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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영 묘
김진영(1880 - 미상)은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도사(道師)·선정(宣正)·당부집행위원(黨部執行委員)·도령(都領)·종법사(宗法師) 등의 직임을 역임하였다. 1919년 3월 2일 예배일을 이용하여 평남 중화군 상원면 천도교 교구실에서 200여 명의 교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날 교도들이 모이자 천도교 중화교구의 전도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은 김동식(金東植)은 교도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의하여 참가자 일동은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중화경찰서장 다카나와 키쿠지와 순사부장 다무라 사부로 및 순사보 1명 등이 출동하여 교구실로 들어와 군중에 해산을 명령하였다. 교도들이 불응하자 그들은 몇 명의 교도를 강제로 밖으로 끌어내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교도들은 세 명의 경찰을 포위하였다. 김진영 김동식 등과 함께 일경들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은 후 돌과 몽둥이로 그들을 응징하는데 앞장섰다. 일본 경찰들이 주재소로 도망하자, 그는 교도들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주재소 집기를 파괴하는 등 격렬히 항쟁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오심당(吾心黨) 활동에 참여하여 1924년 이래 농민들을 규합하여 농민조합을 운영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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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옥 묘
박윤옥(1915 - 2005)는 평양의 숭인상업학교 재학중이던 1936년 6월에 동교생 김현주(金顯周)·김덕윤(金德潤)등과 함께 농민의 계몽지도 및 민족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항일결사 일맥회(一麥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해당 조직의 활동이 부진함에 따라 이들은 강력한 결사를 조직할 것을 뜻하고 1937년 2월에 동지 지광호(池光浩)의 집에서 비밀결사 열혈회(熱血會)를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회장을 맡았다. 동회는 "조선민족 영원의 복지를 위해 조선독립을 기하다"란 회칙을 정하고 그 행동방안으로는 농민대중의 지도를 통한 민족의식의 배양과 농업기술 및 경영을 지도하여 경제적 향상을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회원간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성명대신 한글문자 한자씩을 암호로 정하였으며, 또 매년 3월 1일, 8월 29일을 열혈회의 기념일로 정하고 이날에는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 및 단식을 행하여 항일정신을 기리기로 했다. 그는 1938년 3월에 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신학부 예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열혈회 회원들인 김덕윤·김동순(金東舜) 등과 계속 모임을 가지며 사업을 추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어 그는 1939년 11월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2년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있다가 1941년 11월에 1심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2심에서 징역 4년·집행유예 5년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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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자 독립유공자비(전동면)
전동면사무소 앞에 위치한 독립유공자 효행자 비. 비석 뒷면에 새겨진 건립기에 따르면 본 비석은 1993년 12월 연기군에서 군민의 문화유산을 남기고자 고장 내 효행자와 독립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기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연기군 내 여러 지역에 세워져있으며 본 사적은 전동면 119지역대에서 전동손짜장 방향으로 가는 길목 사이에 위치하였다. 독립유공자로 성함이 새겨진 분들은 김승화, 남상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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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집
윤상원(1895 - 1973)은 1919년 3월 13일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 장터에서 이수욱(李秀郁)·추경춘(秋敬春) 등과 같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목판으로 태극기 150여매를 만들어 장터로 통하는 갈정동 고개에서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정의장터에 이르러서는 이수욱(李秀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엣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9일 공주복심법원과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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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훈, 윤자명 집
윤자훈(1894 - 1936)은 연기군 전의면 읍내리 전의시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전의면 신정리(新井里)에 거주하는 이수욱(李秀郁)은 서울에서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여 윤자훈을 비롯한 마을 인사들과 1919년 3월 13일 장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미리 제작하여 거사 당일 시장 통로인 갈정동 고개에서 장에 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시장에 이르러 이수욱이 연설을 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은 태극기를 꺼내어 휘두르며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장 각지를 행진하였다. 헌병분견소의 헌병과 조치원에서 급거 출동한 철도원호대원 20여 명이 합세하여 윤자훈을 비롯한 주동 인물을 체포하였다. 윤자훈은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윤자명(1868 - 미상)은 연기군 전의면 읍내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고종의 장례를 지켜보기 위해 상경하였던 이수욱(李秀郁)은 귀향 후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전의면으로 돌아온 그는 마을을 돌며 추경춘(秋敬春),윤자벽(尹慈壁)을 비롯한 주민들과 거사준비를 협의한 끝에 3월 13일 전의면 읍내 시장 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이들의 계획은 태극기를 몰래 가지고 가 시장에서 연설할 때,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를 행진하자는 것이었다. 거사 당일, 이수욱 일행은 갈정리(葛井里) 언덕에서 역할 분담을 한 후, 장터로 향하였다. 시장에 도착한 일행은 계획대로 연설 후 태극기를 나눠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윤자명도 윤자벽으로부터 받은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시위행진하였다. 이 일로 붙잡힌 윤자명은 1919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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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욱 집
