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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락 묘
이우락(1875 - 195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1919년 세칭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참가하였을 뿐 아니라, 1926년 1월 제2차 유림단(儒林團) 사건인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차 유림단 사건인 세칭 파리장서사건은 김복한(金福漢) 등의 호서유림과 곽종석(郭鍾錫)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보낸 활동으로써 명실상부한 유림의 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 요지는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광무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경북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1919년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우락은 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후 그는 김창숙의 참모(參謀)인 손후익(孫厚翼)으로부터 독립운동자금 모집활동을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이를 허락하였다. 당시 김창숙은 파리장서 사건 당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몽고(內蒙古) 지방의 미간지와 황무지 20만 정보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 건설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지역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5년 8월 국내로 돌아와, 경남북지역의 유림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1926년 1월 5일 경, 이우락은 경남 동래(東萊)의 오태환(吳泰煥) 등으로부터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던 중, 경북 경찰부 고등과 형사들에 의해 같은 해 3월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년 여의 옥고를 치른 끝에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형법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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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마을(임암마을)
독립운동가마을에는 이관술 생가터와 손응교의 친정집이 있다. 이관술은 일본으로 유학해 1929년 3월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 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 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엄호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지도했으며, 11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33년 1월 ‘경성 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4년 3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 12개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경성트로이카>와 적색노조 사건으로 1941년 검거당해 수감되었다. 손응교의 집안 중에 손진인(손진수)(조부), 손진형(숙조부), 손후익(부친), 손학익(숙부), 김찬기(남편), 정을기(이모부), 정수기(이모부)가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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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정학원 유허비
양정학원은 일제강점기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거리에 있던 사립 근대 학교로, 신지식 함양, 애국·애족·애향심 함양, 건전한 개척 정신 함양 등을 목표로 설립되었다. 양정학원(養正學院)은 언양3.1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천도교인과 언양 지역 유지들이 설립하였다. 1920년에 천도교인 김교경(金敎慶), 이규천(李圭千) 등과 지역 유지 대표 등이 근대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과 3.1운동 이후 천도교단 조직 재정비의 목적으로 일제 당국과 교섭하여 사설 학습 강습소로 개설하였다. 장소는 3.1만세운동으로 폐쇄당한 상북면 거리(巨里)의 천도교회관이었는데, 1921년 3월에 33.06㎡[약 10평] 남짓한 교실 2칸과 관리실 1칸으로 양정학원의 현판을 걸었다. 양정학원의 운영을 맡은 사람은 이규천이었고, 교사는 휘문의숙(徽文義塾)과 보성중학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이규장(李圭章)과 이무종(李武鐘)이었다. 학교 설립 자금은 지역 유지가 부담하고 운영은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4년제 보통학교 과정으로 서당 교육을 마친 학생들에게 산술과 역사, 조선어, 지리와 한문 등을 가르쳤다. 양정학원은 지역 유지의 기부금 5,000여 원을 기본금으로 적립한 후 적립금에서 생기는 이자와 약간의 수업료로 8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7년 4월 1일에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에 길천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하면서 양정학원은 통합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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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종 묘
이무종(1893 - 1956)은 경상남도 울주(蔚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언양(彦陽)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천도교도(天道敎徒)인 그는 같은 천도교도인 이규인(李圭寅)·이성영(李成榮)·강경찬(姜庚贊)·최해선(崔海璇)·이규경(李圭庚) 등과 함께 몇차례에 걸쳐 회의를 한 후, 4월 2일의 언양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동지를 규합하였다. 그러나 3월 31일 천도교도인 최해규(崔海圭) 형제와 곽해진(郭海鎭)·유철순(兪哲淳) 등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일제에 예비 검속되었으나, 그는 계획을 강행하기로 결심하고 4월 1일 이규인의 집에서 이규인·최윤봉(崔允奉)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 42매를 제작하였다. 특히 4월 1일은 인근 양산읍(梁山邑)에서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사기는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는 4월 2일 아침 일찍 태극기를 몰래 숨겨가지고 언양읍 남부리(南部里) 장터에 나아가 그곳에 모인 1천여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6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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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득 추모비
정용득(1885 - 1932)은 경남 울산(蔚山)의 언양(彦陽)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경남 울산군 상남면(上南面) 길천리(吉川里)에 사는 이무종(李武鍾) 등 6명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한 후 유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해 갔다. 이들은 의거 일자를 4월 2일 언양 장날로 정하였다. 4월 2일, 이무종 등 6인이 언양 남부리(南部里) 장터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많은 청년동지들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시위행렬을 이끌고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퍼붓자,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주동인물 48명이 체포되면서 시위군중은 해산하고 말았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힌 정용득은 1919년 4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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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묘
