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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기념비
박영준(1885-1943)은 1885년 4월 25일에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에서 태어났다. 3·1 운동이 일어날 무렵 기장면에서 약간 떨어진 일광면 이천리의 이천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1919년 4월 5일 기장면 3·1 운동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날은 기장 장날이었는데, 박영준은 평소와 다름없이 집에서 만든 망건을 팔려고 시장에 나갔다가 시위를 경험하였다. 이날의 경험은 박영준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박영준은 이천 마을의 청년들과 주민들을 모아 놓고 항일 운동의 의의를 상세히 설명하였으며, 마을 청년들과 독립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윽고 박영준은 4월 11일 50여 명의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일광면 이천리에서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일광면 이천리 3·1 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해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1919년 6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1943년 8월 19일에 사망하였다. 1986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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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묘
김철수(1896-1977)는 호는 춘재이며,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행정가이다. 1896년 5월 4일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328번지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기장에 살던 매형인 박인표(朴仁杓)가 경영한 사립기장보통학교를 다녔다. 부모가 동래군 좌이면 구포리로 이사하자, 구포의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고, 7월 일본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재동경한국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였고, 신익희·이광수·장덕수·최팔용·김도연·윤현진(尹顯振)·송계백·백관수 등과 두터운 교분을 맺으면서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참여하였다. 1918년 조선 학회에서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최팔용·김도연·이광수·송계백 등과 함께 100여 명의 유학생을 규합하여 비밀 결사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2·8 독립 선언 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2·8 독립 선언에 대표 위원으로 참가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6월 26일에 열린 제2심에서 출판법 위반 혐의로 9개월 금고형을 선고 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9일 출옥하여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고려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박인표가 갑자기 사망하여, 이를 정리하고 고향의 전답을 팔아 부산상사라는 무역 회사를 열고 민족 자본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 무렵 발흥하던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7월 양산청년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고, 12월 2일 조선청년회연합회 총회에서 상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에 참가하여 경리부원이 되었다. 이에 조선청년연합회 및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강사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무렵 안재홍(安在鴻)의 권유로 시대일보사의 경제부장을 맡았고, 1928년 3월 신간회 양산지회의 설립에 준비 위원과 검사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김철수의 영향으로 신간회 양산지회의 중심 과제는 협동조합 운동이 되었다. 1936년 이후 일제의 감시와 협박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양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에 참여하였고, 독립촉성국민회의 경상남도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자유민보사 사장을 지냈다. 미군정 하에서 1946년 입법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47년 제2대 경상남도지사로 임명되었다. 정부 수립 후 1949년 적십자사 경남지사 초대 지사장을 지내고, 1960년 자유당 경상남도당 위원장으로 4월 혁명을 맞았다. 이후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노인진흥회를 결성하였으며, 3·1동지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77년 5월 18일 사망하였다. 1980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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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시장 3.1만세운동기념비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독립만세는 1919년 4월 9일 좌천장날을 기해 장터에서 지역 청년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여 목이 터지라 외친 만세운동이다. 600여명 지역인들과 장꾼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뜨겁게 이어져, 하나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왜경의 총칼 앞에서도 맨몸으로 싸웠다. 만세 주도자들은 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독립을 주장하다가 고된 옥살이를 해야 했고, 끝내 목숨까지도 버려야 했던 역사적 사실은 이 고장에도 우리의 민족혼이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좌천시장 3.1만세운동기념비는 자랑스러운 좌천장터 항일투쟁의 혈맥을 후대에 길이 물려주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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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독립운동공적비
김귀룡(1898-1975)의 호는 백운이며,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귀룡은 1898년 6월 25일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350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의 학생 대표로서 3월 7일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들과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 대표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해 받으면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김귀룡이 고영건(高永建)·엄진영(嚴進永) 등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던 중에 3월 10일 동래고등보통학교의 선배이자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곽상훈은 수학 교사 이환(李環)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의 배후에서 참모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김귀룡과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은 협의 끝에,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어서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 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태극기, 고종 황제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 김귀룡은 제2대의 지휘를 맡아 동래읍성 남문으로 모여드는 동료들과 함께 시위 군중에게 인쇄물을 배포하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윽고 김귀룡은 출동한 일본군과 기마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선고 받았으며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1975년 11월 16일에 77세로 사망하였다.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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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묘
