의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09년 11월 29일 평양공소원에서 교형(絞刑)을 받아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