이수욱(1890 - 1970)은 1919년 2월 28일 광무황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가 독립만세시위를 보고, 고향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하고 3월 6일 귀향하였다. 귀향 즉시 먼저 이웃에 사는 추경춘(秋敬春)을 만나서, 그 취지를 설명하여 같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합의한 다음 3월 7일에는 박성교(朴聖敎)·추득천(秋得天)·윤자벽(尹滋璧)·윤상원(尹相元)·윤자훈(尹滋勳)·윤상억(尹相億)·김재주(金在周) 등과 함께 읍내리 장날인 3월 13일을 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3월 8일에는 김병옥(金炳玉)의 집에서 이장희(李章熙)·이광희(李光熙)·정원필(鄭元弼) 등과 만나 다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장터에서 시위군중들에게 나누어 줄 태극기 약 150매를 목판을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거사일인 3월 13일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많은 시위군중이 이어 호응하여 장터를 행진하였다. 결국 이수욱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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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억 집
윤상억(1899 - 1992)는 1919년 3월 13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에서 이수욱(李秀郁)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정리의 만세시위는 이수욱이 광무황제 장례를 다녀온 뒤 3월 7일부터 윤상원(尹相元) 등과 함께 계획하면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3월 13일 전의 장날에 거사하기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제작·인쇄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13일에 윤상억 등은 시장에 이르러 미리 연락하여 모인 군중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였다. 이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4월 2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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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은 묘
윤상은(1892 - 1938)은 1919년 3월 13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에서 이수욱(李秀郁)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정리의 만세시위는 이수욱이 광무황제의 장례를 다녀온 뒤 3월 7일부터 윤상억·윤상원(尹相元) 등과 함께 계획하면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3월 13일 전의 장날에 거사하기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제작·인쇄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13일에 윤상은 등은 시장에 이르러 미리 연락하여 모인 군중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였다. 이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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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공적 안내판
이광희(1895 - 1943)는 1919년 3월 13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에서 이수욱(李秀郁)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정리의 만세시위는 이수욱이 광무황제 장례를 다녀온 뒤 3월 7일부터 윤상억·윤상원(尹相元) 등과 함께 계획하면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3월 13일 전의 장날에 거사하기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제작·인쇄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13일에 이광희 등은 시장에 이르러 미리 연락하여 모인 군중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 행진하였다. 이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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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묘
이장희(1887 - 1932)는 1919년 3월 13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에서 이수욱(李秀郁)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정리의 만세시위는 이수욱이 광무황제의 장례를 다녀온 뒤 3월 7일부터 윤상억·윤상원(尹相元) 등과 함께 계획하면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3월 13일 전의 장날에 거사하기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제작·인쇄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13일에 이장희 등은 시장에 이르러 미리 연락하여 모인 군중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 행진하였다. 이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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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묘
이광희(1895 - 1943)는 1919년 3월 13일 충남 연기군 전의면 신정리에서 이수욱(李秀郁)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정리의 만세시위는 이수욱이 광무황제 장례를 다녀온 뒤 3월 7일부터 윤상억·윤상원(尹相元) 등과 함께 계획하면서 추진되었다. 이들은 3월 13일 전의 장날에 거사하기로 정하고, 태극기와 선언서 등을 제작·인쇄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13일에 이광희 등은 시장에 이르러 미리 연락하여 모인 군중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 행진하였다. 이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9일 경성복심법원과 6월 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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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자훈 묘
윤자훈(1894 - 1936)은 충남 연기군(燕岐郡) 전의면(全義面) 읍내리 전의시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운동을 펼쳤다. 전의면 신정리(新井里)에 거주하는 이수욱(李秀郁)은 서울에서 고종 장례에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하여 윤자훈을 비롯한 마을 인사들과 1919년 3월 13일 장날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미리 제작하여 거사 당일 시장 통로인 갈정동(葛井洞) 고개에서 장에 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시장에 이르러 이수욱이 연설을 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은 태극기를 꺼내어 휘두르며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장 각지를 행진하였다. 헌병분견소의 헌병과 조치원에서 급거 출동한 철도원호대원 20여 명이 합세하여 윤자훈을 비롯한 주동 인물을 체포하였다. 윤자훈은 1919년 4월 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