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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 표지석 (호남대학교 광산캠퍼스 앞)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한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등산에서 전투하며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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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김태원 토굴)
김태원(1870-1908)은 전남 장성의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김씨이다. 별명은 김준(金準) 또는 김참봉. 자는 태원(泰元). 호는 죽봉(竹峰)이며 의병장 김율(金聿)의 형이다. 순릉참봉(順陵參奉)의 벼슬을 지냈으나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한 김태원은 잠시 수원에 옮겨 살다가 귀향하였으며 고을 아전들의 탐학을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호소, 이를 해결하여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김율과 합진, 동복(同福) 무동산(舞童山)에서 요시다[吉田勝三郎] 기병부대 150명과 접전, 요시다의 목을 베었다. 이 때 전라남도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총상을 치료중이던 기삼연이 붙잡혀 광주에서 총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김태원은 의병부대를 호남의소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무장투쟁을 강화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장성 토물/토천[土泉] 뒷산에서 일본군 테츠도 산다 등을 포함하여 수십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일제는 김태원의 부대를 탄압하기 위해 특설 순사대를 편성하였고 이 과정에서 김태원의 동생 김율 의병장이 전라남도 화순군 송정리 소지방에서 붙잡혀 구금되었다, 또한 김태원의 전령사 이문경도 전라남도 함평군 편능면에서 체포되었으며 김태원의 비서 김규철이 전라남도 광주군 소고룡면 두동리에 있는 민영두의 집에서 체포된다. 심문과정에서 일제는 김태원이 어등산 자락에 유진하는 것을 알아내 포위하였다. 1908년 4월 25일, 광주 어등산(魚登山)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서 부하 김해도 등과 전투하다가 3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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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서봉마을 입구)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한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등산에서 전투하며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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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등산 전적지(마당바위)
어등산은 광주를 비롯한 장성·나주·함평 등지를 잇는 지리적인 요충에 위치하는 동시에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으며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태로 잠시 머물렀다가 이동한다든가, 인근 지역과의 연락에서도 편리한 특징이 있었다. 이러한 지형적 특징 때문에 한말 의병들이 자주 이용하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군경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일본군의 습격으로 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사, 피체되는 경우가 있었다. 어등산에서 전투하며 전사한 대표적인 의병장들은 다음과 같다. 1908년 4월 25일 의병장 김태원과 23명(혹은 13명)이 3시간여의 격전을 치르다가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1909년 1월 10일 김태원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지내다 독립한 조경환 의병장 이하 의병 20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어등산 자락 운수동에서 피체당하였다. 그해 9월 26일에는 양동환 의병장과 의병 80명이 교전하다 10명이 전사하였다. 전해산 의병부대의 중군장을 맡았던 김원범도 어등산에서 순국하였다. 2008년 11월 14일, 광주 광산구는 김태원 의병장을 비롯한 한말의병들이 최후를 맞은 곳으로 추정되는 마당바위 인근의 토굴과 석굴에 각 1개씩 유적지 안내판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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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철 집
한국의 서정시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용아 박용철(1904∼1938) 선생의 생가이다. 김영랑·정지용·정인보 등과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순수시 전문지인 『시문학』을 발간하여 그 창간호에 대표작 『떠나가는 배』,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시문학』, 『문예월간』 등 문예지를 간행하였고 방대한 역시편 등을 통하여 해외문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한국 근대 문학사에 큰 공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서로 『박용철전집』2권이 있다. 이 집은 선생의 고조부가 지었다고 전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며, 슬레이트 지붕을 1995년 원래 초가로 복원하였다. 본채와 사랑채, 행랑채, 사당, 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본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왼쪽은 부엌이며 가운데 2칸은 방으로 꾸몄다. 사랑채는 5칸이며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행랑채는 4칸으로 사랑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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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 의적비(송정공원)
이기손(1877-1957)은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전남서부지방(광산, 나주, 함평)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7대손으로, 이영의(李榮儀)의 아들이다. 호는 금재(錦齋), 용섭당(龍攝堂)이며 이칭으로는 연해(淵海), 금재(錦齋), 연해(淵海)로 불렸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을사조약·한국군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광산·나주 등지에서 8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뒤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뒤 장성의 기삼연의진(奇參衍義陣)의 부장인 전해산(全海山)·김태원(金泰元)과 모의해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전투(龍鎭山戰鬪)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군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용진산보다 지형이 유리하고 군량미 조달이 쉬운 성문산(城門山)으로 본진을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무안군 지도(智島)에 설치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하였으며,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그 뒤 고창 극오동과 노동 작전에서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화력과 병력이 부족해 의병의 피해가 적지 않자 잠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에 사촌(沙村)에서 패하고, 전해산 의진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중 적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하였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러시아·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였다가 1915년 러시아에서 귀향하여 금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고종과 순종을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지어 널리 민족정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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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술 구 묘
