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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근 집 터
현학근(1884-1944)은 기미년 3·1운동 때 덕천(德川) 서문시장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1924년 경기도 가평(加平)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4년 11월 12일 임일봉(林一奉)과 오일보(吳一寶)의 권유로 태극교(太極敎)에 입교했다. 태극교는 겉으로는 종교를 표방했으나, 명칭에서 보듯이 민족적 성격이 짙은 단체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태극교에 입교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는 한편 조선 독립을 이루기 위해 동지 규합을 위한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34년 11월 15일, 그는 정태용(鄭泰鏞)에게 “조선은 언제까지나 일본에 예속하는 것이 아니라, 4, 5년 후에는 악질이 유행하고 병란·재앙이 일어나 현재 인민의 대부분은 사망하고 그 때 정왕(鄭王)이 나타나 조선을 독립시키고, 충청도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에 즉위하며, 태극교도는 정왕을 섬기어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고로 태극교에 입교하여 독신해야한다”고 권유하여 입교시켰다. 이후 차원익(車元翼) 등을 대상으로 “태극교는 천의에 기초하는 것으로 태극의 세(조선 독립)도 가깝고 성천을 통하여 모국을 얻어 교도는 고위로 나아가 영원히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포교를 통해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현학근은 1939년 1월 10일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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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등사 삼충단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운악리에 위치한 운악산 현등사에 설치된 삼충단에 관한 안내판이다. 가평 삼충단은1986년 6월 19일 가평군의 향토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삼충단은 조병세, 최익현, 민영환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10년에 설립되었으며 1989년에 복원하였다. - 조병세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 가평에 은거하던 의정대신으로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려 상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최익현 선생은 1895년 을미사변과 1906년 을사조약 두 차례 모두 의병을 궐기한 인물로써 1906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대마도 옥사에서 순국하였다. - 민영환 선생은 무관 출신으로 을사조약을 보고 대한문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을 위해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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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봉산 병풍바위 암각문
화봉산 병풍바위 암각문은 면암 최익현과 이 고장의 출신 대학자 유기일이 자주 만나던 바위로 유기일의 시와 최익현이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화봉산은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으로 산 아래에는 이항복 선생의 사당인 화산서원이 있다. 원래는 꽃뫼(화산/花山)라고 불렸는데 산 인근에 위치한 화산 서원에서 수학하는 선비들이 화봉산이라고 부르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이 산 위에서 횃불을 피워 위험을 알렸기에 화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봉산 중턱에 있는 이 병풍바위는 최익현과 유기일이 자주 만나던 바위이며 바위에 새겨진 유기일의 시와 최익현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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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산사(최익현, 최면식 사당)
채산사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에 있는 최익현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1976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채산사는 1906년 최익현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들의 발의로 건립되었으나 1927년과 1943년 일본군의 훼철과 유림의 재건이 반복되던 중 1975년 건물을 모두 해체 복원한 것이다. 사당 주위를 담장으로 둘렀으며 입구는 3칸의 솟을 삼문으로 꾸몄다. 사당은 이벌대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규모를 이루고 있는데 정면칸은 개방된 퇴칸으로 이루어졌다. 지붕은 정면과 배면쪽으로만 면이 구성된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측면의 박공부에 풍판을 달아 목재 마구리(직각으로 자른 끝면)의 부식을 방지했다. 전면은 서까래위에 각이 진 부연을 덧달아 처마를 길게 빼낸 겹처마이고 배면은 서까래로만 이루어진 홑처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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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묘
조용한(1894 - 1935)은 1920년 음력 12월 20일경 김홍제(金鴻濟)·오인영(吳麟泳)과 함께 독립군자금을 모집한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완구용 권총 한자루를 구입한 다음 중국 동삼성(東三省) 소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명의의 인장을 조각하여 군자금 영수증서를 작성하고 수원(水原)·안성(安城)·진위(振威) 등지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오인영을 방문하러 가던 중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1년 5월 5일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소위 정치범죄처벌령 위반 및 강도예비 등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동년 6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8년 5월 중국 상해로 도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총장인 친형 조용은(趙鏞殷)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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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고주리 참살현장 입구 안내판
제암리 사건은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堤岩里)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은 3월 중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절정에 달하였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리(發安里)의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이 시위에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일본인 순사부장이 사망하였고,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도 불에 탔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가둔 후 불을 질렀으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교회에서만 23명이 사망하였고, 인근의 고주리 주민도 6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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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흥 의거지