김경수(1892 - 1968)는 경남 울산(蔚山)의 언양(彦陽)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1919년 3월 하순, 울산군 상남면(上南面) 길천리(吉川里)에 사는 이무종(李武鍾) 등 6명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한 후 유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해 갔다. 이들은 거사 일자를 4월 2일 언양 장날로 정하였다. 4월 2일, 이무종 등 6인이 언양 남부리(南部里) 장터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많은 청년동지들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시위행렬을 이끌고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퍼붓자,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주동인물 48명이 체포되면서 시위군중은 해산하고 말았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김경수는 1919년 4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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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독립운동기념비
삼일독립운동유공비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전국으로 만세운동의 물결이 퍼져나가던 때에 언양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4월 2일 언양 장날을 기하여 이무종, 이규장, 최해선을 중심으로 옛 언양현에 속했던 언양, 상북, 삼남, 두동, 두서에서 모여든 수천 명의 장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한 항일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잔인무도한 일경들의 총검 앞에 스러져 1명이 사망하고 17명이 총상을 입었다. 당시 희생한 선열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2001년 12월에 삼일독립운동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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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운동유공비
삼일운동유공비는 1975년 8월 15일 광복절에 160여 명의 면민이 기금을 모아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무종 외 34인을 추모하고, 언양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추모사업추진위원회에서 건립한 비이다. 울산 최초의 3.1만세운동은 1919년 4월 2일 언양 지역에서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자주독립할 목적으로 일으킨 독립운동이다. 3·1만세운동으로 17명이 부상당하고 26명이 체포되어 징역형을 비롯한 처벌을 받는 고초를 겪었다. 처음에 울주군 상북면 상북중·고등학교[현 울산경의고등학교] 교정에 세웠다가, 2004년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도동신리로 5[산전리 458]에 있는 상북면사무소[상북면주민센터] 경내로 이전하였다. 3단의 계단 형태의 비석 받침대 위에 비신이 세워져 있다. 비신은 오석으로 되어 있는데, 비의 크기는 높이 82㎝, 너비 122㎝, 두께 22㎝이다. 산전리 3·1운동 유공비의 옆에는 2001년 12월에 건립된 삼일독립운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몇 구절을 빼면 두 비문의 내용은 거의 비슷한데, 감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와 부상자 숫자에서 조금 차이가 있다. 해당 사적은 일제강점기 언양 지역 3·1운동을 연구하는 주요 지역사 자료이자, 지역민들에게 고귀한 애국 애족 정신을 학습하는 장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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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의 마을(후리마을)
후리마을은 언양현의 발상지로, 일제강점기에는 상남면(현 상북면) 면소재지였으며 또한 3.1만세운동의 발생지이다. 1919년 기미년 4월 2일 수요일 오후 1시, 언양 장날을 맞아 언양, 상북, 삼남, 두동, 두서의 5개 면에서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는데, 그들 손에는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사본이 들려있었다. 등사본을 비밀리에 등사해 장터에서 나눠준 사람은 이규장, 이규천, 이규로, 이무종 등 일곱 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당시 상남면소에서 등사기를 훔쳐 이무종 집에서 선언문을 등사해 병영과 남창으로 전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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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인 묘
이규인(1890 - 1927)은 1919년 4월 2일 경남 울산군 언양시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규인은 1919년 3월 29일 울산군 상남면 길천리 이무종(李武鍾)의 집에서 이무종으로부터 4월 2일 언양읍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는 제의를 받고 찬동하였다. 4월 1일 밤 자신의 집에서 이무종·최윤봉(崔允奉)과 함께 태극기 42개를 만들어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규인은 4월 2일 읍내 남부리 시장에서 태극기를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주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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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원 묘
정태원(1869 - 1953)은 경남 울산(蔚山)의 언양(彦陽)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하순, 경남 울산군 상남면(上南面) 길천리(吉川里)에 사는 이무종(李武鍾) 등 6명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협의한 후 유지들을 비밀리에 규합해 갔다. 이들은 의거 일자를 4월 2일 언양 장날로 정하였다. 4월 2일, 이무종 등 6인이 언양 남부리(南部里) 장터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군중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많은 청년 동지들은 미리 준비했던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면서 시위행렬을 이끌고 행진하였다. 그러나 일본 군경들이 시위 군중을 향해 실탄 사격을 퍼붓자,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때 주동인물 48명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는 해산하고 말았다. 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힌 정태원은 1919년 4월 10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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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사적비
3.1독립운동사적비는 1919년 4월 2일 언양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언양장터 만세운동은 울산에서 최초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이규장, 최해규, 강경찬 등의 주동자를 중심으로 2천 여명의 민중들이 참여했다. 위와 같은 순국선열들의 정신을 기리고 뜻을 길이 전하고자 본 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