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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작은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광주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광주군 광주면 부동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174 일대]에 약 1천 명이 모여 시작되었다. 양림동 쪽에서 개신교인들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北門通)에서 모여들었다. 지산면(芝山面) 쪽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들이 몰려왔다. 시위 군중이 모여들자 숭일·수피아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만세 시위 주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시위 행렬은 서문통을 지나 광주지방법원(광주군 광주면 북성정 14)[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3가 1-11]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광주군 성내면 성안)[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가 35 충장서점]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위 행렬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무장 기마 헌병대가 출동하여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튿날인 3월 11일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선두가 되어 30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13일에는 광주읍 큰 장날을 이용하여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일부는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16일에는 송정면(松汀面) 송정리(松汀里) 정거장 앞 광장에서 보통학교 학생 및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한편 기독교인이자 제중의원(濟衆醫院)[현 광주기독병원]의 회계로 있던 황상호 등은 문서 배포를 통한 독립운동 확산의 필요성을 느끼고 제중의원 지하실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제1호는 1919년 3월 13일 300부가 제작되었고, 제4호까지 발행되다 일경에 적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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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시비
김윤식(1902 - 1950)의 이명은 김영랑이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강진면(康津面) 남성리(南城里) 자택에서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死傷者)가 발생하고 있는데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며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갹출하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다. 24일 이들은 따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金安植)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태극기 제작과 「선언서」 등사 등을 준비했으나 25일 전까지 목표한 태극기 개수를 다 만들지 못하고 등사판 입수도 어려워져서 결국 다음 장날인 3월 30일로 거사 계획을 연기하였다. 하지만 다음날인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無罪)’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上告)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詩)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정부는 201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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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방정(석아정)기념비
최원순(1896 - 1936)은 1917년 3월 일본 도쿄 와세다(早稻)대학교 정경과(政經科)에 입학했다. 같은 해 12월 29일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조선학생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고국의 처지를 생각해 낭비 경계와 학업 충실에 대해 호소했다. 이후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유학생대회에 참여해 조선청년독립단 조직과 독립운동 실행방법 등에 대해 의논했다. 1922년 6월 귀국한 후 상하이(上海)의 정일성(鄭一聲), 고권삼(高權三) 등과 연락하며 러시아, 중국 등의 국제정세와 독립운동 등의 소식을 교환했다. 1926년 8월 22일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재직할 때 동아일보 1면의 「횡설수설」 코너에 일제의 공산주의자 체포, 언론 탄압, 집회 금지 등을 언급하며 일명 ‘문화정치’에 대해 비판했다. 1927년 1월 안재홍 등과 함께 신간회 조직을 계획하고 3차례에 걸쳐 발기인회를 개최하는 데 참여했다. 한편으로 신석우(申錫雨)를 대표로 내세워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교섭해 ‘정치운동은 하지 않고 연구에 머문다’는 제한적인 조건으로 설립 인가를 얻었다. 이로써 2월 15일 신간회 창립총회가 개최되고 ‘기회주의 일체 부인’을 포함한 강령을 결의했다. 최원순은 이후 신간회 경성지회 조직과 조선웅변연구회 창립 등에 참여하며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나갔다. 최원순은 도쿄 유학 중에 2.8 독립선언에 참여해 체포됐다가 방면됐다. 이러한 항일적 행동으로 이른바 ‘요시찰인(要視察人)’이 돼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항일적 기사 게재로 인해 1926년 10월 4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공소를 제기해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월로 감형됐다. 그러나 상고를 제기해 1927년 2월 17일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면소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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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백범기념관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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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에 조성한 탑이다. 탑은 기단 · 탑신 · 상륜부로 구성되었다. 둥근 화강암의 하층 기단 사방에는 탑을 향해 만곡(彎曲)한 5단의 계단을 두었는데 해자를 건너면 탑과 주변 지역이 연결된다. 상층기단 전면에는 학생들의 독립운동 모습을 부조한 청동판을 부착하였다. 그 위의 하층 탑신부에는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문구를 3단으로 새겼다. 탑신 전면에는 세로로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光州學生獨立 運動記念塔) ’이라 쓰인 이승만 대통령 친필 휘호를 새긴 청동판을 부착하였다. 상륜부에는 찰주가 회오리치는 횃불 모양의 수연을 관통하는 모습을 구현하였다. 기념탑은 불교의 전통적 화강암 탑의 구성을 따랐지만, 전면에 역사적 사건을 시각화한 장치인 청동부조판을 두었다. 가로로 긴 청동판의 좌측에는 궐기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는 분노에 가득한 표정의 남학생, 책을 든 채로 궐기하는 학생 등의 모습을 새겼다. 