김귀룡(1898-1975)의 호는 백운이며,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귀룡은 1898년 6월 25일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350번지에서 태어났다. 1919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의 학생 대표로서 3월 7일 서울에서 온 학생 대표들과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 학생 대표에게 독립 선언서를 전해 받으면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심하였다. 김귀룡이 고영건(高永建)·엄진영(嚴進永) 등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던 중에 3월 10일 동래고등보통학교의 선배이자 경성고등공업학교에 다니던 곽상훈(郭尙勳)이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곽상훈은 수학 교사 이환(李環)과 만나 독립 만세 운동에 대하여 상의하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만세 시위의 배후에서 참모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김귀룡과 시위를 주도하는 학생들은 협의 끝에, 동래 장날인 3월 13일 오후 2시를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어서 3월 11일부터 13일에 걸쳐 고영건의 하숙집에서 학교 등사판을 이용하여 독립 선언서와 대형 독립기, 태극기, 고종 황제의 독살을 폭로하는 오왕약살(吾王藥殺)이라는 격문도 준비하였다. 3월 13일 오후 2시, 김귀룡은 제2대의 지휘를 맡아 동래읍성 남문으로 모여드는 동료들과 함께 시위 군중에게 인쇄물을 배포하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윽고 김귀룡은 출동한 일본군과 기마경찰들에게 체포되었다.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월형을 선고 받았으며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1975년 11월 16일에 77세로 사망하였다.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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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범 묘
김기범(1885-1951)은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1919년 4월 7일 김기범은 청암면 평촌리 정신교(鄭信敎)의 집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정재옥(鄭在玉)[1893~1944] 등과 함께 마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독립 만세를 외칠 것을 계획하였다. 그날 밤 태극기를 동네 김종을의 집 마당에 세운 뒤,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날 독립 만세를 부르는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하여 군중이 모일 수 있도록 하였다. 4월 8일 오후 8시경 정재옥 등 50~60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기범이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김기범은 청암면장 화창조(化昌兆)에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기를 강요하는 등 평촌리 광장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었다. 이후 김기범은 그 해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이란 죄목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기범은 형과 함께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1885~1943]가 운영하는 백산상회의 하동 지점격인 남일상회를 만들어 무역업을 하면서 독립 자금을 조달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진주로 이사했다가 다시 하동읍 북쪽 두곡리에 와서 살았다. 1951년 7월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에서 77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1994년 정부에서도 그의 업적을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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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거비
3.1운동의거비는 3.1운동시 좌천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기념하여 건립한 의거비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정관면에서는 기장군 교리 김수용으로부터 독립선언문 여러 부를 오해영이 입수하여 오진환.김종복에게 전달하였고, 오진환.신두성.김윤희.정지모.박일봉 등 면내의 유지들이 주동이 되어 김종복의 사랑방을 밀회 장소로 정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9일(음) 좌천 장날을 기해 장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이에 이들은 목욕재계하고 조룡산 산마루와 용산암에서 대한독립만세와 의거의 성공을 기원하는 천제를 지낸 다음 혈서구국의 맹세를 하였다. 3월 9일(음), 좌천시장에 각 처에서 운집한 장꾼들이 붐빌 적에 오진환 등 5명의 동지들은 그에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니 주위의 수많은 군중들이 합세하였다. 일경들은 야만적인 방법으로 무차별 발포하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오진환 등 50여명이 좌천주재소로 연행되자 시위 군중들은 주재소를 2중 3중으로 포위하여 투석전을 벌리며 석방을 요구하여 연행자 전원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 뒤 신두성.김윤희.정지모 등은 검거.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이란 죄명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김윤희.정지모는 고문의 여독으로 순국하였고, 신두성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하였으며, 오진환은 일경의 눈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박일봉은 국내에서 피신하여 해외를 전전하다가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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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애국지사추모탑
정관애국지사추모탑은 정관읍 출신의 애국지사들의 공적을 기리고자 세운 탑이다. 정관의 지사 다섯 명은 매학리 김종복의 후원아래 사랑방 모의를 거듭하였다. 이들은 거사에 목욕재계하고 수십면민과 함께 용수리 조룔산에 올라가 하늘에 빌고 신명을 바치기로 다짐하였다. 거사 장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인근 장안면 좌천장으로 정하였다. 정오가 지날 즈음 정관 출신 지사 다섯 명이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50여 명이 좌천주재소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정관은 세 분의 임란공신과 한 분 임란 순절자를 배출하였다. 이러한 기상과 기개가 이어 내려와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 기간의 나라가 어지럽고 전란을 겪는 동안에도 지역과 나라를 지키는데 한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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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찬복 추모비
안찬복(1879-1945)은 평안남도 안주(安州) 사람으로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3월 3일 김안실(金安實)·김광호(金光浩)·김춘택(金春澤) 등과 함께 안주읍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천도교도들이 주동이 되었는데, 당시 안주 교구장인 김안실이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해받고, 천도교 간부인 김광호·김춘택 등과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리고 더 자세한 정보를 알기 위하여 읍내 보통학교 교사인 차신정(車信正)을 평양(平壤)으로 파견하였다. 차신정이 귀향하여 그곳의 정세를 상세히 알리자, 곧 거사일자를 3월 3일로 결정하여 기독교측에도 연락하고, 김기수(金淇洙)로 하여금 군내 천도교 전교실(傳敎室)에 파견하여 그들도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3월 3일 오전 11시 율산공원(栗山公園)에 5천여명의 군중이 모이자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형 태극기와 악대를 선두로 하여 서문연당(西門蓮塘)·공립보통학교·공립농업학교·군청·평양지방법원 안주지청을 거쳐 시위행진을 전개한 후 헌병대에 도착하였다. 이때 그도 시위군중과 함께 헌병대를 포위하고 3월 1일의 독립만세시위 때 체포된 김화식(金化湜)·박의송(朴義松) 등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들이 갑자기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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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석 묘
