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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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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규 묘
나상규(1873-1950)는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진건면(眞乾面) 오남리(梧南里)에서 주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조선 독립선언의 취지에 찬동하여 동리(同里)에서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과 6월 2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안정 나씨 대종회에서 종중의 뜻을 모아 묘소에 나상규 선생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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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와부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와부면 송촌리, 덕소리, 조안리 일대 주민 500여 명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5일에 이정성, 김춘경, 김현모 등은 송촌리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이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덕소리로 행진하던 과정에서 조안리와 그 부근 주민들도 합류하여 시위대는 500여 명까지 늘었다. 덕소리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세 사람이 일본 헌병에 체포되자 시위대는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이 공포탄을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고, 시위 군중 4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정성과 김현모는 1919년 7월 5일에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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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기 묘
김선기(1907-1992)는 서울 종로(鐘路) 사람으로, 1931년 1월에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의 사전 편찬사업에 참여 및 1933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 발표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 〈표준말 사정〉과 〈외래어 표기법 사정〉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어 강습회의 강사로 전국을 순회하며 국민들에게 국어를 교육하였고, 1935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음성학협회 대회에서 한국어의 조직을 과학적으로 소개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겪었으며, 1945년 8·15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어 연구에 종사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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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상
춘사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會寧) 사람으로, 1919년 4월 초순 회령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는데 4명의 동지와 함께 회청선(會淸線) 7호 터널 폭파 및 전선 절단 임무 등 항일전선의 대열에 적극 투신하였으나 1921년 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향으로 압송되었으며, 1921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화계로 진출하여 한국 영화예술을 개척하였고, 「아리랑」 등 주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제작하여 일제히 항일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화체육부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1995년 4월 20일 춘사 나운규 선생 흉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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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의거 애국선열추념탑
본 탑은 1994년 8월 15일에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715-1 용진교회 뒤편, 남양주송촌초등학교 앞 근린공원 내에 건립된 것으로서,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 있는 용진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3·1운동 참가자 및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애곡선열추념탑이다. 용진교회 이정성 장로, 김현모, 김정하 등은 경진학원 교사, 교회 청년들과 함께 3월 14일 경진학교에서 사용 중인 일장기로 태극기를 제작했다. 3월 15일 이른 아침부터 이들은 교회 신도와 동리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조안리와 능내, 팔당을 지나, 면 소재지인 덕소리에 다다르니 시위 군중이 50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면사무소 주위를 돌며 시위를 강행했다. 서울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들에게 주동자 이정성, 김윤경, 정일성 등이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어 13명이 추가 연행되어 실형 선고를 받고 각각 서대문, 원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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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한 묘
이내한(이명 이내안, 1883-1954)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15일에 양주군 와부면(瓦阜面) 송촌리(松村里)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군경에 붙잡혀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약 1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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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동 묘
이갑동(1896-1939)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15일 양주군 와부면(瓦阜面) 송촌리(松村里)에서 주민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인근 덕소리(德沼里)를 향해 시위행진을 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5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5월 31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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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성 묘
이정성(1878-1948)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14일과 15일에 걸쳐 와부면(瓦阜面) 일대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3월 14일 시위 군중을 동원하여 송촌리(松村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고 와부면 일대를 행진하였으며, 이튿날 이른 아침에도 송촌리와 부근 동리 주민 1백여 명을 송촌리에 모이게 하여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덕소리(德沼里)로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 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그해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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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사, 부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봉선사·부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봉선사 승려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선언문을 제작한 곳이다. 1919년 3월 29일에 봉선사 승려 태허(김성숙), 지월(이순재), 완수(강완주) 스님과 약종상(약재를 파는 장수)였던 김석로가 봉선사에서 조선 독립단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시위의 전개와 방침을 논의하고 선언문 200여 장을 제작하였다. 이들은 선언문을 진접면 일대에 배포하고 30~31일에 걸쳐 부평리 광릉천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태허 스님을 비롯한 4명은 전원 체포되었으며, 9월 11일에 고등법원으로부터 각각 1년~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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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천 3.1운동 만세 시위지
광릉천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부평리 주민 1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9일에 부평리에 사는 이재일(1875-1965)은 '주민 일동이 광릉천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격문을 받았다. 그는 즉시 주민들과 격문을 돌려 읽고 대책을 논의하여 3월 31일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당일 시위에는 100여 명이 광릉천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으나, 일제 헌병에 가로막혀 해산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이재일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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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접 3.1운동기념비
1919년 3월 30일 남양주 진접 주재소 앞 광릉 천변에 1,0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던 중 이순재, 김석로, 김성암, 강완수 등 무수한 인원이 일경에게 체포된 1차 만세운동에 이어, 3월 31일 역시 광릉천 자갈밭에서 1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이재일, 최대봉, 박석몽, 최대복, 유희상, 이흥록, 최영갑, 양삼돌 등 주민이 다수 체포된 2차 만세운동이 있었다. 그 외에 금록리에서도 13명의 청년이 주동이 되어 40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진접 3.1운동 기념비는 1919년 3월 13일부터 31일까지 진접읍(당시 진접면 부평리)를 비롯해 평내동(당시 미금면 평내리)와 와부읍·조안면(당시 와부면) 등에서 총 22회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남양주 주민들의 애국충정을 되새기고 후손들에게 거룩한 귀감으로 남겨주기 위해 남양주시에서 시민의 이름으로 1999년 5월 20일에 세웠다. 그러나 진접중학교 외곽에 방치되고 말았고, 잊힌 진접 3.1운동을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2019년 12월 11일 진접중학교 정문 안으로 본 비를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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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
장현공립보통학교 동맹 휴학지는 일본인 교사의 민족 차별 행위에 대항하여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단행한 곳이다. 당시 장현공립보통학교 6학년 담임 교사였던 우에무라 사다요시(上村定吉)는 1종 교사인 자신과 달리 조선인 교사들은 2종 교사이기 때문에 자격이 없다는 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나아가 여기에 대해 질문한 학생에게 욕설을 퍼부었으며, 평소 지도 방식 또한 성실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결국 불만이 폭발하여, 1926년 5월에 장현공립보통학교 6학년 전원은 민족 차별에 항거하고자 동맹 휴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