이는 1929년 10월 30일 통학열차에서 촉발된 역사적인 사건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한편 상륜부에 연화 대신 불꽃문양을 두고, 기단부를 둥글게 하고 다보탑처럼 사방에 계단을 둔 점 등은 전통적 도상을 영구적인 기념물에 적용해 변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72년 기념탑의 주변을 정비하였고, 이후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 영역 일부를 광주학생운동 발상지로 기념화하며 1999년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하였는데 기념탑도 이때 이 영역에 포함되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사건을 계기로 하여 11월 3일부터 광주에서 시작되어 11월 12일에 두 차례의 학생시위를 거쳐 1929년 11월 말에서 1930년 3월 혹은 5월까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학생독립운동을 말한다. 이후 그해 12월에는 경성부와 수원부 등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1930년 5월까지 전국적인 동맹휴학, 학생 항일 시위로 변모,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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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여, 양상기 집
양상기(1883-1910)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전라도 광주를 근거지로 활동한 의병장이자, 양진여의 아들이다. 진위대(鎭衛隊) 병사출신으로, 1907년 군대해산 후 잠시 광주경찰서 순사로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의병장이었고, 또한 의병들과 기맥을 통하고 있던 터라 일제에 의하여 파면되는 즉시 의병항쟁에 나섰다. 1908년 5월에 광주를 근거로 거의하여, 약 80명으로 된 의병진을 편성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1909년 5월까지 전라남도의 광주·동복·담양·장성·창평 등지에서 친일역도를 처단하고 일본기관을 파괴하며 일본군과 싸웠다. 1908년 11월에는 광주에서, 그해 12월에는 동복에서, 1909년 3월에는 광주와 동복군 외북면 서유마을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담양군 무정면 덕곡리에서 일본수비군 및 경찰과 격전하였다. 그뒤 남원에서 잡혀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양진여(1860-1910)는 대한제국기 군대해산 후 전라남도 광주에서 모병하여 의진을 편성한 의병장이자, 양상기의 아버지이다. 1908년 7월 20일경 광산군에서 격문을 살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고, 박성일(朴聖日)·김익오(金益五) 등으로부터 군자금과 군량을 징발하였다. 같은 해 11월중 광산군 대치산에서 일본 수비대를 맞아 혈전을 전개하였다. 또한, 11월 24일에 양진여부대를 포함한 의병연합부대 300여 명이 추월산에서 일본군과 전투하였지만 역부족으로 크게 패배하였다. 1909년에는 부하 100명을 이끌고 강판렬(姜判烈)부대 및 전해산(全海山)의 의병부대 270명과 더불어 장성·담양을 습격하고, 뒤이어 일본군의 본거지인 광주(光州)를 공략하려고 하였으나 적이 대병력를 배치하여 전력을 정비하므로 중단한 바 있다. 같은 해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동촌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던 중 잡히고 말았다. 1910년 3월 5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5월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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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광주자연과학고)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여 구속되고 고문당한 광주공립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탑이다.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인 장재성과 왕재일, 광주공립농업학교[지금의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학생인 박인생 등은 식민지 교육을 반대하고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조직체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성진회(醒進會)를 결성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시작된 1차 광주학생운동[광주학생독립운동]이 끝난 후 일본 경찰은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48명, 광주중학교 학생 8명,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 11명, 광주사범학교 학생 5명 등 총 72명을 검거하였다. 그중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39명,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 1명을 형무소에 가두고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보안법 위반의 죄명으로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학생들은 2차 광주학생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 또한 "철창에서 신음하는 교우를 구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하다가 광주고등보통학교 앞에서 강제 해산되었다. 1959년 6월 10일 개교 50주년 기념 사업으로 광주농업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성금을 모아 전라남도 광주시 임동[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옛 교정에 세웠다. 1974년 9월 30일 전라남도 광주시 동구 서산동[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오치동]으로 학교가 이전함에 따라 이건하였다. 부지면적 902㎡에 원형의 기단 위로 4개의 사각형 기단을 쌓아 기다란 사다리꼴의 탑신을 세운 형태이다. 높이는 8.73m이며, 탑의 맨 꼭대기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인 횃불 모양의 조형물이 장식되어 있다. 기단 정면에는 교복을 입고 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하는 학생들의 모습이 동판에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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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삼일독립운동기념탑
광주삼일독립운동기념탑은 광주지역에서 전개되었던 3.1운동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기념탑으로 1986년 11월에 설치되어 2002년 11월에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광주의 삼일운동은 이후 담양·화순·곡성·영광 등의 3·1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독립광주신문』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기념탑은 기단 위에 원기둥 모양의 탑신을 세운 형태로 높이는 17.5m이다. 기단의 앞면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만세 운동 상황을 조각하였고 탑신에는 '광주삼일독립운동기념탑'이라 새기었으며 최상부는 타오르는 횃불을 형상화한 조형물로 장식하였다. 광주삼일독립운동기념탑은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로 옆에 있으며 가까이에 안중근의사 숭모비와 권총을 든 모습을 표현한 안중근 동상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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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묘