오성술 (1884-1910)은 김태원 의병부대를 이어 받아 활동한 의병대장으로 오인수(吳仁洙)라고도 불렸다. 오성술은 1905년 의거할 것을 결심하여 가산을 정리하고 의병기금을 마련하여 김태원(金泰元)의병부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4월 김태원이 전사하자, 의병장이 되어 전라남도 담양에서 일본군 지휘관 요시다[吉田]를 사살하였다. 1908년 1월 10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집을 습격하여 일본인 3명을 살해하고, 소총·일본도 등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나주에서 밀정 황도현(黃道玄)의 재산을 탈취하고 그를 살해하였다. 1909년 1월 30일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모리[森十內]의 집을 습격하여 2,500원 상당의 물품을 탈취하였으나, 곧 붙잡혔다.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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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채 공적비
이병채(1875-1940)는 관동지방에서 활약한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전라남도 고흥 출신이며.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이후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1896년 민용호(閔龍鎬)가 중심이 되어 설치한 관동9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의 의병장이 되어 최중봉(崔重峰) 등과 관동지역의 사림 및 백성들에게 포유문(布諭文)을 보내고 그 기세를 높여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진이 관동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그러나 그 해 가을에는 관군의 포위망에 싸여 부득이 그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서울 남산골에서 의병 1,000여명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일대격전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국권이 침탈된 뒤 1913년에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서 전라남북도순무중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만주 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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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재
시기재(始基齋)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왕동 원당부락에 있는 상평공(喪平公) 오자치(吳自治)[1426~?]를 배향한 재실이며 1913년에 건립되었다. 오자치는 나주 오씨의 중시조로 1467년(세조13)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다. 오자치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에 약간의 내용이 있을 뿐 그 외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이곳은 나주 오씨의 집성촌 중 하나로 의병장 오성술과 오상열에 대한 기념과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오상렬은 1906년 김태원 의병진에서 도통장이 되어 전라남도 광주·함평·나주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용진산에서 45일간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일본군에 타격을 주었으나 적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오성술은 김태원 의병장이 1908년 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 의진을 수습하여 인솔하였으며 1909년 군자금 모금 활동이 알려지면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아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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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수재
율수재(聿修齋)는 최익현(崔益鉉)이 제주도·흑산도에 유배 되었을 때에 최익현을 보필하던 제자 박해량(朴海量)과 박해량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박현동(朴玄東)이 태어난 곳이자 강학을 하던 공간이다.박현동(1886~1962)의 본관은 밀양이고 자는 서일(瑞日), 호는 하은(河隱)이다. 박현동은 율수재(聿修齋) 살림채에서 태어났다. 율수재는 1886년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였던 아버지 박해량(朴海量)이 건립하였는데 이후 박현동의 강학 공간으로도 쓰였다. 박현동은 최익현 의병진에서 좌익장(左翼將)으로 최익현을 가까이서 보좌하며 의병 활동을 하였다.율수재는 1897년 박해량의 사후에 아들 박원동(朴源東)이 중건하였으며 이후 박해량의 손자인 박선규가 관리하고 있다. 2021년 현재 재각(齋閣)으로 사용된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장수동 장수마을 서쪽 방향에 있으며, 어등산 아래에 있는 수남제 인근에 있다. 도리석초, 도리기둥의 평기와 팔각지붕으로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우측 2칸을 비롯한 좌측 1칸이 대청마루 거실로 꾸며져 있다. 좌측 거실의 옆에 별도의 1칸 다락이 설치되어 있고, 중앙의 2칸이 판자마루로 터져 있다. 칸마다 위아래로 열고 닫는 벽괘용 새살창문이 달려 있고, 중앙의 2칸 마루를 제외한 좌우의 거실 3칸이 모두 칸막이 밀창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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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남일 순절비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義兵將沈南一殉節碑)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의 뜻을 길이 전하기 위해 1972년 1월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건립위원회에서 세웠다.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광주공원에 있다. 3개 층으로 좌대를 마련하고 그 위에 순절비를 세웠다. 비석 앞면에는 큰 글자로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義兵將沈南一殉節碑)를 새겼고 비문은 노산 이은상(李殷相)이 지었으며 글씨는 신호열(辛鎬烈)이 썼다. 순절비 건립에 찬조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방명비(芳名碑)가 있다. 심남일(1871~1910)은 본명은 수택(守澤), 호는 덕홍(德弘),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전라남도 함평 출신이다. 심남일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장흥, 영암. 해남, 보성, 남평, 능주, 나주 등지에서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1909년 능주 풍치(風峙)(지금의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화악산 기슭)에서 체포되어 1910년 경상북도 대구 지역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심남일은 자신의 항일 투쟁을 기록한 일기 및 실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심남일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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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욱 항일 사적비
신동욱의 항일 사적비이다. 2021년 8월에 제작되었으며 광주공원 안에 위치하고 있다. 신동욱(1870-1943)은 1909년 전남 함평군(咸平郡)에서 전해산의진(全海山義陣)에 식량을 지원하고, 1914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전남 함평군 대표로 임명된 사실이 확인되어 2016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전해산의진은 1908~1909년 사이에 전남 서부 지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지역민들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자발적으로 군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신동욱은 전남 함평에 전해산의진이 주둔하자 이때 삶은 돼지고기와 술을 지원하였다. 이 밖에도 김태원의진(金泰元義陣)이나 심남일의진(沈南一義陣) 등에도 군수품을 제공하였다. 1912년 음력 9월 본격적으로 결성된 독립의군부는 임병찬(林炳瓚)이 주도한 항일비밀결사였다. 독립의군부는 1914년 3월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는데, 신동욱은 이때 함평군 대표를 맡아 활동하였다.