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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유적비
이관술(1902~1950)은 경상남도 울산 출생으로, 이명(異名)은 이수해(李樹海), 김종석(金鍾石), 김대성(金大成)이다.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고,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지도했으며, 11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33년 1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1934년 3월 31일 병보석으로 가출옥 했는데, 그해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박선숙(朴璇淑)과 결혼했다. 가출옥 상태였던 1934년 9월부터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던 이재유(李載裕)와 함께 활동을 시작하여, 12월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했다. 1936년 10월 이재유 등과 함게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재건그룹의 통일체인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고 출판부 책임자로서 기관지 『적기(赤旗)』를 발간했다. 이후 대전 · 대구 등지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다니면서 계속 활동을 모색했다. 1939년 1월경 경성으로 올라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여동생 이순금(李順今), 김삼룡(金三龍) 등과 함께 활동을 재개하여 4월경 ‘경성콤그룹’의 초기 지도부를 구성했다. 「노동자 리플렛」,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등을 제작 · 배포했으며, 기관지 출판 책임자로서 9월부터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월간으로 발간했다. 1940년 2월 인천에 편집아지트를 마련하고 출옥한 박헌영(朴憲永)을 피신시켰다. 그해 8월 함북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지도자 장순명(張順明) 등과 함북노조준비위원회를 청진좌익노조조직준비위원회로 개편하고, 기관지 출판과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1월 검거되었다가, 1943년경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5년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 및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곧이어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민족통일전선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해 7월 6일 ‘조선정판사위폐사건’으로 미군정 경찰에 검거되어, 11월 28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이던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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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 기념판
6.10만세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因山日)]을 기해 만세시위로 일어난 학생중심의 민족독립운동이다.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박용규(朴龍圭)·곽대형(郭戴炯)·김재문(金載文)·황정환(黃廷煥)·이동환(李東煥) 등이 순종승하소식을 듣고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에 5월 29일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각기 1,000매씩 나누어 가진 뒤, 다시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하여 거사일인 6월 10일을 기다렸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000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그리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오전 8시 45분경 관수교 부근에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오전 9시 30분경 을지로 경성사범학교 부근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박두종 외 2명이, 오후 1시경 훈련원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1시 30분경 동대문 근처에서 『시대일보』배달부 김낙환과 청년 2명이, 오후 2시신설동 부근에서 학생 1명이, 오후 2시 20분경 동묘 부근에서 중앙고보생 박용철·이동환, 중동학교생 곽대형·황정환 등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살포하는 등 학생들의 항일독립만세시위는 계속 이어졌다. 이에 군중들도 합세하여 제2의 3·1운동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으나,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수는 서울에서 210여 명이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나 되었다. 1927년 10여 명은 징역 1년, 1명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아 10명은 결국 수감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서울에 국한되어 일어났으나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는데, 고창·순창·정주·울산·군산·평양·홍성·공주 등지 뿐만 아니라 당진·강경·전주·하동·이원까지 파급되어갔다. 이처럼 6·10만세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꾸준히 다져온 학생들의 결사·동맹휴학·계몽활동 등의 학생운동이 결집된 소산으로 나타난 항일운동이었다. 그래서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안겨주었고,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교량적 구실을 담당하여 꺼지지 않는 민족 독립운동사의 하나의 큰 횃불이 되었다. 2020년 12월 8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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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기념현판