조아라는 학생독립운동, 여성 및 아동의 교육과 인권을 위해 평생 헌신한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조아라는 1912년에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장로인 아버지가 설립한 사설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1927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고 당시 교사이자 YWCA 창립자인 김필례를 만난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1930년경에 수피아여학교 동기 10여 명과 ‘백청단’이란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문맹퇴치와 아동교육에 힘쓴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 서서평(徐徐平)이 운영하던 이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나 1933년 1월에 ‘백청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개월 후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는 강제해직을 당한다. 1935년부터 총독부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1937년 수피아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자진 폐교를 한다. 수피아여학교가 폐교하자 일제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조아라를 검거해 1개월간 수감한다. 출소 후 1935년에 혼인한 남편 이태규가 있는 평양에 가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닌다. 1938년 평양 교단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자 부부는 광주로 돌아온다. 해방 후 조아라는 스승 김필례와 함께 신사참배로 폐교된 수피아여학교와 해체된 광주 YWCA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YWCA를 재건한 후 조아라는 광주 YWCA에서 여성 인권과 여성 인재 양성에 애쓴다. 1952년 7월, 광주 YWCA에 ‘성빈여사’를 만들어 전쟁 여자 고아를 수용한다. 야간 중학교 ‘호남여숙’을 설립해 성빈여사의 학생들과 저소득층 소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1962년에는 ‘별빛학원’을 설립하고 일하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아 권익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매매여성의 재활센터인 ‘계명여사’을 열고 10대 성매매 여성의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킨다. 1973년 광주 YMCA 회장으로 취임한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내란음모죄로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평생을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조아라는 2003년 7월, 92살 일기로 숨을 거둔다. 장례는 광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조아라에게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고, 2018년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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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호 공적비
이윤호(1898-1931)는 광주의 3.1운동을 주도했던 광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당시 21세의 나이로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에서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윤호는 1919년 3월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에서 동생 이창호, 처남 유계문(劉桂文)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를 지휘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시내로 진입하여 독립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3일 기각되어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5월부터 1922년 9월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특파원인 한준호(韓俊鎬), 박문용(朴文鎔) 등과 함께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노진영(盧軫永), 신대선(辛大善) 등에게 권총을 가지고 군자금 모집에 관한 취지문을 발송하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혔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고, 1922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1924년 12월 31일까지 옥고를 치렀다.1986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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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동길 공훈비
문동길(1900-1997)은 일제강점기 곡성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동지 김성현(金聖炫)·김제중(金濟中)과 같이 단체명 미상의 소속원 신덕채(申德采)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조달의 밀지를 받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1920년 음력 2월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박운아(朴雲娥)의 집에서 회합, 협의하였다. 여섯 번에 걸쳐 곡성·담양 등지의 유력가로부터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원임을 밝히고, 군자금조로 현금 및 갹출증서·물품 등을 거두어들이는 활동을 폈다. 1921년 광주군 석곡면 김두길(金斗吉)의 밀고로 잡혀 1921년 11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고 6년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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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광주교대 교육대학원)
광주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앞 광장에 건립된 기념탑이다. 일제 강점기 광주 학생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8년 11월, 광주사범.사대.교육대학교총동문회가 건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일어난 저항운동으로 3.1운동과 함께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독립운동이다. 이 기념탑은 광주교대 선배들의 애국정신과 희생적 투쟁을 기리기 위해 제1차 광주학생독립운동시기인 전남사범학교 학생의 역사적 사실, 제2차 광주학생독립운동시기인 광주사범학교 무등독서회 사건을 기록해 시민.동문.학생들의 민족혼을 기르기 위해 건립됐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의 조형적 특징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무등산 입석대의 상징성과 결합해 표현했고 탑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아래의 원형 공간은 광주 시민의 삶터로, 중앙의 투박한 덩어리는 삶에 내재된 저항의 힘을, 중앙의 우뚝 솟은 3개의 기둥은 저항의 힘들이 모여 분출하는 항일정신과 기상'을 나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