정몽석(1896-1961)은 하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896년 4월 16일 지금의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508번지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계통인 진주 광림학교[현 봉래초등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신학문을 배웠다. 1919년 2월 고종 황제의 인산에 참여하러 상경하였다가 3·1 운동을 직접 목도하고,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지니고 진주로 귀향하였다. 이후 정몽석은 강달영(姜達永)·김재화(金在華)·박진환(朴進煥)·이강우(李康雨)·최웅림(崔雄林) 등 동지들과 함께 진주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대대적으로 전개하기로 계획하고, 1919년 3월 10일 새벽 시내 곳곳에 격문을 부착하였다. 그리고 광림학교 졸업생과 기독교·사회 단체 등과 교섭하여 진주 전역에 동시 다발로 봉기하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태극기와 선전문 3천 장을 등사하였다. 3월 18일 진주 장날 정오, 봉래동 진주교회의 종소리와 비봉산(飛鳳山)의 나팔 소리를 신호로 진주 3·1 독립 만세 운동이 시작되었다. 1만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일주하였다. 정몽석은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격문을 배포하였다. 진주경찰서와 소방대가 출동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모자 300여 명을 검거하였으나, 3월 23일까지 크고 작은 시위는 20여 차례 계속 이어졌다. 정몽석은 태극기 제작, 격문 배포, 주민 선동, 「독립선언문」 낭독, 시위 주도 등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진주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법적 투쟁을 위해 항소했으나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9월 6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진주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0년 2월 출옥 후 최웅림과 함께 대한적십자사 진주지사에 근무하면서, 1921년 7월 진주시 지수면 갑부 허만정(許萬正)을 찾아가 군자금을 청탁하다가 체포되었다.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아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23년 4월 15일, 진주청년회관에서 강상호(姜相鎬)·장지필(張志弼) 등과 백정 해방 운동인 형평사(衡平社) 발기인으로 동참하여 신분제 타파에 앞장섰다. 1924년부터는 의열단원 최웅림을 위해 군자금과 도피처를 계속 제공해 온 것으로 전한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 진주 주재 기자로 활약하였다. 1961년 8월 16일 작고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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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택 길
최천택(1897-1962)은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1896년 6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당시 금서였던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절친한 학우들인 박재혁(朴載赫)·김병태(金鉼泰)·김흥규(金興奎)와 돌려 가며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돌린 것이 발각되어 10여 일간 구속되었다. 윤독회를 통해 결속을 다진 학우들과 함께 북로 군정서의 국내 연락을 담당하고 유사시 항일 비밀 결사대로 전환한다는 목적 아래 1913년 비밀 결사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과거 구세단 동지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여 울산, 경주, 포항 등지에 3·1 운동 상황을 알렸다. 부산에서 다시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 신문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등사해 집집마다 뿌리면서 3·1 운동을 다시 선동하였다. 또 1920년 과거 구세단의 동지였던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함께 모의하였으며, 1920년 12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과 1923년 강홍렬의 의열단 군자금 모집 사건에도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혹독한 취조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최천택은 의열단원의 국내 활동에 상당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1920년 부산청년회가 결성되었을 때 부산진구락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와 김철수(金喆壽)[해방 후 경남도지사] 등과 함께 주택 구제 부산 시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민(渡航民)을 위한 권익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김국태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을 설치해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친일 종교 단체인 보천교(普天敎)에서 시대일보사를 인수하려 하자 전국 지국의 단결을 조성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청년 운동 단체의 통일이 시도되면서 부산에서 부산청년연맹과 부산부청년연맹이 대립할 때, 최천택은 노건상 그룹의 부산청년연맹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부산의 청년 단체들이 단일의 부산청년동맹으로 통일될 때 최천택은 30세가 넘은 나이 때문에 활동 공간을 신간회(新幹會)로 옮겼다. 1927년 7월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었을 때 상무 간사로 활동하면서, 1928년 부산보통학교 일본인 교사의 여학생 능욕 사건에 대한 규탄 대회에 앞장섰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산지회장이 된 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과 접촉하며 시위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할 때까지 신간회 부산지회의 회보 발간, 신간회 경남연합회 발기 등을 추진하였다. 1941년에는 장건상(張建相) 해외 탈출 사건과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형인 김범부(金凡夫)의 해인사(海印寺)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민주중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2대 제헌 의원 선거 때 부산시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혁신 성향의 장건상 선거 본부의 사무장을 맡아 당선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계로 분류되어 해방 직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장이었던 김동산(金東山)과 함께 육군 특무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6·25 전쟁 이후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정공단(鄭公壇)을 개수하고 봉제(奉祭)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지켜보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시 동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혁신계의 난립으로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서면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육군형무소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1961년 11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200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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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집
박재혁(1895-1921)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17년경부터 상해 등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를 가졌다.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의 연락으로 상해로 가 의열단에 입단하고, 9월 상순 고서(古書) 짐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3일 부산에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짐 속에 있던 폭탄을 꺼내어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고 붙잡혀,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옥사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