1890년대 후반 처음 등장한 야학은 을사늑약을 전후로 국권회복과 민족계몽을 위한 야학운동이 거대한 바람으로 전개됐다. 야학에 대한 참여는 전국에 설립된 장소가 1,000 곳을 넘어설만큼 매우 컸다. 울산은 1910년 동구 남목 개운학교에서 설립한 대창야학교가 첫 야학이다. 1917년 9월에는 중남면 신화리에서 30여 명의 학생을 가르친 노동야학이 문을 열었다. 울산에서 야학 바람이 휘몰아친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 초다. 당시 울산 곳곳 35개 지역에 청년회가 만들어졌고, 청년조직과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돼 100여 곳에 이르는 야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만들어진 야학은 홀로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방식이 아니라 함께 연계하는 노동야학연합회로 진전됐다. 하지만 일제 경찰은 야학연합의 창립과 활동을 막아섰다. 울산군노동야학연합회 창립대회를 금지시키고 결성을 원천봉쇄하는 데 혈안이 됐다. 이는 민족교육, 민중교육을 목표로 하는 야학이 눈에 가시가 됐고 야학연합이 울산 내의 항일운동과 연계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1929년 울산 동구 사립 보성학교 폐쇄명령을 내렸고 이어서 8월에는 병영노동야학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10년 넘게 병영청년회가 이끌어 온 노동야학을 무력화 시키면서 내놓은 명분은 불온한 강사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31년 언양농민야학을 폐쇄한 것도 같은 명분이었다. 모두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선 청년들이 교육을 통해 민족과 민중을 일깨우는 것을 두려워해 직접 탄압한 것이다. 결국 1929년 100여개에 달했던 야학은 1937년에 이르면 20여개소 1,000여 명의 학생으로 줄어든다. 일제강점기 울산야학은 무산아동과 여성을 포함해 민족혼과 의식을 일깨우는 참교육기관이었다. 공립학교에 다닐 수 없이 가난했던 조선 아이들 한 명이라도 더 가르치려고 애썼던 민중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지역유지와 농민단체, 소년단체, 종교단체들을 규합해 적극적으로 민족계몽에 나섰기에 항일운동 속 밑거름이 됐다. 그리고 여자야학과 부인야학 등 여성야학이 다른 지역보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눈여겨 봐야 한다. 민족독립에 여자와 남자의 구분이 없으며, 배움에 있어 가난은 장애가 되서는 안된다는 민중교육. 100년 전 깨어있는 교육의 징표 중 하나가 울산 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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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울산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항일 독립운동의 위대한 여정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은 울산 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그 숭고한 발자취를 기억하며, 미래 세대에 계승할 역사를 기록하고자 건립한 것이다. 울산에서는 일제의 강제 병합 직전에 일어난 의병 항쟁을 시작으로 국권 수호를 위한 항일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19년 4월에는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 발맞춰 울산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울산 사람들은 1910년대 국내 항일 투쟁의 상징인 대한광복회를 비롯하여,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울산과 국내 각지에서 다양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만주, 중국 관내, 미주, 일본 등 국외에서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항일 의식을 복돋았으며, 항일 무장 투쟁에도 참여하였다. 기념탑은 남구 달동문화공원 내 부지 800㎡에 총사업비 5억8천400만원이 투입돼 조성됐다. 기념탑 둘레에는 고헌 박상진 의사, 외솔 최현배 선생 등 서훈을 받은 울산 출신 항일 독립유공자 102명 이름이 새겨져 있다. 기념탑 후면에는 울산항일 독립운동 역사를 기록해 숭고한 나라 사랑 정신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는 역사교육장으로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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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묘
이종근(1897 - 1957)은 경상남도 울산(蔚山) 사람이다.1919년 4월 4일과 5일에 걸쳐 울산군 하상면 병영리(下廂面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현우(李鉉禹)·이종욱(李鍾旭)·이문조(李文祚)·박영하(朴永夏)·양석룡(楊錫龍)·김장수(金長壽) 등의 청년회 간부 및 박영하와 그의 집에서 몇차례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는 4월 3일, 이현우·이종욱·이문조·박영하 등과 함께 그의 집에서 비밀 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支)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日新學校, 현재 兵營國民學校) 교정으로 나아갔다.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도 합세케 한 후,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리(西里)·동리(東里)·남외리(南外里)·산전리(山田里) 일대를 두 번에 걸쳐 시위행진하였다. 이 광경을 본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이곳 주재소의 응원 요청을 받은 울산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격노한 시위군중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였으나, 양석룡·이종욱·이종룡(李鍾龍) 등 14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압송되는 바람에 더 이상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그는 이날 저녁, 이문조·이종필(李鍾弼) 등의 동지와 함께 곽남부락(郭南部落)의 김세진(金世鎭)의 집으로 피신하여 문성초(文星超)·윤학이(尹學伊)·최현구(崔鉉久)·황정달(黃丁達)·백봉근(白鳳根)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다음날의 재거사를 계획하였다. 이튿날 오후 3시경, 수천명의 시위군중이 주재소 앞에서 모여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을 무렵, 울산으로부터 13명의 일본 군경 응원 출동하여 이문조 등 9명의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에 격노한 시위 군중이 검거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총·칼을 든 일본 군경에게 달려들자, 일본군 수비병이 발포를 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슴을 풀어헤치고 일본군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2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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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룡 묘
이종룡(1899 - 1986)은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1919년 4월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비밀청년회 간부인 이현우(李鉉禹) 등과 함께 혈서로 「결사보국(決死報國)」이라 서명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만드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4월 4일 오후 9시경 일신학교(日新學校) 교정에서 학생들을 규합,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경에 의해 시위가 중단되고 그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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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문 집
