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593건
-
이아수 구 묘
이아수(1898 - 1968)는 정신여학교 3년생으로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 일대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가, 남대문역에서 학생 및 시민으로 구성된 대규모 시위대에 합류하여 독립기를 내세우고 적포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 군중과 함께 만세를 연호하며 시가행진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과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13도창의대군 수택리 집결지 기념비
'13도창의군’을 재조명하고, 의병들의 희생과 업적을 후세에 알리고자 2020년 12월에 구리시와 13도창의군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원수부 13도 창의대진 수택리 집결지 기념비’를 경기도 구리시 수택동 846-7, 장자호수생태체험관과 장자교 사이에 설치했다.
-
아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구리시 아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아천리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8일에 양주 구리면 아천리에서 면서기인 이강덕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심점봉 등 아천리 주민 수십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5시 무렵에 이웃 동리인 토평리와 교문리까지 행진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한 이들은 다음 날에도 인근 아차산에 올라가 태극기를 산꼭대기에 꽂고 만세를 불렀다. 이강덕, 심점봉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이강덕 묘
이강덕(1892 - 1955)은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9년 3월 28·29일 심점봉(沈點奉)과 함께 구리면 아천리(九里面我川里)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당시 면서기로서 동료인 심점봉과 함께 이 날 오후 5시경 수십명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여, 그들의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들고 인근의 토평리(土坪里)·교내리(橋內里) 일대를 시위 행진하였다. 이튿날 시위군중을 인근의 아차산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 태극기를 꽂아 놓고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이 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았다.
-
군포 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군포 항일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은 조국 독립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옛 군포 지역민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을 알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높이 11m의 기념탑은 세 개의 기둥 위에 항일의 혼을 의미하는 불꽃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는 형상으로 양옆으로는 독립운동을 펼치는 군포시민과 이들을 총으로 제압하려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2016년 3월 군포시에서 건립되어 5월 10일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
군포장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동판
1919년 3월 31일에 시흥군 남면 주민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 2,000여 명이 연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으로, 이것을 안내하는 동판이 바닥에 부착되어 있다. 군포장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시흥군 남면 주민들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31일에 시흥군 남면주민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 약 2,000여 명이 연합하여 군포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군포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포장역 앞에 있는 경찰 주재소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군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
군포장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군포장 경찰 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시흥군 남면 주민들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들이 연합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31일에 시흥군 남면 주민과 수원군 의왕면 주민 약 2,000여 명이 연합하여 만세를 외치며 군포장역 앞에 있는 경찰 주재소까지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경찰과 군대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
김남산 집 터
김남산(1889-1966)은 1889년 12월 16일 경기도 김포군(金浦郡) 고촌면(高村面) 신곡리(新谷里, 현 김포시 고촌읍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고향에 거주하면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고촌면 신곡리 만세 시위는 3월 24일과 25일 양일간 이루어졌다. 3월 24일의 만세 시위는 김정국(金正國)과 윤재영(尹在英)이 주도하였다. 윤주섭(尹周燮)을 비롯한 신곡리 마을주민 50여 명이 만세 시위에 동참해 신곡리 뒷산에 모여 김정국·윤재영이 선창하는 조선독립만세 구호를 다 함께 연호하였다. 서울에서 중동고등보통학교에 다녔던 김정의(金正義)에게서 3·1운동 소식을 전해 들었다. 김정의·이흥돌(李興乭) 등과 함께 3월 24일 만세 시위에 이어 3월 25일 만세 시위를 기획하였고, 김정의의 집에 모여 태극기 2개를 만들었다. 이날 신곡리 이상윤(李上允) 집 앞뜰에 마을주민 약 50명을 모아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때 3월 24일 시위를 주도한 김정국 등도 동참하여 독립 만세를 부르며 마을에서 행진하였다. 김정의·윤재영·김정국·이흥돌·윤주섭 등과 함께 체포되어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이흥돌 집 터
이흥돌(1888 - 1920)은 1919년 3월 24일 고촌면(高村面) 신곡리(新谷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마을 주민 10여 명에게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여, 함께 마을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다음날에도 만세 시위를 이어갔다. 만세 시위로 체포되어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0년 2월 10일 옥고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1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윤병소 기념비
윤병소(1887 - 1919)는 1919년 3월 30일 시흥군 수암면(始興郡秀岩面) 일대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 해 3월 29일 이봉구(李鳳求)로부터 동군 화정리(花井里) 일대에 이튿날의 독립만세 운동 계획에 참가를 권하는 격문이 돌려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3월 30일 오전 10시경, 집합 장소인 수암리(秀岩里) 비석거리(碑石洞)로 나아갔다.여기서 그는 유익수(柳益秀)·홍순칠(洪淳七) 등과 함께 18개 동일에서 모인 2천여 명의 대대적인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마침 와리(瓦里) 사람들이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읍내로 시위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으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군중과 함께 공립 보통학교·경찰 주재소·면사무소를 차례로 시위 행진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주동자 검거 때 체포되었으며, 이 해 5월 27일 경성(京城) 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0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윤재영 집 터
윤재영(1888-1922)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4일 김포군 고촌면(高村面) 신곡리(新谷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김정의·김정국·윤주섭 등과 함께 인근 주민 50여 명을 규합하여 신곡리 뒷산에 모이게 한 후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일경의 무력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하다가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윤주섭 집 터
윤주섭(1887 - 1957)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4일 김포군 고촌면(高村面) 신곡리(新谷里)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인근 주민 50여 명을 규합하여 신곡리 뒷산에 모이게 한 후에,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일경에 붙잡혔다. 그해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