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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거리
박재혁(1895~1921)은 부산(釜山) 사람이다. 부산진보통학교(釜山鎭普通學校)와 부산공립상업학교(釜山公立商業學校)를 졸업하고 부산와사전기회사 전차차장으로 있었고 왜관(倭館)에서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던 중 1917년 6월 주인으로부터 자본금 700원을 얻어 상해로 가서 무역업에 종사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였다. 그는 보통학교와 상업학교 동창인 동지 최천택(崔天澤)에게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투쟁할 것을 말하고 기회를 노리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상해로 가서 중국 각지와 싱가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하는 한편 여러 독립투사들과 교제하였다. 1920년 3월에 귀국하였다가 8월에 상해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군자금 3백원을 받아 부산경찰서를 파괴하고 그 서장을 사살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년 9월 상순 폭탄을 휴대하고 상해를 떠나 동월 6일 부산에 상륙하였다. 그는 14일 오후 2시 30분에 고서보따리로 위장한 폭탄을 등에 지고 경찰서로 서장을 찾아 서장과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몇마디 환담을 한 후 고서를 꺼내는 척 하면서 폭탄을 꺼내들고 서장을 유창한 일본말로 꾸짖고 폭탄을 던져 폭발시키니 서장은 부상을 당하고 그도 중상을 입은 채 붙잡혔다. 그는 모진 악형 끝에 기소되어 1920년 11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공소하여 1921년 2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자 다시 상고하여 1921년 3월 31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다시 사형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혹독한 고문과 폭탄의 상처로 몹시 신음하다가 폐병까지 생겨 고통이 심하므로 "왜적(倭賊)의 손에 욕보지 않고 내손으로 죽자"하고 단식하다가 형 집행 전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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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안내판
이광우(1825~1907)는 부산(釜山) 사람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대초 부산에서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열혈청년으로서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울분을 금치 못하던 그는 1942년 5월 여경수(呂敬守) 등 5명의 동지들과 함께 부산에서 비밀결사 친우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당시 일제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도발하면서 강제 공출, 징용 등으로 한국인에 대한 극악한 탄압을 더해가자 일제의 전쟁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군수품 제조공장인 조선방직주식회사를 파괴할 것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군자금의 모집과 일제 군사요지 시설의 파괴도 추진하였다. 이들은 동년 6월 일제의 침탈상과 조국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한 전단을 제작하여 공장 기숙사, 시장, 부두 등에 살포하며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노출되어 1943년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친일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불에 달군 화젓가락 고문, 전기고문 등 가혹한 만행을 당한 후 검찰에 회부되었고 이 과정에서 여경수가 순국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5년 2월 27일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단기 1년 장기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과 더불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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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무명용사위령비
항일무명용사위령비는 해방을 앞두고 자결한 한 무명용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1995년 8월 15일 녹산향토문화관에서 건립한 위령비이다. 1945년 8월 15일 새벽, 한 청년이 가덕도 외양포에 주둔한 일본 해군 기지를 탈출하였다. 그는 10리 바다를 헤엄쳐 건너 송정 바닷가를 지나 녹산, 성산을 거쳐 서낙동강 가에 닿았다. 그날 오전 10시경 장락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장락 마을] 모퉁이 산 낭떠러지에서 총을 쏘며 쫓는 일본 헌병과 대치하던 이 청년은 ‘대한 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치고 투신, 순국하였다. 청년의 탈영 과정을 목격한 이들은 “큰 키에 좀 마른 얼굴, 누런 일본 수병의 옷을 입었고 어깨에는 옷 보자기 같은 걸 짊어졌다.”라고 증언하였을 뿐 성과 이름, 고향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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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환 제단비
조정환(1875-1962). 자는 의경(義卿), 호는 남강(南崗)이고 별칭으로 조진(曺珍)이라는 이름을 썼다. 조정환은 파주에 인성학교를 세워 후진을 기르다가 경술 합방 이후에 아세아 시국변론, 일본 대한정책론, 한국 유신론 등의 책을 지어 개혁과 자강을 역설하였다. 3·1운동 후 만주에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그 후 조병준, 변창근 등과 함께 민국독립단에 가담하여 자의부장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군자금 모금 차 입국했다가 다시 만주로 가서, 1923년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민대표자 회의에 참석하고 다물단을 조직하여 투쟁하면서 북경대학에서 강의도 하였다. 1925년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하였으나 백남훈, 홍성하, 박승철 등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하여 민족주의 운동을 모색하였다. 1927년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우국의 한시 한 수를 보낸 뒤 소식이 두절되었으며 이후 묘소 등에 대한 정보가 없어 확인이 필요하다. 정부에서는 1990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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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3.1운동 유공비