서진문(1900~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을 앞두고 횡빈경찰서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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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문 흉상
서진문(1900 - 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神奈川縣)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御大典)'을 앞두고 횡빈경찰서(橫浜警察署)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李君)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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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문 묘
서진문(1900 - 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神奈川縣)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御大典)'을 앞두고 횡빈경찰서(橫浜警察署)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李君)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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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호수공원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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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집
박상진(1884 - 1921)은 울산(蔚山) 사람이다. 전통적 유가(儒家)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한학을 수학하고 1902년에는 허위(許蔿)로부터 학문적 수업을 쌓았다. 그후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률과 경제를 전공했다. 1910년 판사(判事)시험에 합격한 그는 평양법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가 허겸(許兼)·손일민(孫逸民)·김대락(金大洛)·이상용(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의 지사들과 교류하며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1912년 귀국한 그는 대구(大邱)에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독립운동의 정보연락 및 재정적 지원을 목적한 것이었다. 당시 상덕태상회는 국내의 연락뿐 아니라 이관구(李觀求)가 설립한 만주 안동(安東)의 삼달양행(三達洋行)이나 장춘(長春)의 상원양행(尙元洋行)등 곡물상과 연락망을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1915년 음력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독립군 지원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선국권회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주로 대구를 중심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방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革新儒林)들로서, 동단은 곡물상의 상업조직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러나 동단의 인사들은 보다 강력한 독립군 단체를 조직할 목적으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제휴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고 그는 총사령(總司令)을 맡았다. 채기중(蔡基中)이 주도한 풍기광복단은 1913년에 조직된 독립군 단체로서 의병적 성격이 짙었고, 이때 국권회복단에서는 박상진 외에 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인물이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서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실천강령을 정하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때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혁명의 거점으로는 국내 각처에 곡물상을 개설하는 한편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 등과 연결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이에 필요한 자금은 자산가들의 의연금으로써 충당할 계획이었는데 친일부호들의 비협조로 의연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았으므로 강제모금의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1916년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를 다녀오는 길에 서울에서 붙잡혀 1917년 4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군자금 수합에 더욱 힘을 쏟아 당시 식민적 지주체제에 안주하는 반민족적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의협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한광복회 명의로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친일부호 처단의 명령을 내려 채기중·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임봉주(林鳳柱) 등으로 하여금 1917년 11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1월에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 등이 주관케 하여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때 동단의 처단 고시문(告示文)을 붙였으므로 만천하에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1918년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혔고, 사형을 선고받아 4년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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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소개비
광복회소개비는 대한광복회의 설립과 활동 및 회원 목록을 알리는 사적이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이다. 한말의병 계열과 계몽운동 계열이 연합 결성한 단체로,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조직된 광복단과 1915년 대구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이 중심이 되었다.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초기에는 군자금 모집 활동에 주력했으며 친일세력들을 처단하는 의협투쟁도 전개했다. 1918년 총사령관 박상진을 비롯한 5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다수의 회원이 체포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국내 독립운동조직이던 대한광복회는 1920년대 광복단결사대와 주비단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