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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기념관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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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집
구연영(1864-1907)은 경기 광주사람이고 호는 춘경(春景)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한때 정부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한 그는, 1895년 12월 31일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등과 함께 거의하여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였다.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었으며, 전투적이고 대규모적인 조직편제를 갖추어 1896년 1월 백현(魄峴)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백현전투는 을미의병사상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을 뿐 아니라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쾌거였다. 이어 2월 이현(梨峴)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폈으며 전열을 재정비하여 2천여 명으로 군세를 증강한 후 심진원(沈鎭元)의 광주의진(廣州義陣),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陽根義陣)과 함께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형성하여 남한산성을 공략, 입성하였다. 구연영은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장춘명(張春明)·한창섭(韓昌燮)·차화춘(車化春) 등 수십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신도대회를 통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을 폈다. 또한 이천·여주(驪州)·광주(廣州) 일대를 순회하며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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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구정서 전투지
1895년 10월 일본이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을미사변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할 때, 구연영(1864- 1907) 중군장은 서울의 우국지사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신용희 등 여러 장수와 획책하여 양근, 지평, 광주, 안성, 음죽 등지를 중심으로 모병 화포군을 조직하고 이천수창의진을 만들었다. 13년간 남한산성을 비롯한 각지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우고 구국회, 독립협회, 자강회, 친일일진회 타도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진회원들에 밀고로 선생의 장남 구정서와 함께, 부자가 동시에 이천읍에서 총살당하여 44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구정서(1882 - 1907)는 1904년 보안회와 1907년 대한자강회에 가입하여 배일운동에 활동하다가 1907년 경기도 광주에서 부친 구연영이 조직한 구국회에 참여하여 일진회의 친일행위를 성토하며 항일운동을 하던 중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군에게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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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수창의소 의병 전투지(노루목 장터)
1896년 1월에 이천 수창의소 의병이 백현전투에서 패하고 도망가는 일본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둔 곳이다. 이천 수창의소(首倡義所)는 김하락을 중심으로 경기도 이천에서 편성된 의병 부대이다. 이천 수창의소 의병은 1896년 1월 18일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이 이천으로 공격해오자 백현(魄峴, 광현(廣峴)으로도 불림)에서 매복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들 의병은 경기도 광주 방면으로 퇴각하는 일본군 수비대를 1월 19일 새벽까지 추격하여 노루목 장터에서 거의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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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장터 이천 의병 전투지
장항장터 이천 의병 전투지는 연합 의병부대가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둔 곳이다. 1896년 1월 17일 일본군 수비대 100여 명이 이천 지역 의병을 토벌하고자 공격해왔다. 이때 이천수창의소 의병진은 백현으로 이들을 유인하여 밤낮으로 협공을 가한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서, 전투에 패하여 달아나는 일본군을 밤새도록 추격한 의병진은 광주 노루목(장항) 장터에서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이 전투는 경기도 각 지역 의병진의 연합부대 성격을 가진 이천수창의소가 조직된 이후 첫 번째 대승리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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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안역 의병 전투지
경안역 의병 전투지는 의병 부대가 광주 순사 및 일본 헌병 연합 토벌대와 전투를 벌인 곳이다. 경안역은 옛날에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관리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말을 갈아탈 수 있도록 광주지역에 설치한 일종의 교통 통신 시설이며, 지금의 역동이라는 지명은 여기서 비롯되었다. 1908년 1월 8일에 20여 명의 의병부대가 경안역 부근에 출동하여 이천수비대 장교 척후와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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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철수 묘
설철수(1914 - 1981)은 경남 창원(昌原) 출신으로, 1934년 경남 창원군 소학교 학생들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1934년 9월 삼동공립보통학교(三東公立普通學校) 훈도(訓導)로 임명된 후 역사 수업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후 통영제일공립심상소학교(統營第一公立尋常小學校)에서도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다 일경에 붙잡혀 1938년 12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출판법으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설철수는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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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조 묘
정운조(1888 - 1951)는 경남 창원(昌原) 출신으로, 1919년 4월 경남 창원군 웅동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웅동면 계광학교(啓光學校)의 직원인 주기용 등이 주도한 시위에 참여하였고, 400명의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후 체포되어 1919년 5월 21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았으며, 1930년 웅천소작농조의 집행위원으로 소작료를 절감하고, 소작 조건을 개선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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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신 묘
정제신(1886 - 1928)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극 참여하여, 시위대를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강제해산 되었고, 일경에 체포되어 같은 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1928년 5월 31일 계속되는 일경의 핍박과 박해에 견디다 못하여 1928년 5월 31일 자결로써 항거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은 정제신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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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선, 조천일, 조창선, 조만선 기념비
조창선(1897 - 193)은 황해 평산(平山) 출신으로, 1920년 7월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경고문을 자산가들에게 배포하였고, 1921년 4월에는 20여 명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채증서와 군자금 모집 통지서를 동장을 통해 평산군 고지면(古之面)의 동민들에게 배부토록 하여 평산군 일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였다.그 후 밀정 처단 사건 이후 이만석의 자택에 은신하고 있던 중 일경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교전 끝에 붙잡혀, 1923년 1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1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6월 11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애국지사 조창선 영모기념비는 후손들이 2015년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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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석 묘
김중석(1883 - 1966)은 함남 함흥(咸興) 출신으로, 1919년 함흥군 함흥면에 있는 사립 영신학교 교사로 재직 중 함흥지역 3.1운동을 주동하여 독립선언서 3,000여 매를 등사하고 태극기 10여 매를 제작, 독립만세시위를 위한 자금을 조달하는 등 활동하다가 거사 당일 아침에 일경에게 시위 계획이 탄로되어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교편을 잡으면서 은밀히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으며, 1938년에는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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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집
김규식(188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에 시위대 장교 등으로 재직하다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의병 투쟁에 합류, 철원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무기를 구입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했으며,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사단장으로 취임, 이후 교관 등으로 활동하며 청년 교육에 힘썼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같은 해 대한독립군단이 편성되자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김규식은 부대를 재편성하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영농활동을 벌였다. 1925년 신민부, 1926년 고려혁명당 등에서 활동하고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연길현에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1931년 3월 공산당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