일본 제국주의에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겠다는 겨레의 염원을 담은 독립선언문이 1919년 3월 1일 우렁차게 선포되었을 때, 대한독립 만세소리는 삼천리 강산에 울려 퍼졌다. 이곳 금정산 기슭, 호국의 전통이 스며있는 청정도량 범어사에서도 한용운 스님이 서울에서 내려와 오성월 스님 등과 중대사를 의논하였다. 김법린과 김상헌은 3월 4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범어사에 도착하여 본교 전신인 명정학교와 지방학림 학생들을 중심으로 동래장날에 의거를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범어사 학생 의거는 일제의 총칼 앞에 민족정기와 애국심을 드높인 젊은 학생들의 피끓는 의거였으며, 32명이나 옥고를 치렀다.세월은 흘러 임들은 가셨어도 그날의 함성은 해방된 조국에서 자유를 누리는 후학들의 가슴에 찬란한 불멸의 빛이 되고 엄숙한 교훈이 될 것이다. 이 뜻을 기려 1970년 3월 1일 이 자리에 3.1운동 유공비를 건립하였고, 범어사 3.1운동 유공비를 2010년 6월 25일 유공비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임들의 고귀하고 거룩한 애국정신을 영원히 계승하고자 하는 뜻을 담았다. 국가보훈처는 2009년 9월 22일에 이를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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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신여학교 만세운동기념비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은 곧바로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3월 11일에 부산진일신여학교 학생 11명과 교사 2명이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의거는 당시 부산.경남 지역의 3.1운동의 첫 횃불이 된 사건으로서 그후 부산.경남 각지에서 만세의거가 뒤를 이어 일어났다. 이 의거를 주동한 여학생들과 교사는 일경에 체포되어 모두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84년 11월, 부산광역시에서 이를 기념해 '부산일신여학교 만세운동 기념비'를 전(前) 부산진일신여학교 교사가자리했던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768번지에 건립하였고 이를 1992년 5월 14일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자리잡은 동래여자고등학교 교정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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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규영 묘
추규영(1901-1977)은 부산 동래(東萊) 사람이다. 1919년 3월 7일부터 12일까지의 기간에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복천동(福泉洞)에서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 재학생인 엄진영(嚴進永)·김귀룡(金貴龍)·고영건(高永建) 등과 같이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학교비품과 등사판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500여매와 다량의 태극기(太極旗)를 인쇄하여 3월 13일 동래군청(東萊郡廳) 앞에서 장날에 모인 다수 군중에게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와 태극기(太極旗)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혔다. 동년 4월 30일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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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집 터
김법린(1899-1964)은 불교 승려로서 3·1운동때 서울에서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의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범어사로 내려와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 후 1919년 4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승려 백초월(白初月)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비밀단체인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활동을 하였으며 1920년 초 의용승군(義勇僧軍)의 계획이 발각되어 좌절되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대학 문학부(文學部)에 재학하면서 피압박민족대회(被壓迫民族大會)에서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불교계 민족운동인 만당(卍黨)에 참여하여 한용운, 김법린, 조은택, 박창두 등과 함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배척하였고,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며 경남 사천의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비밀투쟁을 전개하였다. 김법린은 동경의 조직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만당의 조직이 1938년 말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얼마 안 있어 1942년 10월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다시 붙잡혔다. 이 때 일제에 붙잡힌 회원은 그를 비롯하여 32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일제의 취조과정에서 고문을 2년 넘게 당하다가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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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 추모비
백용성(1864-1940)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전라북도 장수 출신이며, 불교(佛敎)인이다. 16세에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한 후, 전국의 사찰을 돌며 심신을 수련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는 불법(佛法)에 의해 민족을 구해야 한다는 강한 신념으로 포교와 민중계몽운동에 힘썼다. 1919년 2월 27일에는 한용운(韓龍雲)에게 3·1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자기의 인장을 위탁하여 불교측의 민족대표로서 서명 날인하게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의 민족대표와 함께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노력하던 중,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일본정부 내무대신(日本政府內務大臣) 앞으로 건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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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 항일운동기념탑