백사면사무소는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자 이수흥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습격한 곳으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의미있는 공간이다. ◇ 백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 백사면 만세 시위는 송말에 사는 임덕재·임예재·임경순·임재순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1919년 4월 2일 마을 사람들을 인솔하고 송말리 앞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른 후 면 소재지가 있는 현방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시위 참가자의 수가 점점 불어나 많은 수의 군중들이 현방리에 모여들었는데, 당시 백사면장인 이연의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 애국지사 이수흥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19세가 되던 해에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이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길림성(吉林省)에 세운 신명(新明)학교를 졸업하였다.1923년 7월경에는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확대 개편되자 의군부 총재 채상덕(蔡相德)의 부하로서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그후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담한 그는 1925년 새총독이 시찰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압록강 상의 증기 란치(steam launch : 船載大型端艇)에서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한편 그는 주만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에 임명되어 1926년 5월에 모젤권총 1정과 동 실탄 147발, 부로닝 구식 권총 1정과 동 실탄 29발을 휴대하고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주살하기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그는 먼저 군자금이 필요했으므로, 동년 7월 6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발참리(平山郡安城面發站里)에 사는 김상렬(金相烈)을 찾아가 요청하였으나 뜻일 이루지 못하였다.다시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邑內面中里)에 사는 유택수(柳澤秀)의 집으로 가던 도중 동월 10일 서울 동소문(東小門)파출소를 습격하여 보초근무중인 일경 덕영승차(德永勝次)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동년 9월 9일에는 안성(安城)에서 유택수와 함께 군자금 요청을 거절하는 부호 박승육(朴承六)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을 사살하였다.그리고 10월 20일에는 경기도 이천군 현방(玄方)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후 다시 백사(柏沙)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 송천의(宋天義)를 사살하였다.그는 그후 새로운 계획을 위하여 변장하고 서울로 피신하였다. 동년 10월 25일에는 동지 유택수(柳澤秀)로 하여금 서울 수은동(授恩洞)에 있는 대성호(大成號) 전당포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부음(訃音)을 듣게된 그는 부득이 수원(水原)으로 내려가 발상하였다. 이때 이천경찰서장 하기(河岐)는 범인의 신장이 불과 5척이라는 말을 듣고 관내에 거주하는 신장이 5척되는 사람을 모조리 조사하게 하였다.이에 따라 일경 3천여명이 동원된 삼엄한 계엄상태의 3개월 동안, 4대사건을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흔적도 없이 수행하던 그는 유택수와 함께 11월 6일 체포되어 3년의 예심 끝에 1928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9년 2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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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호 흉상
조철호(1890~1941)는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에 유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유학중에 동기생인 지청천(池靑天)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맹약했다. 1917년 조선군 제20사단의 용산(龍山) 부대에 배속된 것을 기회로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당할뻔 했으나 일본인 고관의 비호로 죽음을 면하고 제대되었다. 퇴역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학생들을 구한국군 교련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오산학교의 체육교사로서 이승훈과 교장 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독립선언의 계획을 통고받고 2월 하순경부터 오산학교 중학부 학생들에게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이 기회에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해야하므로 오산학교 생도는 시기의 도래를 기다리라」고 가르치고, 정주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3월 5일 만주로 망명했다가 봉천성(奉天省) 하마당역(下馬塘驛)에서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서울 중앙학교(中央學校)의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구한국군 교련방식에 의한 체육교련을 시키고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22년 10월 5일에는 조선소년군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창설하여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면서 청소년들을 독립전쟁에 씩씩한 전사가 될 수 있는 민족간부로 육성하기 위하여 진력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에는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후원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동년 6월 26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38년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의 체육교사가 되어 청년학생들을 훈련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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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목교회(구연영 창립교회)
노루목교회는 구연영이 1899년 3월 17일에 건립한 것으로, 구연영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국권회복 운동을 펼치던 중, 민족의 희망은 복음 전도에 있음을 깨닫고 여러 교회를 세워 구국운동을 펼쳤다. 구연영(1864~1907)은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구국계몽활동 등의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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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편소 터
원곡 양성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으로 농민층이 주류가 되어 일으킨 대표적인 항쟁이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특히 2,000여명이나 되는 다수의 민중이 참여하였고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일본인 상점 가옥 등을 파괴 혹은 방화하는 등 공격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더불어, 경부선 철도 차단을 시도하는 등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 중에서 3대 만세운동(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의 시위,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의 시위 포함)으로 손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 중에서 양성우편소는 시위대가 파괴한 장소 중 한 곳으로, 현재 벽화와 안내판이 그 정신을 기리는 의미로 설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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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리여수 가게 터
일본인 외리여수가 운영하던 잡화상이 있던 곳으로, 만세운동 때 주민들이 가게를 망가트린 대가로 외리여수가 큰 손해배상을 요구하여 주민들은 연대 피해 보상에 의해 큰 생활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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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면사무소 터
원곡 양성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으로 농민층이 주류가 되어 일으킨 대표적인 항쟁이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특히 2,000여명이나 되는 다수의 민중이 참여하였고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일본인 상점 가옥 등을 파괴 혹은 방화하는 등 공격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더불어, 경부선 철도 차단을 시도하는 등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 중에서 3대 만세운동(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의 시위,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의 시위 포함)으로 손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 중에서 양성면사무소는 일제가 양성 주민들을 관리, 통솔하고자 설치한 행정기관으로, 주민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불을 지르고 돌을 던져 부수어 저항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벽화와 안내판, 조형물이 당시 독립에 대한 열망을 기리고 정신을 기억하는 의미로 설치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