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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고촌면민 독립만세 유적탑
신곡노을공원 내에 건립된 기미년 3월 고촌면민 독립만세 유적탑은 고촌면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을 한 애국지사 6인(김정국, 김정의, 윤재영, 김남산, 윤주섭, 이흥돌)의 이름과 본적, 묘지, 판결 내용, 포상과 포상년도가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기미년 3월 고촌면민 독립만세 유적탑은 2007년 5월 건립되었으며 2008년 3월 24일 제막식을 가졌다. 1919년 3월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고촌면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총 높이 7.5m, 전면 폭 3.25m, 측면 폭 1.35m이며 전체적 모형을 칼의 형태로 만세운동 당시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고, 부분적으로 탑 상단을 우주선의 대칭 모양으로 고촌의 장래를 웅비로 표현했다. 또한, 상단에 연꽃 문양을 넣어 가신 이들에 번뇌를 씻어주고, 후면에 소나무, 학, 사슴 등은 가장을 잃고 멸문지화를 당하였던 가정에, 가족이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라는 마음을 표현했으며, 두 마리의 용으로 하여금, 이 탑을 만든 후세들에 마음을, 임들께 전하여 달라는 소망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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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산 묘
김남산(1889-1966)은 1889년 12월 16일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고촌면(高村面) 신곡리(新谷里, 현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고향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고촌면 신곡리 만세 시위는 3월 24일과 25일 양일간 이루어졌다. 3월 24일의 만세 시위는 김정국(金正國)과 윤재영(尹在英)이 주도하였다. 윤주섭(尹周燮)을 비롯한 신곡리 마을주민 50여 명이 만세 시위에 동참해 신곡리 뒷산에 모여 김정국·윤재영이 선창하는 조선독립만세 구호를 다 함께 연호하였다. 서울에서 중동고등보통학교에 다녔던 김정의(金正義)에게서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었다. 김정의·이흥돌(李興乭) 등과 함께 3월 24일 만세 시위에 이어 3월 25일 만세 시위를 기획하였고, 김정의의 집에 모여 태극기 2개를 만들었다. 이날 신곡리 이상윤(李上允) 집 앞뜰에 마을주민 약 50명을 모아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때 3월 24일 시위를 주도한 김정국 등도 동참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마을에서 행진하였다. 김정의·윤재영·김정국·이흥돌·윤주섭 등과 함께 체포되어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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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촌 당산미 3.1운동 유적지
독립운동의 의지를 굳게 갖고 있었던 고촌의 김정의가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을 독려하여 김정국, 윤재영, 김남산, 윤주섭, 이흥돌과 함께 밤새도록 태극기를 만들었고 1919년 3월 24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고촌 당산미 3.1운동 유적지이다. 이후 김포 고촌읍의 당산미에서는 긴 장대에 태극기를 높이 꽂아놓고 계획적으로 산에 모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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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섭 집
정인섭(1886 - 1944)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양곡리(陽村面陽谷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당시 초원지리(草元芝里)의 서당 교사로서, 이날 오후 4시경에 자신이 전날 제작한 태극기를 휘두르며 3백여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시위 군중을 경찰서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인솔하여 가려 할 때, 일본 경찰에 의해 태극기를 압수당하고 체포되어, 그해 7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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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모 집
임철모(1883 - 1919)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양곡리(陽村面陽谷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던 시위 군중을 경찰서 주재소와 면사무소로 인솔하여 가려 할 때, 일본 경찰에 의해 태극기를 압수당하고 체포되어, 그해 6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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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서 집
박충서(1898-1934)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에 참여하고 종로, 대한문, 남대문, 각국 영사관 앞을 순회하며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고 귀향하여,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양곡리(陽村面陽谷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진행을 주도하였다. 양곡 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장을 행진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그해 9월 4일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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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
일제강점기에 경서 지방의 대표적인 장터였던 양촌면 오라니 장터과 월곶면 군하리 장터에서 3.1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벌어졌다.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은 자랑스러운 역사의 고장 양촌읍의 오라니 장터 3.1만세운동을 재조명하고 애국지사의 투철한 애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2013년 2월에 김포시 양촌읍에 개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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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니장터 3.1운동 안내판
오라니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는 1919년 3월 23일 김포 양촌면, 대곶면민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김포지역에서는 1919년 3월 23일 양촌면 오라니장터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5월까지 총 7회의 시위에 5,000여 명이 참여하는 등 만세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김포 만세운동은 서울에서 3·1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한 청년·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양촌면 출신 박충서는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귀향하여 태극기를 들고 오라니장(양곡시장)의 군중 수백명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박충서의 만세 선창에 박승각, 박승만, 정억만,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 등이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대곶면 초원지리의 서당교사 정인섭은 ‘독립만세’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 임철모와 함께 3월 23일 오라니장(양곡시장) 서쪽에서 군중 300여 명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임철모는 거사 후 출동한 용산 헌병대에 체포되었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많은 고문을 받아 그해 6월에 순사하였다. 이와 함께 거사를 주모하였던 정인섭은 징역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이외에도 박승각과 박승만은 각각 1년의 징역형을 받았으며, 박충서는 2년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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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독립만세 궐기장 비
3.1 독립만세 궐기장 비는 1919년 3월 23일 임철모, 박충서, 정인섭 등의 주도하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김포 오라니 장터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지역민의 뜻을 모아 1998년 3월 23일에 설립한 표지석이다. 김포 양곡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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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니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김포의 오라니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김포군 양촌면, 대곶면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에 박충서는 박승각, 박승만 등과 함께 장터에 모인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시위를 벌였다. 오후 4시에 대곶면 초원지리의 서당 교사였던 정인섭도 임철모와 함께 오라니장터 서쪽에서 시위대 300여 명과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후 임철모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박승각, 박승만, 정인섭은 각각 징역 1년, 박충서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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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규 집
윤영규(1882 - 1926)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김포군 월곶면(月串面)에서 인근 마을인 갈산리(葛山里), 조강리(祖江里) 등의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군하리(郡下里)에 있는 공자묘(孔子廟)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으며, 그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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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우 집
임용우(1884 - 1919)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월곶면 갈산리(月串面葛山里), 조강리(祖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덕적면(德積面)에 있는 명덕학교(明德學校) 교사로서 이날 정오경 갈산리에서 만세시행 행진을 벌이고, 오후 2시경 군하리(郡下里) 향교와 공립보통학교와 면사무소를 차례로 행진하였다. 4월 9일에는 재직 중인 명덕학교 운동회를 덕적도(德積島) 해안가에서 개최하여, 여기 모인 많은 학생과 참관자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선창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제의 잔인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임용우의 생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