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67건
-
김태원 동상
김태원(1870-1908)은 1906년 함평과 나주를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켜 전라도 일대에서 일본군경과 40여회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호남의병의 대표적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태원(太元). 이명으로 김준(準)·김죽봉(竹峰)·김창봉 등이 있다. 동생은 의병장 김율(金律)이다. 죽봉 김태원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동상이며 농성역 1번 출구 인근에 위치하고있다.김태원은 1962년에 건국 훈장 국민장에 추서되었다.
-
양상기 묘
양상기(1883 - 1910)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전라도 광주를 근거지로 활동한 의병장이다. 전라남도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 의병장 양진여(梁振汝)의 아들이다. 진위대(鎭衛隊) 병사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잠시 광주경찰서 순사로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의병장이었고, 또한 의병들과 기맥을 통하고 있던 터라 일제에 의하여 파면되는 즉시 의병항쟁에 나섰다. 1908년 5월에 광주를 근거로 거의하여, 약 80명으로 된 의병진을 편성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1909년 5월까지 전라남도의 광주·동복·담양·장성·창평 등지에서 친일역도를 처단하고 일본기관을 파괴하며 일본군과 싸웠다. 1908년 11월에는 광주에서, 그해 12월에는 동복에서, 1909년 3월에는 광주와 동복군 외북면 서유마을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서 일본수비군 및 경찰과 격전하였다. 그뒤 남원에서 잡혀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양진여 묘
양진여(1862 - 1910)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전라남도 광주에서 모병하여 의진을 편성한 의병장이다. 전라남도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출신. 의병장 양상기(梁相基)의 아버지이다. 1908년 7월 20일경 광산군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박성일(朴聖日)·김익오(金益五) 등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였다. 같은 해 11월중 광산군 대치산에서 일본 수비대를 맞아 혈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11월 24일에 양진여부대를 포함한 의병연합부대 300여 명이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크게 패배하였다. 1909년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강판렬(姜判烈)부대 및 전해산(全海山)의 의병부대 270명과 더불어 장성·담양을 습격하고, 뒤이어 일본군의 본거지인 광주(光州)를 공략하려고 하였으나 적이 대병력를 배치하여 전력을 정비하므로 중단한 바 있다. 같은 해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잡히고 말았다.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5월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
김용근 흉상
김용근(1917 - 1985)은 전남 강진(康津) 사람이다. 1937년 6월 전남 영광군(靈光郡) 염산면(鹽山面) 야월리(野月里)에 소재하고 있던 서당에 교사로 재직하였던 그는 친구들과 학생들에게 일본의 패전을 예고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붙잡혔다. 1937년 10월 3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육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38년 4월 14일 출옥하였다. 이후 1941년 6월 초순경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재학하면서 급우들에게 배일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1943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김홍두 공적비
김홍두(1879 - 1933)는 전남 광산(光山) 사람이다. 1916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을 중심으로 1915년에 결성된 혁명단체로서 주로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폈다. 그런데 1918년초 동회의 조직이 발각되어 동지들이 붙잡히자 몸을 숨기고 있던 중 1920년 7월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김 구(金九) 등 임시정부(臨時政府) 요인들과 연락·접선·회합한 후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 그런 뒤 각지 청년회와 연락하며 임시정부의 통신기관(通信機關) 설치에 힘쓰는 등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전남(全南) 나주(羅州)에서 붙잡혔다. 동년 11월 27일에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1921년 3월 8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확정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1926년 전남 장성(長城)에서 군자금 모집중 장성경찰서에 붙잡혀 3개월간 옥중생활을 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광주독립운동기념탑(상무시민공원)
광주독립운동기념탑은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선양하기 위하여 2014년에 건립되었다. 상무시민공원 내 부지 480㎡, 높이 14m 규모로 총공사비 8억 여원을 투입 조성됐으며, 탑과 조형벽, 동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탑 아래쪽 기단에는 광주독립운동 관련 유공자 1124명의 이름을 새겼고 탑신 주변에는 서재필(대한민국장), 양한묵(대통령장) 등 광주·전남 독립유공자 1,000여 명의 명단을 새겨 조국 독립을 위해 외세에 치열하게 맞선 선열들의 뜻이 후손들에 길이 기억되도록 했다.
-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1929년 11월 3일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민족운동이다. 이 운동은 단순히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던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3·1운동 이후의 기만적인 소위 문화정책과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대공황, 1920년대 이후 노동·농민·학생운동의 성장 등 국내외의 복합적 요인으로 일어났다. 광주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파급되어 194개 학교가 시위, 동맹휴학 등으로 참가하였다. 참가 학생 수는 54,000여 명으로, 이는 당시 전체학생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용감하게 참여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582명이 퇴학을, 무기정학 2,330명이 무기정학을 당했으며, 1,462명이 검거되어 악형을 받았다. 이렇듯 정의감과 애국심이 강렬했던 학생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여 1967년 광주광역시 동구 황금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이후 2004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을 신축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을 입체적으로 복합 전시 연출하여 2005년 11월 새롭게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