기장 항일운동 기념탑은 항일운동에 헌신하다 순국한 기장군민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희생정신을 기리며 선열들의 자랑스런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후대에 전하고자 건립하였다. 항일운동은 경술국치로 인하여 그 투쟁 수위가 높아졌고 그즈음 기장에서도 보명학교 출신 교사들이 명정의숙 학생들에게 배일사상을 주입시켰다. 기장광복회가 설립되어 임시정부에 자금지원을 협조하는 등 조국광복에 몸부림칠 때 박세현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20대에 요절하였으며, 일부 독립운동 지사들은 일제의 탄압에 고향을 등지고 망명하는 등 비운의 나날이 거듭되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국내외적으로 일어났을 때 기장면민은 장관청에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4월 5일 기장장날 거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9일 장안면민의 좌천장날 거사에는 정관 출신 주동자와 면민들이 시위에 참여하였고, 철마면민의 4월 10일 거사와 일광면민의 4월 11일 만세시위 등은 일경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고양된 항쟁의식과 조국애를 만인 앞에 드러내었다. 이러한 기장지역 항일독립운동의 결사보국 만세시위 거사는 결코 일시적인 충동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뿌리가 애국충정으로 구국운동을 해야 한다는 주인의식이라 할 것이다. 빼앗긴 조국과 잃었던 자유를 다시 찾은 지 어언 66년이 지나는 오늘에 있어서 지난날 나라의 독립과 겨레의 자유를 위해 피 흘린 분들을 기리는 것이 필요하여 세운 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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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장장터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명정의숙)
명정의숙은 일제 강점기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 설립된 민족 학교이다. 1904년(고종 41)에 한일 의정서를, 1905년(고종 42)에 을사 보호 조약을, 1907년(순종 1)에 한일 신협약을 맺게 되어 국권을 이미 잃어 나라 안이 어수선한 가운데 설립된 학교가 명정의숙이다. 1910년 국권 강탈 후 첫 기장면장이 된 권상중(權商重)은 정의감이 강하였던 부친 기장현감 권은후의 아들로 애국심이 대단하였다. 이에 기장 지역의 유지들과 힘을 합해 독립을 위한 인재를 기르기 위하여 명정의숙을 세웠다. 권상중과 지역 유지들이 세운 명정의숙은 여학교였다. 이때 남학교인 보명학교도 함께 설립하였는데, 명정의숙과 보명학교는 같은 건물에 있었다. 교사는 처음에는 기장면 동부리 하마정(下馬亭) 근처에 있었으나, 1913년에 현 장관청(將官廳) 자리로 옮겼다. 1914년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기장의 독립운동가인 권상중의 딸 권은해와 권복해가 명정의숙의 학생이었다. 명정의숙의 폐교 시기는 알 수 없다. 명정의숙은 여성 계몽 운동에 중점을 두고 교육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항일 운동에 대한 여러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는 당시 명정의숙 학생들의 활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교장이었던 박세현(朴世鉉)이 1917년 기장광복회 거사 계획이 탄로나 일경에 잡혀가서 회원 명단과 배경을 추궁당하였으나, 끝내 함구하고 무자비한 고문 끝에 부산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옥사로 교장을 잃은 명정의숙 학생 40여 명은 3·1 운동 때 기장 만세 사건에 합류하여 교장을 고문 치사시킨 일제 경찰에 저항하였다. 또한 명정의숙 학생들은 3·1 운동 주동의 한 사람으로 잡혀가 옥사한 의사 구수암의 장례를 면민장으로 이끌어 내고, 장례 때 명정의숙 학생인 권은해가 조사를 읽고 만장기를 앞세워 항의하였다. 국권 강탈 후 교육 대중화 운동으로 설립된 명정의숙은 기장 지역에서 3·1 운동에서 시작하여 기장여자청년회, 기장청년회 등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포괄하는 다양한 갈래의 민족 해방 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운동이 전개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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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출 묘
박영출(1907-1938)의 자는 현출(炫出), 호는 정인(盯仁)이며,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기장공립보통학교를 다닐 때 3·1 운동을 목격하였다. 1920년 3월 기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장에서 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하면서, 기장학우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의 단결과 항일 정신을 길러 주었다. 1920년 11월 17일 부친 박인표가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자 동래로 이사하였다. 1925년 7월 전교 학생 회장과 학급 급장을 맡고 있던 박영출은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새로 부임해 온 일본인 교장 오타 노부유키[大田信之]는 교내에서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식민지 교육에 순종할 것을 학생들에게 강요하였다. 또 한문 담당 교사 이희보의 부당한 교육 방침과 학생 세 명의 퇴학도 학생들의 분노를 샀다. 이에 박영출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을 규합하여 7월 6일 동맹 휴학을 이끌었다. 경찰이 동맹 휴학을 수사하였고, 학교 측은 학생 234명을 정학시켰다. 학부형들의 중재로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나 학교 측의 감시는 더욱 엄격해졌다. 1926년 2월 기숙사 사감인 마쓰다[松田]가 조선인 학생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박영출은 졸업을 한 달 남겨둔 상태에서 장산 촛불 시위 사건을 주도하고 퇴학을 당하였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山口高等學校]에서 생물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일본 내 다양한 공산주의 사건이 일어났다. 박영출 또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1930년 교토대학[京都大學] 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잠시 귀국한 박영출은 1931년 3월 5일 동래구 수안동 광장에서 일제의 탄압과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다. 같은 해 9월 7일에는 동래청년동맹에서 주관하는 강연회에서 ‘청년과 종교’라는 주제로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박영출의 민족주의 활동은 검거와 구속으로 이어졌다. 1930년 교토대학 재학 시절에는 재일 한인 학생 강연회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어 1931년 3월 동래구 수안동 집회 결과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 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일본에서 1933년 2월 공산주의 운동을 원조한 혐의로 구속되어 기소 유예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34년 봄에 귀국한 박영출은 외숙부 김철수를 중심으로 한 인맥과 함께 조선광복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5월 서울에서 동경고등사법학교를 졸업한 울산 출신 이관술과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재건그룹 운동을 주도한 이재유를 만났다. 박영출은 공산당 재건과 노동 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1935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과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1936년 7월 30일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았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8년 8월 2일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